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첫 장 (6)
“이야, 저 사람 말 잘하네요.”
난 오동통한 체구로 연단 위에서 쉴 새 없이 열변을 토해내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누구? 아, 미라보 백작 말인가? 걸출한 웅변가지. 우리 같은 사람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친구라네.”
시에예스 사제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답했다.
우리가 연신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미라보 백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팔을 붕붕 돌려대고 있었다.
그가 한 번 팔을 청중을 향해 뻗으면, 이곳저곳에서 ‘옳소!’ 소리가
주먹을 쥐고 시위하듯 팔을 굽혔다 펴면, 이곳저곳에서 ‘국민의회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라보 백작은 흐뭇한 얼굴로 잔에 담긴 물을 조금 마시더니 청중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며칠 전 재무총감의 앞에서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줬던 젊은 의원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그의 용감무쌍함을 본받아 우리도 함께 외칩시다! 자랑스러운 국민의회의 의원 분들! 단상 위로 올라와 나와 함께 외칩시다! 우리가 겪어온 부조리함을 온 세상이 알게 합시다!”
음 좋아. 아주 말 잘하는 분이시고만, 그런데 중간에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젊은...의원이...설마 저 말하는 건가요?”
“그러면 기욤 군, 자네 말고 또 누가 있겠나? 하하하.”
“글쎄요, 사제님. 전 남들 앞에 서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ㅅ···.”
그러나 나는 연단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때문에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오! 자네는 그때 그 젊은 의원 아닌가! 어서 이리 올라와보게!”
젠장.
“어서 올라오게! 자, 거기 있는 분들! 조금만 길을 터주시오!”
오동통한 미라보 백작의 말에, 내 앞에 있던 인파들이 모세 앞의 홍해처럼 순식간에 갈라졌다.
그 사람들의 사이를, 나는 수없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보내는 눈빛과 함께 천천히 걸어나갔다.
관심종자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시선이라니, 그것도 내가 뭔가 대단한 말을 해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아 속이 더부룩해지네. 아침에 먹은 게 뭔지 확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 내 맘과는 다르게 내 발은 어느 샌가 미라보 백작의 옆까지 착실하게 날 배달해줬다.
“용기 있는 청년! 나는 미라보라고 하네.”
“저는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미라보 백작이 내민 손을 맞잡고 말하자, 백작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좋네, 기욤 의원! 재무총감 앞에서도 기죽지 않은 친구의 혈기를 한 번 뽐내보라고.”
“아, 예...”
미라보 백작은 내 등을 한번 톡톡 두들겨준 후 연단에서 내려가 사람들의 맨앞줄에 서서 날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그 뒤로는 수백 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기대감수치를 만땅 채운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말재주도 없는 사람한테 너무 한거 아니냐 증말.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파리 시의 3신분 대표자인 기욤 드 툴롱입니다.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방금 연단에 서 계셨던 미라보 백작님이나, 다른 분들처럼 유려한 언변을 펼칠 재주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가 겪고 또 겪었던 일만을 단출하게 풀어 말할 수밖에 없는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르넬흐 거리와 16구를 잇는 바흐에켐 다리를 아십니까? 일몰과 일출 때 그 다리에 서서 주위를 보면 참으로 이 세상이 주께서 창조하신 게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다리 위의 그 아름다운 풍경은 알아도, 다리 밑의 풍경을 아시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는 세느 강의 맑은 물로도 지워지지 않는 때를 탄 사람들이 쪼그려 앉아 나뭇조각으로 조잡한 오두막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 그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다섯 살 배기 딸아이를 먹이고자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빵을 나눠주던 제 앞에 온 한 아버지의 얼굴을 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옷이 수십 번 기워 입은 탓에, 이제는 원래 옷단보다 기운 색색깔의 옷단이 더 많다는 것도 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파리로 오는 길에 만난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제가 참 착한 사람이라고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착한 사람이어야 드는 생각이라면,
이 세상은 참으로 슬픈 세상입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와 날 기다리던 시에예스 사제님의 옆으로 가 섰다.
“““···.”””
좌중은 그런 내 모습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 이거 반응이 영 아니올시다인데. 혹시 내가 뭐 잘못했ㄴ···.
그때 수십 명의 사내가 삼부회의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푸른색 외투에 흰 바지와 각반을 입은 사내들은 일렬로 도열해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응시했다.
그런 사내들의 사이로, 금색 견장을 찬 근위대장이 들어와 엄숙하게 말했다.
“국왕 폐하의 명이오! 모든 대표자들은 행동을 멈추고 숙소로 돌아가시오! 회의장은 폐쇄하겠소이다!”
근위대장은 그 말을 마치고 허리춤의 기병도를 풀어 배의 조종타처럼 바닥에 수직으로 세웠다.
마치 이 회의장이라는 배를 자신이 통제할 것처럼.
***
며칠 전 있었던 기욤의 충격적인 포고에, 마티유는 심신을 안정시키고자 계속 산책을 하고 있었다. 물론, 산책을 하면 할수록 황당함과 배신감은 더 커져만 갔지만.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제대로 미친 새끼!”
프랑스 육군 보병 소위 마티유는 궁전보다 넓은 베르사유 정원에서 애먼 땅바닥을 발로 차면서 뇌까렸다.
“반란? 민란? 아니 어떻게 친한 동생이란 녀석이 그거에 대해 한마디도 없을 수가 있어!”
마티유는 이제 발로 땅을 차는 게 아니라 아예 군화 뒷굽으로 땅을 찍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분풀이를 한다 해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거라도 안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결국 마티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쭈그려 앉아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하긴 마티유가 생각하기에 기욤 그 녀석은 이상한 녀석이었다.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서는 콧대 높은 파리 녀석들을 깨부숴버리질 않나, 사업을 해서 돈을 억수로 벌어들이질 않나, 자기 같은 지방과 평민 친구들을 모아 친목단체를 만든 뒤 자선사업을 하질 않나.
하나 같이 범인이 할 정상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지 의심스러운 녀석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말해줬으면 좀 좋아? 기욤 그 녀석은 날 믿음직한 형이 아니라 그냥 바보 같은 짐덩이로 생각한 걸까. 좀 씁쓸하네.”
내가 그루시도 아닌데 참. 마티유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마티유의 뒤를 지나쳐 2열종대로 뛰어나갔다.
“···뭐야 근위대잖아. 잠깐만 저 쪽 방향은...?”
‘회의장인데?’
마티유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친! 설마?”
아니야. 아니겠지.
마티유는 서둘러 머릿속에 찬 나쁜 생각을 떨쳐 내려했다.
“···씨발...”
한 마디 말과 함께 마티유는 서둘러 자신이 타고 온 마차로 달려가, 마차에서 말 한 필을 풀어낸 뒤 안장에 올랐다.
‘파리로, 파리로 가야한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개죽음이야!’
그러나 마티유는 고삐를 휘두르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파리의 누구를 믿어야하지?’
잘못하면 왕과 대적하게 되는 일이다.
그런 마티유의 뇌리에, 이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전국에 배치된 평등 클럽원들이 스쳐지나갔다.
“···기욤아, 나한테 하나 빚 진거다.”
마티유는 고삐를 힘차게 휘둘렀다.
***
“여보, 듀퐁 씨 말대로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그냥 집에 있으면 안될까요?”
“괜찮소, 부인. 듀퐁 그 녀석이 호들갑이 좀 심하잖소. 그리고 그 녀석 말대로 요즘 세리 짓도 안한지 꽤 됐고. 오늘은 그저 실험기구만 구해다 오는 거니 괜찮을 거요.”
라부아지에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부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알겠사와요. 저는 그저, 걱정이 돼서...”
“하하. 너무 걱정마시오. 내가 괜히 집을 바스티유 요새 옆으로 옮긴 게 아니잖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국왕 폐하의 군대가 우리를 지켜줄 테니.”
“그건 그렇지요...”
라부아지에는 다시금 부인의 손을 한번 쓰다듬어 준 뒤, 문을 나섰다.
그의 바로 앞거리에, 총검을 치켜든 병사 수명이 오와 열을 맞춰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바스티유 요새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숨 쉬듯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지만, 이사 온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라부아지에에게는 아직도 낯설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물론 이 풍경 때문에 집을 이쪽으로 옮긴 것이고,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라부아지에는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이렇게 치안이 좋은 곳이 있나.”
라부아지에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그때, 햇빛이 쨍-하고 그의 눈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태양도, 라부아지에의 모습에 질투하는 듯 싶었다.
“아, 참으로 화사한 날이구나! 이런 좋은 날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는 씨익 미소를 짓고 마차에 올라탔다.
라부아지에가 올라타자, 마부가 마차의 앞창을 열어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선생님?”
“흠, 저번에 갔던 유리 상점으로 가ㅈ···.”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말을, 마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누군가 밖에서 거리 전체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 저 간악한 병사들이 날 고문하고 있습니다아악!!! 아이고!! 나 죽어!!! 여러분 제발 살려주세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라부아지에의 미간이 좁아졌다.
“···또 저놈인가?”
“에헤이. 그냥 참으십쇼, 선생님. 미치광이 색정광 아닙니까.”
그런 라부아지에의 모습에, 마부는 말했다.
“쯧, 후작이니 뭐니 해서 제대로 처벌도 못하고. 간수들은 대체 저런 놈 조용히 안 시키고 뭐한단 말인가.”
좋은 날, 좋은 취미 생활을 하러 가는 좋은 길에, 기분이 팍 상해버린 라부아지에였다.
그런 라부아지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스티유 요새에 딸려있는 감옥의 창살 사이로 나오는 미치광이의 말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 사드 후작은 무고하다아아아아!!!”
바스티유 요새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끔찍한 층간소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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