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무대의 첫 장 (4) (41/341)

무대의 첫 장 (4)

“···대공 전하. 이거 일이 좀 커진 것 같습니다.”

“젠장, 나도 알고 있소. 남작. 그렇게 또 상기시켜주려 하지 않아도 되오.”

대공이라고 불린 왕족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피들의 눈동자 수십 개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제길. 루이 그 놈이 평민들을 무기삼아 이렇게 외통수를 때릴 줄이야. 왕이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만 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공은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 정도 반복하자, 혼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일단은, 삼부회에 우리 사람들을 보내도록 하지. 명사회의 멍청한 놈들은 역할을 다 했으니 쳐내도록.”

명사회를 홍위병 삼아 왕인 루이를 견제하는 것도, 이제는 끝이다.

평민들이 도구 삼아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던 명사회다. 그런데 왕과 평민들이한 편을 먹었으니, 명사회는 이제 정치적으로 힘을 잃을 수밖에.

후에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지금 명사회와 연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대공은 생각했다.

“”“예. 오를레앙 대공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위 계승 서열 1위, 오를레앙 대공의 말에, 그의 말만을 기다리던 푸른 피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런 모습에, 오를레앙 대공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이 프랑스에 적합한 왕은 나, 오를레앙이지 루이 그 유약한 병신이 아니다. 이미 머리 돌아가는 귀족들은 포섭했으니, 어떻게든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기만 하면, 루이 그놈을 쫓아내는 것도 이룰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삼부회에 나갈 1신분과 2신분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들로 뽑도록 하지. 명사회처럼 미련한 놈들이 간다면 보나마나 평민들과 충돌할 게 뻔해.

명심하게, 평민을 무조건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 놈들의 주장이 왕정을 폐지하겠다, 뭐 이런 것 만 아니라면 그쪽에 힘을 모아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공 전하.“””

***

베르사유 궁전. 이 나라 프랑스의 왕이 기거하는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이자, 이번 삼부회의 회의장으로 정해진 곳이다.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가로와 세로로 각각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건물들과 그 배로 넓은 수준의 정원을 자랑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함과 귀족적인 프랑스의 색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와, 개쩐다...”

“그러게...”

얼렁뚱땅 3신분 대표자가 된 나와, 자기도 궁전 한번 구경해보고 싶다며 조수 역할을 자처하고 따라온 마티유는 그 웅장한 궁전의 모습에 입을 헤-벌릴 수밖에 없었다.

요 근래 몇 주간 대표자로 시간을 내기 위해 야근으로 퀭해진 내 눈도, 그 웅장함에 번뜩 뜨일 정도였으니까.

이걸 포크레인이나 크레인 같은 게 없는 시대에 만들었다니, 진짜 어마어마하구나. 괜히 KBC 같은 곳에서 찍은 프랑스 다큐에서 베르사유가 나오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화려함에 감탄하던 내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래, 지들은 이렇게 떵떵거리면서 산다. 이거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시에서는 땔감이 없어 얼어 죽은 사람이 마흔인데, 말도 안 나오는군.

흐흐흐.”

“낄낄낄, 돼지새끼들. 그저 돼지들 밖에 없구나.”

“귀족 놈들이, 밀 가격이 얼마인지 알기나 할까?”

지방에서 올라온 꾀죄죄한 차림의 대표자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아, 이거 좀 위험한 느낌인데.

“마티유 형, 우리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때?”

“음음. 니 말이 맞는 거 같다.”

나와 마티유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자, 근위병의 안내를 따라 국왕인 루이 16세가 대표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접견실로 향했다.

*

“···뭐라구요?”

“두 분은 3신분 대표자들 아닙니까. 평민 대표들은 1신분과 2신분 대표들의 접견이 끝난 후, 만나보겠다는 국왕 폐하의 명이십니다.”

근위병은 단호한 얼굴로 접견실로 향하던 나와 마티유를 가로 막았다.

아니. 왕이란 양반은 양심이 있나? 어떻게 보면 우리는 손님이잖아. 지가 불러놓고 손님들을 차별대우하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국왕 폐하를 만나 볼 수 있는 겁니까.”

근위병은 내 말에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더니 말했다.

“폐하께서 오후 늦게 침실로 부르실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아하! 그러니까 지가 쌩쌩할 때는 내버려두고, 지가 졸릴 때 쯤 침대에 누워서 대충 손 한번 흔들어주겠다 이건가?

오우오우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몸이 달아오르는 걸? 대통령이었으면 바로 탄핵 각 날카롭게 섰을 텐데 말이야.

괜히 저 양반 목이 단두대에서 날아간 게 아니지. 나도 이렇게 빡치는데 아까 그 꾀죄죄한 평민 대표들이 이 말을 들었으면 얼굴이 아주 시뻘게지겠어.

나와 마티유는 그날 밤이 돼서야, 겨우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국왕, 루이 16세는 피곤함이 가득 느껴지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 말했다.

“그래. 귀하는 이름이 무엇인가?”

“···파리의 3신분 대표자 기욤 드 툴롱입니다, 폐하.”

“툴롱? 툴롱이라면 남부 쪽 사람 아닌가? 파리 대표라니 신기하구나.”

“출신은 남부가 맞사옵니다만 학업과 일 때문에 파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폐하.”

“그렇군. 그래, 자네는 이제 나가고 다음 사람한테 들어오라고 말해주게나.”

“···예, 폐하.”

와! 5시간 넘게 기다려서 20초 대화라니,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걸?

이제 이 루이 16세의 심리를 아주 잘 알 것만 같네.

이 사람, 우리를 그냥 들러리로 보고 있어. 누구는 존나게 바쁜데도 씨발 강제로 끌려 나와서 이렇게 왔다갔다 난리를 치는데, 왕이랍시고 침대에 누워서 접대하는 건 선 좀 넘었지.

“그러고 보니, 어차피 나 아니어도 날아갈 사람인데 내가 기름 좀 붓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지 않나?”

“기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마티유 형.”

“니가 그런 얘기해서 평범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어서 그렇지.”

마티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내가 언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 적 있었나? 나 완전 정상인데.

***

난 아주 냉철한 판단을 내리며, 이성적인 사람이다. 며칠 전 왕의 대가리를 따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도, 그걸 진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씨발 불러놓고 다섯 시간 동안 헛소리만 늘어놓는 건 선 넘었지. 그 온화한 마티유 형조차 옆에서 푹푹 한숨을 내쉬고 있는 걸.

회의장 안의 평민대표들 사이에서는 이제 분노가 일고 있었다.

장장 다섯 시간 동안의 개회식 중, 왕은 처음 잠깐 모습을 비추고 사라졌으며, 재무총감이란 사람은 나와서 뭔지 모를 숫자만 읽어 내려갔다.

그래서 뭐 우리 말을 들어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안 그래도 지금쯤이면 일이 엄청나게 밀려있을 텐데 이따구 헛짓거리에 내 시간을 무의미하게 써야한다고?

좆같네.

“재무총감 각하. 전 3신분 대표자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다섯 시간의 긴 침묵을 뚫고 사람들의 사이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와 높게 든 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아 이거 이렇게 쳐다보시면 좀 부끄러운데.

“···발언하시오.”

재무총감 네케르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재무총감 각하.”

“야이 미친새끼야... 너 뭐해액!”

마티유는 그런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 그 누구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거참 내가 언제 이상한 짓 한 거 있나. 왜 이래.

“그 장부에 있는 숫자를 모두 읽는 것도 좋지만, 정확하게 말씀해주시죠. 지금 국고에 있는 재정이 얼마나 되는지, 순익은 얼마인지, 적자인지 흑자인지, 빚은 얼마인지. 이것만 빨리 얘기해주십시오.”

“···.”

재무총감은 내 말에 움찔했다가 한숨을 한번 쉬고 입을 열었다.

“알겠소. 어차피 내가 시간을 끌어봤자 뭐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빨리 얘기하리다. 빚이 35억 리브르고, 이자는 연 8,000만 리브르요. 이익은 없소. 오히려 지금 각지의 소요사태 때문에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정은 더 악화되는 중이지.”

이 정도면 됐소? 네케르 재무총감이 덧붙였다.

국왕은 네케르를 시간을 때우기 위한 제물로 사용했다.

네케르가 평민대표들의 시간을 끌고, 그 사이 국왕이 귀족들과 담판을 지어 어떻게든 귀족들이 돈을 내놓게 만든다는 속셈이었지만 평민들이 제대로 된 재무보고를 요청한 이상 네케르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평민들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바로 네케르에게 분노를 폭발시킬 거고 그러면 네케르는 밤중에 뒤통수에 돌을 얻어맞고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빚, 이 얼마, 라구요?”

“35억 리브르요.”

재무총감의 마지막 말에 싸해졌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회의장 곳곳에서 평민대표들이 일어나 재무총감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35억! 35억 리브르! 당신들 미쳤소!?”

“미친새끼들, 푸른 피가 어쩌고 저 째?”

“당장 해명하시오, 재무총감!”

난 그런 분위기 속에 혼자 넋이 나가 있었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거지. 35억? 잠깐만 잠깐만. 프랑스 1년 세수가 얼마더라? 1억 리브르 정도 아니었나? 언제 화폐 개혁이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씨발 여기가 짐바브웨야!???

대단하다! 유럽의 ‘중국’!

***

“허, 당돌한 친구군 그래.”

아라스 시의 대표자는 홀로 일어서 재무총감에게 말을 거는 스무 살짜리 파리 시 대표자를 보고 말했다.

주위의 모든 대표들이 일어나 재무총감을 성토하고 있음에도, 아라스 시 대표는 그저 이 일의 시발점이 된 파리 시 대표를 주시할 뿐이었다.

“저런 친구가 많아져야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텐데. 이 많은 사람들 중 저 친구만큼 용기 있는 자가 없다니 원.”

하기야 평민들의 대표자들이라고 해도 재무총감이라는 고위직에게 이의를 제기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많다면 그게 미합중국이지 프랑스이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저런 친구들과 함께 이 프랑스를 바꾸면 될 거 아닌가.”

아라스 시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아라스 시의 대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1신분과 2신분의 실정에 책임을 물어, 모든 신분이 구별 없이 인당 한 표를 행사하는 삼부회와 이후 모든 일에 대해 사회를 봐줄 대의원 위임장을 심사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

“기욤 군. 보통은 아닌 걸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름까지 뿌릴 줄은 몰랐군.

하하하!”

샤르트르 시의 대표, 엠마뉘엘 시에예스는 크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불공정한 시스템에서 어떻게 개혁을 하고, 세상을 바꾼단 말이야. 기욤 자네처럼 한번 확 태워버려야 하는 게 맞겠지.”

시에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 샤르트르의 3신분 대표. 시에예스 또한 이에 동의하는 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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