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가법보다 우선시 되는 것 (2)
남궁대산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돼먹지 못한 계집이라니? 말을 삼가시오!”
“그대야말로 말을 삼가는 게 좋을 거요.”
연위는 남궁대산처럼 흥분하지도, 기세를 피워 올리지도 않았다.
차분했고, 여유로웠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도 여전했다.
“사건의 인과는 제대로 확인한 것이오?”
“인과라니? 지금 그따위 것을 따질 때요?! 대체 무엇을 들은 겐가! 아무리 시비가 붙었기로서니 방년도 안 된 처자의 팔다리를 부러트려? 가주는 아들을 어떻게 키운 것이오!”
무례가 과했지만, 남궁대산의 울화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제 자식은 아닐지라도 아끼던 조카딸이 반병신이 되어 버렸단다. 누구라도 화를 낼 만했다.
연위는 마음으로 남궁대산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남궁상화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정도로 끝낸 내 아들의 절제심이 아쉬울 지경이오.”
“뭣이!”
“나였다면, 가문을 우롱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 상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오.”
연위가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내 아들의 자비심이 귀 가문의 여식을 살렸소. 고마운 줄 아시오.”
“이…… 이런 요망한!”
극도로 분노한 남궁대산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분노를 터트릴 수가 없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넘겼던 말을, 연가주가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었다. 그 반복된 내용이 남궁대산의 머리를 살짝 식혀 주었다.
‘가문을 우롱하고 아들을 죽이려 했다니? 이건 무슨 말이지?’
그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연위가 말했다.
“귀 가문의 상화라는 아이가 술에 취해, 남궁은 한 번도 본가를 같은 칠대세가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더이다.”
남궁대산이 이를 갈았다.
“그렇다고 귀 가문을 우롱했다 여기는 거요? 고작 그런 이유로……!”
“심성도 가다듬지 못한 어린아이의 말이 남궁의 의지라고 생각하지 않소. 하물며 술까지 취했다 하니, 취객의 헛소리로 치부하면 그만이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남궁대산은 더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연가주는 아끼는 조카더러 심상을 가다듬지 못했다느니, 취객이라느니 말하고 있었다.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살기까지 드러낸 채 연가의 자식들을 꿇리라 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뭐, 뭐라고?”
“죽이겠다 한 것도 모자라 모욕까지 주려는 그 행위, 나는 남궁가주가 자식을 어찌 가르쳤는지 모르겠소.”
남궁대산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역사가 짧다지만 벽산연가는 칠대세가의 한 축이다.
중원에 알려진 지 오십 년밖에 안 된 역사로 칠대세가에 꼽혔다는 것은, 연가의 힘이 다른 세가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 잠재력만큼은 그 이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힘도 안 되는 가문을 무림 최고의 명문들과 함께 언급할 리가 없다.
남궁상화는 그런 가문의 아들들을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 모욕까지 준 것이다.
“믿을 수 없다!”
남궁대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증좌라도 있는 것이오? 가주의 아들 말만 듣고 남궁을 모욕할 심산이라면……!”
“칠대세가의 자식들 간의 일이오. 내가 허투루 조사했을 것 같소?”
“이익! 그렇다면 당사자라도 불러 보시오! 내 직접 가주의 아들 말을 듣고……!”
“이보시오, 남궁 당주.”
연위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소?”
“…….”
“내 자식들은 모욕을 받았고, 심지어 협박까지 받았소. 마음 같아선 당신 조카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오.”
“내 말은!”
“남궁가주가 직접 와서 사과해도 분이 안 풀릴 판에, 고작 외원 당주 따위가 와서 이 난장을 친단 말인가?”
연위는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자네, 죽고 싶은가?”
번쩍!
여유와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연위의 두 눈에서 은은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 살기를 느낀 남궁대산은 순간 빙굴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느꼈다. 어찌나 차갑고 매서운지 저도 모르게 내공이 꿈틀거릴 정도였다.
“이것이 남궁의 의지라면, 좋네. 남궁의 검이 얼마나 매서운지 직접 확인토록 하지. 자네의 목을 베어 직접 남궁으로 찾아갈 것이네.”
귀에 탁탁 박히는 서늘한 목소리에 남궁대산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자, 잠시만!”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남궁대산은 침을 삼켰다.
바늘처럼 촘촘한 살기를 드러냈을 뿐, 그 이상의 기세를 느끼진 못했다. 연위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차분했다.
그러나 남궁대산은 그 살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연위의 무공이 자신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내가 뭔가 착각을 하긴 한 것 같소.”
“착각? 지금 내 앞에서 그따위 요언(妖言)을 뱉을 처지던가?”
남궁대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자존심 상하고 치졸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앞의 연위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도 하지만, 연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말도 안 되게 큰일로 번질 수 있었다.
‘제길!’
후회됐다. 형제들은 모두 남궁의 요직에 앉아 있지만, 자신은 아직까지도 외원의 당주로 있었다.
가내에서는 수뇌부 대우를 해 줬지만, 그래도 당주는 당주였다. 형님인 가주는 그에게 큰 권력을 주지 않았다.
워낙 다혈질이기 때문이다. 자칫 대외의 일을 그르칠까 무서워 이 나이가 되도록 당주로 있는 것이다.
그에 서운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늘, 어쩌면 형님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입술이 말라 왔다.
자존심 강한 남궁대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앞뒤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들어온 것에 대해 사과하겠소.”
“…….”
“조카가 그 지경이 되었다기에 눈이 뒤집혔소이다. 가주에게는 면목이 없소.”
연위는 말없이 남궁대산을 주시했다.
유리처럼 투명한 안광이었다. 남궁대산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다, 다시 사정을 알아보겠소. 그러니 오늘 일은…….”
“걱정 말게. 잊지 않을 테니.”
“가주!”
“나는 이 사실을 백도 무림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네. 자네 가문이 이에 마땅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남궁대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 걸렸다.
만약 연위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남궁세가의 협명(俠名)에 얼룩이 질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남궁상화는 물론 자신에게도 있다.
큰일이었다. 화가 나서 무작정 쳐들어왔는데, 이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생겼다.
“가, 가주…….”
“꼴도 보기 싫으니 이만 나가시게.”
“…….”
“귀 가문이 어찌 나오는지, 내 똑똑히 두고 볼 것이네.”
연위가 몸을 돌렸다.
입술을 깨문 남궁대산이 남문을 나섰다. 직접 문을 부수고 난입한 입구가, 지금은 지옥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렇게 남궁대산이 연가를 나섰다.
연위가 부서진 남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깝군.”
아깝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총관은 어디에 있나?”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저 멀리서 호리호리한 사내가 달려왔다. 무공을 익혔지만 깊게 연성한 것 같진 않았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 법한 사내, 연가의 총관인 태경(泰傾)이었다.
“관주부 상 노인에게 대문을 의뢰하게. 이전보다 질 좋은 목재로 해 달라고 하게.”
“아, 예!”
태경이 다소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한데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음?”
“너무 강하게 나가신 것은 아닌지…….”
멀리서 다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부터 수습하고, 내일 바로 알아보게.”
“아, 예! 알겠습니다.”
태경에게 주변 정리를 맡긴 연위가 홀로 내원을 향해 걸었다.
그때, 한 줄기 그림자가 나타났다.
연호정이었다.
“아버지.”
연위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첫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늦었다. 이만 침소에 들거라.”
“잠이 오질 않아서요.”
연위가 걸음을 멈추고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유독 달이 밝은 밤이었다. 건물 그림자에서 벗어나 달빛을 받는 큰아들의 눈빛은 무척이나 깊어 보였다.
다시 한번 침소로 가라 말하려던 연위는, 문득 아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이 말씀입니까?”
“남궁세가 측에서 어떻게 나올 거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불현듯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는 연위도 몰랐다.
그러나 연호정의 대답에, 그는 내심 놀라고야 말았다.
“중요한 것은 남궁세가가 아니라 본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남궁세가가 사과를 하지 않아도, 이 일은 묻어 두시겠지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옷에 묻은 먼지 좀 털어 내자고 불까지 지를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런 생각까지 할 줄 안단 말인가.
거북한 비유를 떠나, 연위는 아들의 안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간 보여 주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란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오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정을 주시하던 연위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 일이 좋게 넘길 수 있을 만큼 사소한 사건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예?”
“너는 내 아들이다.”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어느새 말을 끝낸 연위가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걸음걸이였다.
물끄러미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 * *
다음날.
“끄응.”
시원한 가을바람도 몸을 식혀 주진 못했다.
뚝뚝 떨어지는 땀이 벌써 웅덩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연지평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저 왔…… 헛?!”
연지평이 눈의 휘둥그레졌다.
“형님, 뭐 하세요?”
“보면 모르냐. 마보(馬步) 수련이다.”
“마, 마보요?”
연지평이 당황할 만도 했다.
하체를 단련하는 마보는 모든 무공의 핵심이다. 다만, 비연심법까지 대성한 형이 굳이 기본 중의 기본인 마보 수련을 할 필요는 없다. 육체를 단련하고자 함이라면 다른 수련 방법도 많지 않은가.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버지께서 내리신 벌이다.”
“버, 벌로 마보를요? 잠깐,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으셨어요?”
“묘시(卯時).”
“헉! 거의 두 시진이나 됐잖아요?!”
“얼마 안 남았다.”
연호정의 육체는 아직 영글지 못했다. 내공도 쓰지 않고 반나절 동안 마보를 하면 누구라도 죽어 나간다.
연호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런 거 한다고 안 바뀝니다.’
총관 태경에게 새벽 일찍부터 아버지의 전갈을 받았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네겐 죄가 하나 있다. 바로 무인의 죄다. 잔혹한 손속은 피를 부르게 마련이니, 그것은 백도(白道)가 아니다. 두 시진 동안의 마보 수련으로 초심을 되찾거라.’
마보 수련으로 바뀔 심성이었다면 흑도에서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수련이랍시고 열심히 했다. 비연심법도 돌아보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점검했다.
연지평이 작게 속삭였다.
“형님, 이제 그만하세요. 얼추 두 시진이에요.”
“일없다.”
딱히 죄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찌 되었든 가문의 분위기가 이런 걸 어쩌겠나. 툴툴거릴 일이 많을 것 같지만, 어지간하면 익숙해지려고 노력이라도 해 봐야지.
잠시 후, 두 시진이 조금 넘었을 때.
그제야 연호정이 마보를 풀었다.
“어우, 후들거린다.”
“힘드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식사를 가져올게요.”
그때였다.
쿵. 쿵.
누군가가 대문을 두들겼다.
“대공자님 계십니까?”
“끄응, 누구쇼?”
“가주님께서 대공자님을 부르십니다.”
연호정은 징그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숙제 확인하시려나 보다. 허이구,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