소설리스트

66화 이상한 세상 (5) (66/341)

이상한 세상 (5)

고맙소, 고맙소 동ㅁ···.

아니 이게 아니지.

스물밖에 안 됐는데 벌써 고자가 될 수는 없다.

“그, 일단 성함이 생쥐스트시라구요?”

“예! 맞습니다, 선생님! 아아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실 줄은...!”

씁. 이건 뭐 스토커도 아니고... 좀 위험한 사람 같은데.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면서 요런 사람이 뉴스에 나오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그... 생쥐스트 씨? 진정하시고 일단 먼 길 오신 것 같은데 차나 한잔 하시면서 얘기 나누시죠.”

겸사겸사 흥분도 좀 가라앉히시고.

“아! 역시, 기욤 선생님은 정말 성인이시군요!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시다니!”

“어, 음...어...”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게 그렇게까지 친절...한 건가?

전 잘 모루겠소요...

그런 우리의 모습에, 옆에 있던 페시옹 씨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차는 제가 끓여오겠습니다. 사장님.”

“에...?”

페시옹 씨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1층 조리실로 내려갔다.

안돼, 가지마! 스토커랑 둘이 붙여놓다니 이런 세상에.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생쥐스트의 부담스러운 얼굴을 보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절 보고 싶어서 찾아오셨다고 했는데, 그것 외에 따로 제게 따로 하고 싶으신 말이나 바라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무, 물론입니다,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가...이걸 어디다가 뒀드라...”

생쥐스트는 옆으로 들쳐 맨 보따리 짐을 풀고 그 속에서 꼬질꼬질해진 잡지한 부를 꺼내서 두 손으로 내게 건넸다.

나는 꼬질꼬질한 잡지를 받아 표지에 적힌 잡지이름을 속으로 읽어 내렸다.

[인민의 벗, 1789년 8월 10일]

“이건...[인민의 벗]이네요? 장 폴 마라였나 그 사람이 쓰는.”

“맞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혹시 거기에 싸인 좀 해주실 수 있는지...”

“아 그런 거야 흔쾌히 해드리죠. 어디에 써드릴까요?”

“여, 여기 4 페이지에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보자, 잠깐만. 이거 내 말을 무단도용 했던 그 기사잖아?

“···왜 그러시나요 선생님?”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자, 생쥐스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손을 휘휘 젓고는 잡지를 들어 빈 공간을 펜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여기 요 빈 공간에 해드리면 될까요.”

생쥐스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예! 거기 해주시면 됩니다!”

“자, 여기 있습니다.”

내가 휘갈긴 싸인이 담긴 잡지를 받아든 생쥐스트는 입꼬리를 귀에 걸고 헤실 헤실 웃었다.

이렇게 보니까 사람 참 순수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베르사유에 있는 뱀의 마음을 가진 새끼들이랑은 종 자체가 달라 보이는 걸.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뒤를 페시옹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페시옹 씨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페시옹 씨, 차는요?”

“그것이...사장님, 밑에서 플로리앙 선임님이 오셔서 기다리십니다. 아무래도 생쥐스트 씨와 만남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 싶습니다.”

“플로리앙 씨가요?”

“예. 윤전기 일이라고 하면 사장님께서 아실 거라고...”

“아.”

그래서 차를 타다말고 들어온 거구나. 확실히 윤전기가 좀 큰 건수긴 하지.

그러면 이 손님은 어떻게 한다.

내 속을 꿰뚫어 본건지 생쥐스트는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선생님! 애초에 제가 막무가내로 찾아온 건데요.”

“아,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생쥐스트 씨. 제가...아마, 잠시만 생각 좀.”

오늘 밤까지 윤전기 건 대강 계획 세우고, 내일 아침에 콩도르세 후작님 한번 찾아뵌다고 치면...

“제가 아마 내일 오후 즈음에는 시간이 날 테니 그 때 한 번 찾아오시지요.”

내 말에 생쥐스트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입니까? 제가 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먼 길 오셨다면서요. 잠깐 차 한 잔 마실 짬 내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나 보고 싶다고 멀리서 온 사람인데 그래도 잠깐 얘기는 해줄 수 있는 거지 뭐.

생쥐스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러면 내일 뵙는 걸로 하고, 전 일 때문에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플로리앙 씨가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러다가 사장님 얼굴도 다 까먹는 거 아닌지 싶습니다.”

“저도 베르사유에서 계속 있다 보니까 이삭의 민족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었나 싶더라구요.”

플로리앙 씨의 손을 잡으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했다.

“아니 저랑 야근을 그렇게 많이 하셨는데 사무실은 까먹으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좀 섭섭하네요.”

“베르사유에 있는 사무실에서도 야근을 많이 해서요.”

“그럼 뭐 인정이죠.”

플로리앙 씨 또한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윤전기 특허 낸 사람 이름이 누구라고요?”

플로리앙 씨는 내 말을 듣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몇 장 넘기더니 내게 건넸다.

수첩에는 특허청장의 서명이 쓰여 있는 공문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 옆에 붉은 색 펜으로 X자가 쳐져있었다.

“보셔라는 괴짜 발명가인데 이름 외에는 도통 정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80년에 파리 특허청에 왔다 간 이후론 기록이 없더라구요.”

“아니 무슨 유령도 아니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소문으로는 행방불명됐다는 소리도 있고, 영국으로 건너갔다는 소문도 있는데 확실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여기 붉은 색으로 쳐진 X는 모두?”

“예, 조사했는데 싹 다 근거 없는 소리 뿐 입니다.”

“허. 그러면 특허권은 어떻게 되나요?”

나는 수첩을 다시 플로리앙 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특허청에 말해보니 열람은 가능하지만 특허의 사용은 신원불명이 되고 10년 이상 지나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열람은 가능하다라...”

나는 턱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내렸다.

열람은 가능하다. 근데 사용은 안 된다.

그러면 참고해서 더 나은 걸 만들 수는 있다는 건가.

공돌이. 공돌이가 필요해.

나는 턱을 쓰다듬던 손을 다시 가지런히 내리고 말했다.

“···플로리앙 씨, 바스티유 쪽으로 같이 한 번 가보시죠.”

“바스티유요? 거기 뭐가 있···.”

플로리앙 씨는 아-하는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 라부아지에 그 사람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런데 그 사람 화학자 아니었나요? 기계 쪽은 그라도 잘 모를 텐데 말입니다.”

“플로리앙 씨.”

“예, 사장님.”

고개를 갸웃거리는 말하는 플로리앙 씨에게 나는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 공돌이는 갈아보기 전에는 몰라요.”

원래 공돌이는 공밀레-하고 울어야 공돌이지.

***

바스티유 요새 옆, 라부아지에의 저택.

내가 문을 몇 번 탕탕 두드리자 집에서 나온 듀퐁은 오랜만에 본 나에게 손을 내밀며 싱글벙글 웃는 채로 물었다.

“어, 기욤? 너 베르사유에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일이야 여긴?”

나 또한 듀퐁의 손을 마주잡고 흔들며 답했다.

“느그 서장···아니 선생님 좀 보러 왔다.”

듀퐁은 내 말에 씁-하면서 고개를 한 번 흔들고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실험 중이시라···.”

“그건 라부아지에 씨 일이고, 내 일은 다르거든. 지금부터 딱 10초 드린다고 해.”

왜? 라부아지에 그 인간도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사무실 쳐들어와서는 깽판을 치고 가지 않았나.

이건 복수 축에도 못 낀다구.

듀퐁은 내 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날 다시 바라보고 말했다.

“···설마 거기에 나도 포함되는 건 아니지?”

“글쎄, 내가 그럴지 아닐지는 너한테 달려있지. 만약 라부아지에 그 사람이 늦으면 그 인간 갈아버릴 때 너도 같이 갈아버릴 거야.”

“···지금 바아아로 선생님을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듀퐁은 내 말에 움찔하더니 그대로 뒤로 돌아 빠르게 집 안으로 사라졌다.

곧, 마룻바닥이 텅텅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예의 그 짜증나는 얼굴이 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실험 중이시라더니 굉장히 빨리 나오시네요?”

“아이고! 재무총감 각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시니, 이 화약국장 라부 아지에. 감동받기 그지 없···.”

씁, 이 사람이 이렇게 혀가 길었나.

나는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절레절레 흔들면서 라부아지에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됐고, 라부아지에 씨. 기계 만질 줄 압니까?”

라부아지에는 눈을 요리조리 데굴데굴 굴리다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답했다.

“···기, 기계 말씀이십니까? 전 안타깝게도 화학자라...”

“···.”

“무우울론 제가 아예 할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 총감 각하!”

내가 째려보자, 라부아지에는 바로 얼굴을 당당하게 바꿔 끼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말했다.

“라부아지에 씨.”

“예! 총감 각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시죠?”

“그렇습니다, 총감 각하!”

“그럼 아는 공학자가 꽤 있겠네요?”

“그렇... 습니다, 총감 각하.”

캬 이게 바로 황금 어장이지.

“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한 명의 이름 불러 보세요.”

라부아지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날 보고는 입을 열었다.

“조, 조세프 기요탱 박사?”

“조세프, 기...요탱?”

기요탱이면... 단두대 아니야? 사람 이름이 어떻게 단두대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말던 라부아지에는 계속해서 덧붙였다.

“조세프 기요탱 박사는 왕립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공학자 중 한 명입니다.”

“오, 그래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베르사유 국민의회에 있는 걸로 압니다, 총감 각하.”

“으음. 지금이 몇 시죠?”

라부아지에는 부리나케 집 안에 걸려있는 탁상시계를 향해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말했다.

“오후, 오후...1시입니다 각하.”

흠, 오후 1시라. 베르사유까지 왔다 갔다 한다면 대강 왕복 7시간 쯤 되겠지.

나는 뒷짐을 지고 경쾌하게 말했다.

“넉넉잡고 오늘 밤 10시에 보시죠, 라부아지에 씨.”

“예? 그렇지만 조세프 기요탱 박사는 지금 의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글쎄. 일 못할 걸? 지금 의회는 오를레앙 그 놈 때문에 하루 종일 쌈박질만 하고 있을 텐데.

나는 머리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는 이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지금 부르면 별 말 안하고 올 겁니다. 그러면 오후 10시까지 그 기요탱 박사라는 분을 데리고 제 사무실로 와주세요. 제 사무실은 알고 계시죠? 항상 뻔질나게 들락날락 거리셨으니.”

“예? 하, 하지만 재무총감 각하. 그건 너무 말이 안 되는···!”

“···뭐라구요?”

“무우울론 당연히 말이 되죠! 그럼 오늘 밤 10시에 뵙겠습니다, 재무총감 각하!”

작가의말

[사업가로 혁명에서 살아남기]의 제목이 [혁명적으로 사업합니다]로 바뀔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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