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썩은 뿌리>
멀리 보이는 야경을 보면서 이제는 움직이기 힘든 몸을 일으켜 바로 보는 초로의 노인의 뒤에서 비서가 그 모습을 보고 부축하려고 하자 손짓으로 물러나게 한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칼칼한 하지만 흥분한 목소리가 울린다.
“이런 불야성 같은 불빛이라니···.”
똑똑.
초로의 노인이 대답하지 않고 문을 그저 창밖의 야경만을 바라보고 있자 한동안 조용하더니 이내 두터운 오크 문이 벌컥 열렸다.
우당탕하는 소란과 함께 젊은 남성이 건장한 경호원을 매달로 억지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례하군.”
“어르신 어째서 위기를···!”
“위기를 자초하냐고?”
비틀거리면서 도시의 야경을 보기 위해 위태롭게 걸어갔던 초로의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 강한 의념이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아하하하핫.”
그 웃음소리의 기백에 눌린 걸까 경호원들이 젊은 남성을 소파에 강제로 앉히고 문을 닫고 나가도 온 정신은 초로의 노인에게 향해 있었다.
“오래 묵은 짐승 새끼, 문고리 권력, 얼굴 없는 사신 등 여러 멸칭으로 불려도 두려움과 멸시를 동시에 받아가면서···내가 왜 계속 이 푸른 지붕 아래서 버틴 줄 아나?”
강한 안광으로 젊은 남성 아니 현실보다는 이상이 더 큰 꿈이 꺾이지 않은 청년을 바라본다.
“모르겠지. 내가 해방 시절의 재산을 가져다 그대로 받치면서 왜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서 이때까지 버텼는지···. 머저리 같은 놈들은 내가 재산을 다시 불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가 해방 당시 가지고 있던 재산의 규모에 대해서 모르는 놈들이 하는 허튼소리지.
”내가 얼마나 이 나라를 분단으로 이끌기 위해서 내 전 재산과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었는지 말이다. 자네 같은 젊은이는 상상하지 못할 금액이었다네.”
젊은 남성은 충격적인 초로의 노인의 말에 작은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내가 자네 같은 나이였을 때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재산만 그대로 보존했어도 지금 10대 재벌은 전부 내 발아래일걸세.”
“어째서···.”
“어째서 그 많은 재산과 내 젊음을 바쳐가면서 이 나라를 분단으로 독재로 권력투쟁의 소굴로 끝내는 외환위기로 국가를 망치고 있냐고?”
“···.”
“나는 이 나라를 이 땅에서 아니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당신도 한국인이잖아!”
처음의 어르신이라고 도움을 요청하듯 들어왔던 젊은 남성은 이제는 어찌되도 좋다는 듯 그에게 울분을 외치듯 말했다.
“나는 조선인이 아니다.”
“뭐···?”
“조선도 일본도 나의 조국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은 나를 받아줬고 조선은 나를 말살하려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 돌을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말도 안 돼···.”
“조선은 아니···지금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쓰지만···이 땅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통받게 하는 것이 내 목적이다. 외환위기는 그래···약간의 애피타이저 느낌이랄까?”
“애피타이저라고?”
“크크크큭···이 나라는 썩었다. 뿌리부터 썩었지···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 평생을 다 받쳤으니까. 그에 대한 달콤한 결실을 조금 미리 만끽한다고 해서 나에게 누가 뭐라고 하겠나? 물론 아는 이들도 없겠지만···그 부분은 좀 아쉽군.”
“무슨···.”
“오···자네 덕분에 한 명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났군.”
“방금 나간 비서나 경호원들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철저하게 내 명령만 듣는 사냥개들이지···그런 사냥개를 그리고 그런 사냥개의 머리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너희 조선인들과 한 타협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지만 덕분에 쓸만하고 사나운 사냥개들을 대량으로 사육할 수 있게 되었지.”
“뭐라고?”
“돈만 주면 물어 죽이는 사냥개, 권력만 주면 짖는 사냥개 종류도 다양했지만 그래···난 제대로 사육에 성공한 거지.”
“···?”
“그 결과 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사냥개를 풀어서 쫓아내고 죽이고 감옥에 처넣었다. 그러니 좋아하면서 일신의 안녕만 꿰차는 놈들이 붙더군. 적당히 갈라 치기를 해주니 알아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우더군. 하지만 나도 한국전쟁은 예상 밖이었지. 그래도 결과는 내 마음에 쏙 들었어.”
“···.”
“민족주의자들을 날려버리고 나라를 두 동강 내놓으니···조선인 특유의 붕당정치···아니 이제는 정당정치인가? 그것들이 알아서 갈라치기를 하더군. 자국 내 국민을 학살하는 이벤트는 지금 생각해도 잊지 못할 파티였지···그 생생한 영상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면 믿겠나? 크크크 필요할 때 마나 하나씩 공유하겠지만 아직까지도 나를 흥분하게 해주는 영상이라네.”
“미친 늙은이.”
젊은 남성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섭다는 어르신의 집무실에 강제로 밀고 들어왔을 때 보여줬던 패기로 초로의 노인에게 악을 썼다.
“내가 미쳤다고?”
“···.”
“나만큼 제정신인 사람은 없을걸? 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증오한다. 그러니 나의 행동은 너희 조선인들은 이해할 수 없어도 합리적인 행동만 한 거지.”
“···.”
“오히려 내 나라 내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임진왜란 전 사신으로 갔었던 서인과 동인처럼 서로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저들이 미친 거지. 아닌가?”
“으···.”
“권력에 미친놈들은 자국민도···자국도 도움이 안 되면 버리거든.”
“···.”
“나는 그 옆에서 그들이 방만하게 권력투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 것뿐이지.”
“···.”
“다만 이 새끼들이 처첩을 들이고 자식새끼들을 줄줄이 낳는 게 문제였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산아제한 정책을 한 게 아니라고?”
“내가 조선인들의 미래 따위에 관심이나 있을 것 같나? 물론 자네 같은 순진한 조선인을 보면 내가 그만큼 내 삶을 이 나라가 망하는데 제대로 열과 성을 다한 것 같아서 좋지만 동시에 역겨워···. 어떻게 남의 손을 통해서 자신들이 편해지려고 하는 거지?”
“···!”
“출산율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뭐든지 했지.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자꾸 애들을 싸지르니까. 인구가 늘어나잖아? 그래도 전쟁 때야 하루에도 수천, 수백씩 죽어버려서 상관없었는데··· 이대로만 간다면 인구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꼴을 볼 수는 없지.”
“···.”
“아들딸 상관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어때···내가 생각했지만 멋지지?”
“설마···.”
“이대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나라 재정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지.”
인구가 늘어나는게 최대 고민이었다는 초로의 노인의 말에 젊은 남성은 앉아 있던 소파에 온몸을 구겨 넣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런 젊은 남성의 좌절을 음미하듯 초로의 노인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설마···나한테 각종 연금을 손보라고 한 게···.”
“뭐, 공무원이 공무원 연금을 손보고 군인이 군인연금을 손보게 내가 힘 좀 썼지. 사학연금도 마찬가지지. 멍청이가 아닌 이상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손 쓸 테니까.”
“인구가 줄어드는데 연금 받는 인구가 늘어난다면···.”
의미심장하게 웃은 초로의 노인은 젊은 남성을 내려다보면서 즐겁게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다가 각 행정부처를 쪼개고 나눠서 서로 업무영역이 겹치는 회색 영역을 늘리고 일을 뭉개고 게을러질 수 있는 여지를 줬지. 국가행정으로 해결해야 하는 업무를 공사나 또는 개인 이나 단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협회나 이익집단에 일임하고 각종 업무를 쪼개서 도저히 협력하지 못하게 말이야.”
“각종 비용이 늘어나고 허가나 신고절차는 까다롭게 해서 비효율을 늘렸다는···?”
초로의 노인은 자신의 말 한마디로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젊은 남성과의 대화가 즐거워 보였다.
“큰 기업은 모르지만···각종 상공인이나 자본여력이 낮은 업체들은 잠깐의 흔들림에도 버틸 수 없도록 서로 귀찮은 일은 떠넘길 수 있도록 말이지. 절차를 복잡하게 해서 일반 시민과 행정부와의 괴리를 만들어내 누군가 트롤 짓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준 거지.”
“그···그럴 리 없어···. 분명 누군가는···.”
“누군가? 그래 자네 같은 만용이 넘치는 젊은이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런 몇몇 사람이 의구심 넘치는 죽음을 몇 번 보면 다들 모르는 척하게 될걸세.”
“그럼···.”
“국가 파산사태가 되는 거지. 뭐 지금은 애피타이저지만 10년 20년 후에 계속된 국가 재정의 악화 속에서 위기가 온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
“나라에 비효율은 넘치고···보여주기식 행정으로 소모되는 재정을 육참골단의 해결보다는 타협이라는 비겁한 변명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겠지. 과도하게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상황을 외면하고···파산하는 나라를 외신으로 접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눈 감고 있는 거지.”
“···.”
“쉽게 말해서 연금으로 한 달에 오천 넘게 받는 이들이 수두룩해질 거다. 잘나가는 대기업 사원이 300만 원을 받는데···과연 국민의 평균임금이 지금보다 배로 오른다고 한들 세금만으로 그 막대한 재정을 조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라가 힘들게 된다면 분명 연금 개혁을 할 거다.”
“누가? 대통령이? 아니면 공무원이? 크크큭 고양이한테 생선을 먹지 말고 포장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 삼국지 아니···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는 역사만 봐도···과거부터 관인들의 녹봉은 나라가 망하고 새로 생겨나지 않는 이상 수정할 수 없지. 아마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한다고 하면 탄핵 될 거다.”
“그럴 리 없어···. 분명 생각 있고 의식이 깨여 있는 이들이···.”
“생각 있는 이들? 고학력자? 그들은 미리 이 나라를 탈출해서 잘사는 나라에 정착해서 멀리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거다. 안 그럴 것 같나?”
“···.”
“그럼에도 나타나는 조선인 표현으로는 의인이 나타난다면 내가 싹 다 죽여버릴 거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말도 안 돼···.”
“그런 내 계획에 자네도 한 손 거든 거지. 난 생각도 못 했거든. 물가반영을 한 연금이라니···. 연금 금액만 올릴 생각을 했지. 감가하는 현금 가치를 감안해서 물가를 반영한 연금구조라···. 자네의 영민한 머리 덕분에 이 나라는 더 빨리 망하겠군.”
“그럴 리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 듯 괴로워하는 젊은 남성을 내려다보면서 초로의 노인이 입가는 웃고 있지만 매서운 눈은 전혀 웃음기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 많은 연금을 받지 못하고 죽을 걸 생각하니 억울하나?”
“내가 죽는다고?”
“그럼 오래 묵은 짐승 새끼, 문고리 권력, 얼굴 없는 사신으로 불리는 내방에 무례하게 들어온 이가 몸성히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
“내가 내 속마음을 이렇게 시시콜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자네는 죽은 목숨이라는 걸세.”
초로의 노인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젊은 남자가 덩치 큰 이들에게 끌려나가는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