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가법보다 우선시 되는 것 (3)
“가주님, 대공자가 당도하였습니다.”
“들이게.”
문이 열리고 연호정과 연지평이 들어왔다.
둘이 들어서자 가주실의 온도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연호정의 몸에서 훅하고 끼치는 열기가 대단했다.
“아버지.”
“앉거라.”
이미 자리에는 따뜻한 차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허연 김과 함께 올라오는 다향이 무척이나 좋았다.
연위가 힐끔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부른 건 첫째인데 왜 너까지 왔느냐는 눈짓이었다.
연지평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늘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요.”
궁색한 변명이었다.
“같이 앉거라.”
연지평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연호정 옆에 앉았다.
연위가 찻잔을 연지평 쪽으로 밀었다. 정신없던 연지평은 그걸 보지 못했다.
연호정을 위아래로 훑어본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한 것 같구나.”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연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네가 노력하여 훗날 정기신(精氣神)을 일치시킬 만큼의 고수가 된다면, 사흘 밤낮이고 마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한 고수가 되면 마보로 시간 보내는 일 없을 겁니다.”
연지평은 보이지 않게 팔꿈치로 연호정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아버지께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연위는 연호정의 말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한데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숙제 확인하시려고 부르셨습니까?”
“분명히 말하는데, 그건 숙제가 아니라 벌이었다. 제대로 반성한 줄 알았거늘 몸만 혹사시킨 셈이구나.”
“죽어도 바뀔 심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심이 담뿍 담긴 말이었다. 한 번 죽어 본 사람의 말이니 당연했다.
벌은 죄를 뉘우쳤을 때 그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한 번 내린 벌을 다시 줄 수 없는 노릇, 연위는 더는 연호정의 말을 책잡지 않았다.
“남궁과의 사건 때문에 미리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했다. 벽라진결을 익히겠다고?”
“아, 그렇습니다.”
연지평은 깜짝 놀라서 형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 그런 말씀을 드렸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했다. 형은 비연심법을 대성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가문의 무공을 익힐 때가 된 것이다.
연위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벽라진결은 본가의 오대신공에 속하는 무공이다. 그러나 뿌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익히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연위는 연호정의 대답에서 강한 자신감을 느꼈다.
“비연심법을 구 성까지 터득하였느냐?”
연호정은 말없이 맥문을 내밀었다. 말보다 직접 확인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아들을 보던 연위가 맥문에 손을 얹었다.
‘음?’
연위의 눈빛이 한 차례 바뀌었다.
왕성하게 흐르는 진기. 두부(頭部)와 사지(四肢) 대부분이 열린 혈도.
“언제냐?”
“조사당에서 나온 날 아침입니다.”
연위는 다시 한번 연호정의 내부를 점검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진기의 흐름이 생소하다. 서서히 깨우쳐 몸에 맞춘 게 아니라, 단번에 깨달은 것이구나.”
이번엔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과연 대단하시구나.’
진기의 흐름과 혈행, 혈도의 흔적을 보고 심법을 어떻게 대성했는지 파악한다.
이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승의 고수라도 감각이 예민하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흔적이었다.
연호정이 연지평을 힐끔거렸다.
연지평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감돌고 있었다. 딱 봐도 아는 것을 굳이 맥문을 쥐고 확인하신 게 의아했던 것이다.
‘평이의 감각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였어.’
그에 비하면 확실히 자신은 재능이 떨어졌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숱한 아수라장을 겪으며, 끊임없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나서야 개화되었다.
아버지와 동생과는 확실히 달랐다.
“기(氣)가 주는 혼란에서 벗어났다. 심법을 학문적으로 접근한 것이냐?”
“그냥 분석되더라고요.”
“한 길을 꾸준히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 될 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잘했다.”
“……!”
연호정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연지평 역시 입을 떡 벌렸다.
아버지의 입에서 잘했다는 소리를 처음 들어 본 것이다.
가문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가졌다는 연지평도 연위에게 칭찬을 받은 적은 없었다. 연위는 칭찬에 인색하고 비판에 힘을 싣는 쪽이었다.
형제에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큰 한마디였다.
“좋다. 너에게 오대신공의 연성을 허가하겠다.”
“감사합니다.”
“한데 굳이 벽라진결을 택한 이유가 있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서요.”
연가의 오대신공은 저마다 특색이 있었다. 동시에 다섯 모두 수준과 난이도는 비슷했다.
결국, 다섯 개의 무공 중 무엇을 익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란 것이었다.
잠시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한 연위가 재차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예.”
“나는 지금에야 네게 오대신공의 연성을 허락했다. 가주인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가내 누구도 오대신공을 익힐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넌 수문쌍위에게 미리 벽라진결을 익혀 두겠다고 전하라 했다.”
연위는 연호정의 건방짐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벽라진결의 구결을 알고 있었더냐?”
그렇다.
오대신공은 가주의 허락 없이는 혈육도 익힐 수 없다. 그 말인즉, 신공의 구결이 대외로 유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데 큰아들은, 미리 벽라진결을 익혀 두겠다고 말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벽라진결만이 아닙니다.”
“음?”
“오대신공의 구결 전부를 알고 있습니다.”
이번만큼은 연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커진 눈이 그의 심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연지평은 거의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섯 신공의 구결도 알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가문이 모종의 무리로부터 습격을 받던 중.
연가의 용맹스러운 무사들이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연위는 두 아들에게 오대신공의 구결을 모두 전수했다.
물론 시간이 없어서 그 많은 구결을 전부 외울 순 없었다. 연위는 연호정에게 진본 다섯 권을, 연지평에게 가본 다섯 권을 건네주며 피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연지평은 운이 나빴다. 퇴로를 점거한 고수들과 격전을 벌이다 사망한 것이다.
연호정은 피눈물을 흘리며 도주했다. 그때만큼은 그 역시 동생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무력한 현실과 연가의 부흥이란 책임감이 그의 발을 숲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석 달 뒤.
연호정은 스승을 만나 수년 만에 흑도를 제패했다.
“무인서고(武人書庫)에 들어갔던 것이냐?”
무인서고는 벽산연가의 무공 비급을 모아 둔 서고였다. 연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사들이 철저하게 호위하는 곳이기도 했다.
“허가받지 않고 들어간 적은 없습니다.”
“하면?”
연호정이 연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뭐라?”
마음 같아선 모든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연호정이라는 걸. 미래가 어떻게 변할 것이며,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전부 얘기하고 싶었다.
그는 정말이지, 아버지에게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
연호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은 아니야.’
믿어 줄지도 모르겠고, 설령 믿어 준다 해도 지금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오대신공의 비급을 보여 주었다고? 대체 언제?”
“어릴 적, 저를 데리고 무인서고에 몇 번이나 드나들지 않으셨습니까.”
연위가 눈썹을 조였다.
“어릴 적이라면…… 네가 막 무공에 입문했을 때를 말하는 게냐?”
“그렇습니다.”
“그때 보았던 오대신공의 구결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예.”
결국,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연호정의 기억력은 어릴 적보다 몇 배는 더 좋아진 상태였다. 두뇌, 상단전(上丹田)을 깊게 연마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를 속이는 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게 좋아.’
연가 최고의 무공은 오대신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대신공 모두를 알아야 연가 최고의 무공을 깨우칠 수 있다.
연호정이 오대신공의 구결을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은 훗날을 위한 포석이었다. 벽라진결을 대성하고 나면 연가의 비기까지 익힐 생각이었으니까.
비기까지 익혀야 최고가 될 수 있으니까.
“십 년도 지난 무공의 구결을 기억하고 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왜 그간 말하지 않았느냐?”
“기본공에도 쩔쩔매는 놈에게 오대신공이 무슨 소용입니까.”
“심법을 대성했으니, 이제는 말해도 된다?”
“예.”
좀 찝찝하긴 하다.
“무공 하나의 구결만 해도 천이백 자를 넘어가거늘.”
연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기억력이 제법 신통하구나.”
한 가지 뜻밖인 점은, 연위가 연호정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오대신공의 구결을 전부 안다고 해서, 그것을 급하게 익힐 이유라도 있었느냐? 네 기억력을 자랑할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다급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만.”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외치는 말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연호정은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익히고 싶었습니다.”
“대저 신공(神功)을 익힐 때는 차분한 마음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법이다. 명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연위가 의자에 살짝 등을 묻었다.
“좋다. 벽라진결의 수련을 허가하겠다.”
“감사합니다.”
“내일 조반을 먹기 전 이곳을 들러라. 심법의 기초와 비연기(飛燕氣)의 벽라진기(碧羅眞氣)화(化)를 유도해 주마.”
“알겠습니다.”
홀로 연성하는 것이 더 빠를 게 분명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세상에는 아무리 급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었다. 연호정에게는 그것이 혈육과의 약속이요, 애정이었다.
‘시작만 도움을 받고, 나머지는 내가 다 하면 돼.’
그 작은 도움으로 아버지와 말 한마디 더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차근차근,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 혈육에게 못 해 준 후회는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만 가서 일들 봐라.”
“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남궁가 쪽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답변은 놀라웠다.
“왔다.”
연호정이 눈썹을 찌푸렸다.
“연락이 왔다고요? 설마 사과를 한 것입니까?”
“가주의 사과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안휘까지의 거리는 제법 됩니다. 시간상 불가능합니다.”
“다만 당주 개인에게서 서신이 왔다. 자정 간의 일과 제 조카의 무례함을 대신 사과한다는 서신이었다.”
하룻밤 새에 당주가 직접 사과 서신을 보냈다?
연호정의 눈빛이 돌연 차가워졌다.
‘이건 안 좋군.’
다혈질인 사람이 사과도 빠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남궁대산은 남궁세가의 당주였고, 동시에 가주의 동생이었다. 아무리 명분이 없기로서니, 이리 빨리 사과를 할 리가 없었다.
“뭔가를 노리는 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연호정.
그런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눈빛은 예전과 달리 엄격함만을 담고 있진 않았다.
“이 건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이만 물러들 가 보거라.”
“예.”
연호정과 연지평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갔다.
식은 찻물을 보던 연위가 연호정 자리에 있던 찻잔을 전부 비웠다.
편안히 의자에 등을 묻은 연위의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이십 년은 안 걸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