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첫 장 (3)
결과적으로, 나와 플로리앙의 판단은 맞아 들어갔다.
그것도 아아아아주 잘.
“···이거 제대로 확인해본거 맞아요?”
“예, 사장님. 직접 가서 보고 왔습니다.”
“거래처 네 군데 중 세 군데가 물량이 아예 0이라니.”
아 뒷골이 땡겨서 죽을 것 같네.
1788년도의 대흉작에 이어서 1789년 초도 어마무시한 흉작이 이어지는 바람에, 밀과 호밀의 수확량이 눈에 띄게 줄어버렸다.
덕분에 시중에 풀린 곡물 값은 거의 2.5배나 뛰었는데도 풀리면 풀리는 대로 바가지 값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파리 65만 시민 중 제대로 끼니조차 때울 수 없는 사람이 10만에 육박할 정도라는 소문도 돌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사장님이 미리 발 빠르게 대처하신 덕분에 우리 쪽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아 다행입니다.”
“플로리앙 씨가 일찍 정보를 캐 와서 할 수 있었던 건데요, 뭐.”
우리가 넉넉잡고 다섯 달 가량 쓸 곡물은 미리 쟁여놨고, 그 세배가량 되는 양은 지금 대서양을 건너고 있을 테니.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봐야지.
“아, 혹시 모르니 배가 입항하면 바로 결제까지 끝내버리세요. 아무리 계약을 미리 해놨다지만 입항하고 본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면 입 싹 닫고 다른 놈들한테 바가지 값에 팔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누군가 우리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기욤! 기욤 군 여기 있는가!?”
저 후덕한 얼굴과 운동과는 담 쌓은 몸, 그리고 날 이렇게 살갑게 부르는 사람이면.
“···콩도르세 후작님? 여긴 갑자기 왜...?”
“왜긴 왜야! 자네가 이곳 14구의 삼부회 대표로 뽑혔으니 그걸 축하해주러 왔지!”
콩도르세 후작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당연한 듯 말했다.
“···예?”
내가 왜요?
난 한참을 턱을 벌리고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학창시절 우리 모두가 꼬꼬마 초딩이었을 때, 반장선거를 기억하고 있는가?
- 선생님! 저는 제 짝궁 철수를 추천할래요!
- 선생님! 저는 민수가 반장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 선생님! 저는 수연이가 되면 좋겠어요!
그렇다. 반장선거는 추천제였다. 심지어 개인의 사견이 괴애애앵장히 들어간 추천제.
- 철수는 잘생겨서 반장이 되면 잘할 것 같아요!
- 민수는 축구를 잘해서 반장이 되면 잘할 것 같아요!
- 수연이는 공부를 잘해서 반장이 되면 잘할 것 같아요!
그래도 상관없다. 한창 자라고 배울 나이의 귀여운 아이들이니까.
문제는
그걸 왜 다 큰 어른들이 하는 건데.
- 나는 우리 구의 대표자로 기욤 드 툴롱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 기욤 드 툴롱? 그 자는 출마한다고 한 적도 없지 않소?
- 그렇습니다만 그도 계몽주의자 중 한명입니다. 그 또한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작금의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란 말이지요. 그 증거로 난 단언컨대 그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기욤, 그 사람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보십시오!
다른 귀족들이 쥐꼬리만도 못한 월급을 주며 얼토당토않은 값으로 물건을 팔때, 기욤 그 사람은 노동자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월급으로 지출했고, 또 얼마나 값싸게 물건을 팔았습니까! 그는 탐욕으로 물든 자들과는 다릅니다.
또한 나는 기욤 그 사람이 일하는 이삭의 민족 사무실의 불이 꺼진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기욤 그 사람이야말로 근면과 성실, 그리고 형제애로 뭉친 우리 민중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 음. 듣고 보니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이에 이의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 구의 대표자로 기욤 드 툴롱을 선출하는 바요!
- 와아아! 시민 만세! 제 3신분 만세!
콩도르세 후작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은 난 그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대체 왜!?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결정하는 거지?
와! 일 하나를 해치우면 일 하나가 새로 생기는 마법! 이게 질량보존의 법칙인가?
“갸아아아아아악!”
그 날 ,파리 시 3신분 대표자로 기욤 드 툴롱이 선출되었다.
***
- 짐은, 왕국의 방방곡곡에서 이름 없는 백성이 모두 자기의 소원과 요구를 짐에게 말하길 윤허하겠노라.
왕의 말은 순식간에 전 프랑스로 퍼져나갔다.
파리, 릴, 마르세유, 캉, 툴루즈, 아라스, 아미앵, 생캉탱··· 전국의 도시가 환호에 휩싸였다.
“국왕 폐하가 우리 말을 들어주신대!”
“루이 16세 국왕 폐하 만세! 프랑스 만세!”
“와아아! 시민 만세! 제 3신분 만세!”
그러자 재야에서 숨죽이고 있던 계몽주의자들이 나타났다.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평민 등 모든 계층에서 시대의 양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난 내가 지닌 모든 귀족의 권리를 포기하겠소. 영지도, 세금 징수권도 모두.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 나라의 모든 이가 사람답게 사는 것이니까!”
“와아아! 에기옹 공작 각하 만세! 시민 만세!”
“주께서 우리 성직자들에게 내린 사명은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지, 사람과 사람을 반목케 하고 수탈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나, 샤르트르의 대주교 엠마뉘엘 시에예스는 성직자라는 허울뿐인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외치겠습니다.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다!”
“와아아! 시에예스 대주교 각하 만세! 시민 만세!”
대부분의 이가 새로운 시대, 더 나은 삶이 오리라 믿었다.
“오귀스탱, 넌 그 위선자들을 믿나?”
서른 한 살의 변호사는,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밖의 광경을 보고 조소하며 말했다.
그런 형의 말에, 스물여섯 살의 앳된 변호사가 말했다.
“형님. 그래도 국왕 폐하가 직접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약속? 약속이라...”
형이라 불린 남자는 계속 약속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반복하다가 동생 오귀스탱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가 뭘 약속했지?”
“뭘 약속하다니, 당연히 모든 백성들의 말을 들어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라니, 그것 외에 또 무슨 말이 있었습니까?”
“아니. 그것뿐이지.”
“예?”
오귀스탱은 형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형은 자그마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왕은 듣겠다고 한 것 뿐, 그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우리 말을 왕이 진심으로 경청해주고 감격한 나머지 시정명령을 내렸다고 치자.”
형은 잔에 담긴 우유를 한 모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너도 봤듯이 실권을 지닌 건 고등법원의 쓰레기들과 명사회의 버러지들이지, 왕이 아니다. 그 놈들이 왕의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할 것 같나?”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준 형은, 변호사 사무소의 문을 열고 나갔다.
문 밖의 거리에는, 아라스 시의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부둥켜안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눈동자 가득 담던 서른 한 살의 변호사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들이 스스로 내놓지 않겠다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기꺼이 내놓게 만들어주마.”
그날 서른 한 살의 변호사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아르투아 주, 아라스시의 3신분 대표로 선출되었다.
1789년 4월, 봄의 일이었다.
***
“선생님! 자칫 잘못하면 위험하시단 말입니다!”
“듀퐁, 또 그 소리냐? 이번에 폐하께서 친히 명을 내리지 않았느냐, 폭도들도 이제 잠잠해질 텐데, 뭘 그리 걱정하는 지. 나 원 참.”
라부아지에는 친우 라플라스에 이어 오랜만에 본 제자 듀퐁까지 이러는 이유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안전이야 군경이 지켜줄 테고, 또 내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고발을 당할 이유도 없지 않더냐. 애초에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이성적인 생물인데 네가 걱정하는 일이 생길 리가 없지.”
듀퐁은 라부아지에의 말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몇 달 전에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백 명이 죽고 다쳤는데도 스승인 라부아지에는 몸을 사리긴커녕 아직도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더 잘걷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차라리 돈 많은 부자들에게 후원을 받으세요, 선생님! 비록 지금보다 실험 횟수야 줄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의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라부아지에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나도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야, 앞으로 얼마나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겠나? 몇 년 전의 내 머리보다 지금이 확연하게 성능이 나빠진 게 느껴지는데 쉰이 되고, 그 이상 나이를 먹으면 내가 그 때도 총명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나?”
총명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다, 듀퐁. 라부아지에는 덧붙였다.
“···총명함을 다 발하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그것도 과학자로서 실격 아닙니까.”
“흥, 요상한 놈이랑 친구랍시고 밖에 싸돌아다니면서 사회 물 좀 먹더니 스승한테 말대답이나 하는 거 보니 머리가 많이 컸구나, 듀퐁.”
스승의 말에 듀퐁은 그저 입술을 꽉 깨문 채, 실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듀퐁은, 뒤에서 들려오는 라부아지에의 말에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자가 스승을 걱정해서 한 말이니. 어느 정도 유념은 해두마.”
라부아지에는 그날로, 잠시나마 세리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1789년 5월 1일의 일이었다.
작가의말
항상 제 글을 봐주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어제 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 글을 쓸 때만 해도, 한분 한분이 댓글을 달아주시는 게 너무 좋아서, 또 좋아요와 선호작 수가 하나, 둘 늘어만 나도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본래 간사하다고들 하죠.
요근래 투베 순위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한자리만 맴돌자, 스스로 안좋은 생각이 들덥니다.
‘아 내가 못쓰는 건가.’
‘전개에 문제가 있는 건가.’
‘왜 더 못 올라갈까’
본래는 여러분이 주시는 작은 관심에도 행복했는데, 어느덧 더 많은 것을 바라고만 있더군요.
그걸 깨달으니 너무 씁쓸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힘차게 나아가 보려구요.
항상 제 글에 댓글, 선호작, 좋아요 등 저에게 과분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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