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코트
갑작스럽게 나타난 병사들의 모습에, 나는 말을 잃고 그들을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근위대? 근위대가 갑자기 왜? 설마 무력진압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건 아니다. 자기가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사람들을 불러놓고 다 쏴죽인다? 그 순간 전 프랑스는 봉기로 불바다가 될 게 뻔해.
그렇다면 왕은 자기가 이만큼 화났다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
이야 이거 참 좀스러운 사람이네.
“아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난 폐하의 명을 따를 뿐이오. 어서 회의장에서 퇴거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고 나가겠소.”
한 의원의 말에, 근위대장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흠, 아무래도 의원 분들은 나갈 마음이 없으신 것 같군. 제군들, 의원님들이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게.”
근위대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평균 신장 180cm에 달하는 근위대는 의원들의 팔을 잡고 강제로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다!”
“국민들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경우가 어디 있소!”
“저리 비키시오. 어차피 나갈 거라면 차라리 내 발로 걸어나가리다.”
결국 나를 비롯한 국민의원들은 순식간에 회의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회의장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근위대는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근 채 유유히 떠나갔고, 수백 명에 달하는 의원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로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허탈한 웃음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당연하게도 분노는 왕에게 향했다.
그런 와중, 한 사람이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난 이대로 왕에게 놀아날 생각은 없습니다. 나머지 의원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원들은 그 말을 시작으로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샤르트르의 대주교 시에예스입니다.”
내 옆의 시에예스 사제님.
“난 이미 의회가 외압에 의해서는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소. 벌써 말을 바꿀 수는 없지. 나 미라보 또한 여러분과 함께하리다.”
땅딸보 미라보 백작까지.
회의장 앞의 땅바닥은 이제 또 다른 아고라 광장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나는 기요탱이라 합니다. 왕은 아마 우리가 모일 장소가 사라진다면 우리 의회 또한 흐지부지되리라 생각했나본데, 그건 큰 오산이오! 나는 이 궁전에서 오랜 시간 근무해 이곳 지리는 잘 알고 있는데, 저쪽에 가면 왕족과 귀족들이 유희거리로 사용하는 구기관(球技館)이 있소. 그곳에서 모입시다!”
잠깐만, 기요탱? 단두대 만든 그 사람?
***
“우리는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이 확고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흩어지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어떤 장소든 집회할 것을 선서한다! 우리는 결코 물러 서지 않겠다!”
“국민의회 만세!”
“대프랑스 만세!”
테니스 코트는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모든 이가 두 팔 벌려 만세를 외치고, 기꺼이 손수건을 뽑아 하늘에 날리는 모습은 마치 새하얀 꽃이 하늘거리는 듯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야 이거 좀 멋있네요.”
“그래, 이 장관을 보려고 참 멀리서 왔군 그래.”
나풀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손수건 하나를 집어든 시에예스 사제님은, 그걸 손에 쥔 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제 어떡할 텐가?”
“음? 뭘요?”
“계속 이 길을 걸어갈 것인지 물어본 거라네.”
“이 길이라 하시면, 의원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시에예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어떻게 보면 의원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정확하게는...음, 그래. 세상을 바꾸는 길이라 말하겠네.”
세상을 바꾼다니. 이 소시민에게는 너무 큰 짐인 것 같은데요.
내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시에예스 사제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크게 될 사람이라고 난 생각하고 있네.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야.”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은데요.”
“과대평가라니, 수년 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측하고, 또 준비한데다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대표로 뽑히고 재무총감의 면전에서 한 방 먹이면서 동시에 연설까지 한 사람이 크게 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누가 크게 될 수 있겠나?”
“아니, 뭐. 그냥 운이 잘 맞아 돌아간 거죠.”
사제님은 씨익 웃으면서, 동시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기욤 군은 그런 사람이지. ···내 조언하나 해주겠네. 만약 자네가 이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베르사유궁전을 떠나게.”
“예?”
내 물음에, 시에예스 사제님은 먼 곳을 보며 말했다.
“우리, 그러니까 국민의회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 만약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최선이 무기징역이고 최악은 목이 떨어질 테지.
늪에 어느 정도만 들어갔을 때는 조금만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있다네, 그러나 늪에 오래 있을수록 그곳에서 빠져나오기는 두 배, 세 배로 어려워지고 말지.
자네는 아직 젊잖나, 우리가 실패해도 자네는 젊은 날의 치기어린 실수라고 변명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네.“
그러나 이 이상 더 깊게 들어가면 자네도 늪을 다 파내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어. 시에예스 사제님은 덧붙였다.
음, 사제님의 말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타당한 걱정이지. 이 폭풍우 치는 세상에서 사람 한 명 죽어나가는 건 예삿일이지 않던가.
그 사람 좋은 세르주 주교님도 전쟁이니 전사니 읊어대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혁명을 알고 있는 걸.
원래 혁명이라는 건 성공했을 때 붙는 말이다. 실패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 반란이지.
100% 대박 나는 아이템을 알고 있는데 그걸 안 잡으면 사업가로서의 체면이 안 산다.
의원 일이야 뭐. 나서서 선동 같은 것만 안 하고 무난무난하게 가면 죽지야 않겠지.
“···글쎄요. 세상을 제가 바꿀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우리가 질 거라고는 생각 안해서요.”
“하하, 이거 완전 예언가나리가 납셨군. 좋아, 나도 자네의 타고난 식견을 또 한 번 믿어보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기욤 의원.”
내 여유로운 태도에 사제님은 크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그 순간 테니스장의 문을 누군가 박차고 들어왔다.
“···내가...이미 완곡하게 한 번 돌려 말하지 않았소, 의원나리들?”
근위대장은 예의 그 태연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콧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노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열광에 휩싸였던 테니스장은, 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얼음을 끼얹은 듯이 번했다.
“당장 해산하시오! 해산하지 않는다면 지금 즉시...!”
“즉시 뭘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근위대장?”
노기 띤 근위대장의 말은 누군가에게 잘려나가고 말았다.
“누가 감히 폐하께서 임명하신 명예로운 근위대의 말을 가로막는가!?”
“내가 막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군중 속에서 누군가 한 손을 든 채로 걸어 나와 근위대장의 앞에 섰다.
이제 서른 초반을 갓 넘긴 잘생긴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근위대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영웅, 숙적 영국의 자랑 레드코트를 패퇴시킨 명장.
“···라, 라파예트 장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근위대장.”
“···장군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라파예트는 주변을 한 번 눈으로 훑더니 말했다.
“이곳에 프랑스 국민의 뜻이 있어서 말입니다.”
“···.”
근위대장의 콧수염은 이제 부들부들 떨리는 정도가 아니라 쉴 새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만약 아까 그대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이 사람들을 진압하겠다, 뭐 그런 것이라면 내 가슴팍에 근위대장의 검을 꽂아 넣기 전까지는 불가능할 겁니다.”
“···실례했습니다.”
근위대장은 라파예트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테니스장의 문을 닫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라파예트는 다시 뒤로 돌아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의원들에게 말했다.
“뭐, 이제 방해꾼도 없는데 다시 시작하지요.”
“““라파예트! 라파예트!”””
테니스장은 이제 라파예트의 이름을 연신 외치며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라파예트는 사람들에게 한 번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근데 왜 나한테 걸어오세요?
라파예트는 내 앞에 서더니 손을 내밀고 말했다.
“기욤 의원 맞습니까? 난 라파예트 후작이라고 합니다.”
난 그의 허리를 굽신하면서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아, 예 맞습니다만...”
아니 저 같이 누추한 사람한테 이러십니까. 제 안의 ‘을’ 센서가 발동 되잖아요.
“하하, 너무 자신을 낮추지 마세요. 기욤 의원의 연설 잘 들었습니다. 감동적이더군요!”
“아..하하..그..래요?”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길 기원하겠습니다. 기욤 의원.”
“아이고 저야 말로...”
다 좋은데, 전 조용히 살고 싶은데요.
호탕한 라파예트의 웃음을 뒤로, 나는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
“···뭐라 드릴 말이 없사옵니다, 폐하.”
“됐네. 라파예트 같은 영웅을 자네가 어찌하겠나.”
루이 16세는 나날이 늘어나는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 손을 저어 근위대장을 내보냈다.
“···폐하께서 직접 행차하셔야 저 자들의 분노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네케르 총감. 짐이 말을 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은 없네만.”
“송구합니다, 폐하. 그러나 저들은 지금 자신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직접 행차하셔서 본을 보여주신다면...”
“···.”
네케르의 말에도 루이 16세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국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소. 저자들에게 23일에 회의를 한다면 내가 직접 참관하겠다고 말해주시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