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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화 (7/963)

7화. 가법보다 우선시 되는 것 (1)

“…….”

방 안의 공기는 숨 막힐 듯 무거웠다.

숨소리도 함부로 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연지평은 불안한 눈으로 아버지와 형을 힐끔거렸다.

“꿀꺽.”

침을 넘기는 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렇게 무려 이각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비로소 연위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라.”

앞뒤 다 자른 간단한 말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비가 붙었고 싸웠습니다.”

“요약하라고 한 적은 없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가의 계집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저희를 꿇리라고 하더군요. 살기까지 뿜기에,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싶어 다 때려눕혔습니다.”

“이가의 자식은 얼굴이 뭉개졌고, 남궁가의 여식은 팔다리가 부러졌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특히 남궁가의 여식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라 한다. 심한 내외상으로 족히 반년은 요양해야 한다더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다시는 이쪽을 건드릴 생각은 못 하겠군요.”

연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약한 표정의 변화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에 연지평은 더더욱 긴장했다.

연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먼저 시비를 걸었다지만 사내 둘이 여인 하나를 두들겨 팬 것은 큰 문제다.”

“둘이라니요?”

“음?”

“저 혼자 했습니다. 평이는 나서지 않았습니다.”

연위가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사실이냐?”

“……네.”

잔뜩 긴장해 보였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연위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혼자서 둘을 상대해?’

첫째의 실력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재능이 없는 아이는 아니지만, 아직 일류라 불릴 만한 실력도 아니었다.

안휘이가의 자식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남궁가주의 여식은 다르다. 치고받았다면 모를까, 상처 없이 압도할 실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정녕 너 혼자, 그 둘을 상대했단 말이지.”

“정확히는 이가 놈이 먼저 나섰기에 쓰러트렸고, 그다음 남궁가의 계집을 손봐 주었지요.”

“손봐 주었다…….”

연위가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가 군자가 되기를 원하진 않는다. 그러나 평소 언행에 더욱 신경을 써라. 거친 마음이 거친 말을 뱉게 하고, 거친 언사가 너의 행동을 좌우한다.”

“그렇습니까.”

“충분한 냉정함을 말 몇 마디로 잃는 것만큼 손해도 없다.”

연호정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논박을 하는 자리도, 사상을 주입하는 자리도 아니다. 그는 연가의 대공자였지만, 동시에 사파제일인 흑제성주였다. 당연히 가문이 추구하는 무인상과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아버지와 다툼을 벌이기 싫었다. 연호정이 말을 아끼는 이유였다.

말이 없는 큰아들을 보며, 연위가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남궁가는 본가와 함께 칠대세가로 손꼽히는 무림의 명문이다. 두 가문의 자제들이 피를 볼 정도로 다퉜다는 건 큰 문제야. 너 역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은근한 질책이었다. 그 자리를 피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툼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가가 칠대세가가 맞습니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그 계집은 본가를 칠대세가로 인정하지 않던데요.”

연위의 눈빛이 변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물지 못한 아이의 철없는 발언일 뿐이다. 그것을 남궁세가 전체의 의지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며 득의양양한 것과 다를 게 무엇이냐?”

“저는 남궁세가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면?”

“중요한 건 그 상황이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입니다.”

“본질을 직시하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본질은 언제나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잘잘못을 가리는 것도, 그에 따른 신상필벌도 중요하다. 하나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 특히 상대의 힘이 강할 때는 더더욱 신중해야 하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리 행동해선 안 되었다.”

이번에도 연호정은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그는 뒷골목 생활을 하며 흑도의 저열함과 끔찍함을 수도 없이 마주했지만, 동시에 백도의 이중성과 답답함도 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연가의 법도이고 아버지의 생각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무심한 눈으로 두 아들을 바라보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상을 주든 벌을 주든, 사태가 어찌 흘러가는지를 본 연후에 결정할 것이다.”

“…….”

“각자 거처로 돌아가 자숙하거라.”

심상치 않은 말에 연지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둘에게 자숙을 명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판관처럼 명확했고, 선택과 판단을 칼날처럼 단호하게 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자숙하라 하신다. 연지평은 제 생각 이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아버지.”

“말해라.”

“그, 그게요. 어쩌면 그 싸움이 벌어진 건 저 때문일는지도 몰라요. 만약 제가 사전에 막았다면…….”

“일은 벌어졌고, 사람이 다쳤다. 그리고 사람을 다치게 한 이는 네가 아니고 네 형이다.”

“아, 아버지!”

“거처로 돌아가 자숙하거라.”

“잠시만 제 말을 조금만 더……!”

연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지평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때, 연호정이 일어났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평아, 가자.”

결국 연지평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가주실로 나와 거처로 돌아가는 길.

연지평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형님.”

“음?”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그냥 형님과 거처에서 식사했다면…….”

“지평.”

“네?”

“사고를 친 형이 할 말은 아니지만, 네가 꼭 명심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

“뭔데요?”

“세상에 만약이라는 건 없어.”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인과라는 게 있다. 하지만 그 인과를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야. 고양루로 가자고 한 건 너였지만, 손을 쓴 것은 나였다.”

“…….”

“결국엔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하지만요.”

“하나 물어보자. 만약 내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네가 손을 썼을 테냐?”

잠시 고민해 보던 연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을 것 같아요.”

짧지만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온 대답이었다. 연호정은 연지평의 진심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구나. 네가 손을 쓰기 전에 이미 내가 두 놈을 박살 내 버렸지.”

“…….”

“만약을 따져 가며 네게 죄를 물으려거든, 연가를 세상에 내놓은 선조들까지도 욕을 먹어야 한다.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것이냐?”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안다. 그래서 만약이란 가정은 의미가 없다는 거야.”

“그래도…….”

입술을 앙 깨물던 연지평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만약 형님이 벌을 받게 되신다면, 저 역시 같이 받을 거예요! 제가 반드시 아버지께 그리 말할 거예요!”

연호정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지평은 기겁했다.

“우아악! 머, 머리 헝클어져요!”

“이놈아, 세상천지에 죄 없는 자식에게 벌을 주는 부모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훌쩍. 그치만요.”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이만 거처로 돌아가거라. 이래저래 놀랐을 텐데 푹 자 둬.”

연지평이 연호정의 소매를 흔들었다.

“형님도요. 알았죠?”

“걱정하지 마, 인마.”

발이 안 떨어지는 듯 몇 번이나 주춤거리던 연지평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곤 거처로 향했다.

그 자리에 서서 연지평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리 불안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나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깊은 사랑도 표현을 안 해 주면 모르는 법이다.

아쉽지만 아버지는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혈육에겐 더 엄격한 법도를 앞세웠고, 가규(家規)를 중시하라 가르쳤다.

자신에게는 상관없지만, 평이에게는 조금 더 부드러워지셨으면 좋겠다.

연호정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벽라진결은 어떻게 하지? 지금 익혀도 되나? 된통 혼날 것 같은데.”

* * *

자정이 넘은 시각.

연가의 대문 밖에서 강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가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대문을 뚫고 외원 전체를 진동케 했다.

“이놈들! 문을 열어라! 당장 가주를 불러와!”

“누구십니까?”

“뭣이? 지금 네놈들이 내게 누구냐고 물은 게냐? 오냐! 내 말해 주지!”

콰앙!

굉음을 동반한 충격이 외원의 남문을 뒤흔들었다.

콰지직! 쿵!

문 한쪽이 그대로 쓰러졌다.

높이가 일 장이요, 두께가 반 자가 넘어가는 큰 문이 일격에 부서져 버렸다. 부서진 문의 중심에는 커다란 사람 손바닥 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닥치지 못해! 나는 남궁가의 대산(大山)이란 사람이다! 당장 가주를 불러와!”

“제아무리 남궁가라도 어찌 이리 무도한 짓을 벌인단 말입니까!”

“무도? 하! 말은 잘하는군! 하면 진짜 무도한 놈을 자식이랍시고 싸고도는 이 가문은 무엇이냐! 파락호 집단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 무슨 모욕이오?!”

타다닥!

그때, 부서진 남문으로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몰려왔다.

바로 연가의 외원을 수호하는 철벽수(鐵壁手)들이었다. 호위와 경계의 임무를 주로 맡은 그들의 무공은 하나하나가 일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것들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오겠다는 것이냐?!”

“더는 용납지……!”

“비켜라!”

퍽!

남문의 수문장을 밀치고 들어온 사내는 덩치가 산만 한 중년인이었다.

거의 칠 척에 달하는 키에, 등에는 여느 장검의 서너 배가 넘는 크기의 대검(大劍)을 찼다.

철벽수들의 눈이 빛났다.

커다란 덩치의 검사는 실로 보기 드문 기세를 뿜어냈다. 본래부터 왕성했을 기운이 분노로 인해 파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남궁대산(南宮大山)이었다. 금일 정오에 들르겠다고 연락했던 사람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난입한 것이다.

“가주! 가주는 당장 나오시오! 나는 남궁……!”

“이미 왔소.”

남궁대산이 좌측 건물 창고를 바라보았다.

창고 옆에 난 소로로 중년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언뜻 보면 고집스러운 학자처럼 보이는 사내, 바로 연위였다.

남궁대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주!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외다.”

“뭐요?!”

연위가 서늘한 안광을 뿜었다.

그 눈빛에 남궁대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본가는 손님은 받아도 무뢰배는 받아 주지 않소. 안휘제일 남궁세가의 외원 당주(堂主)씩이나 되는 분이 이게 무슨 짓이오?”

차분하고 싸늘하다. 연위의 목소리와 어조는 남궁대산의 불같은 분위기와 몹시 대조적이었다.

남궁대산이 이를 갈았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다혈질이라는 그라도 감히 연위 앞에서까지 폭언을 내뱉을 순 없었다.

“긴말하지 않겠소! 가주께서도 사정은 다 들으셨을 거라 믿소!”

“무슨 사정을 말함이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이오? 가주의 자식들이 본 가주님의 여식을……!”

“귀 가문의 돼먹지 못한 계집아이가 본가를 우롱한 것도 모자라, 내 자식들을 죽이려 들었던 사건 말이로군.”

남궁대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 뭐라고?!”

천년 거암에 서리가 앉으면 이러할까.

연위가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내, 안 그래도 제대로 따져 보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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