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돌아오니까 좋네. (1)
즈발터는 진중하게 말했다.
“누가 페르디움에 딸을 보내고 싶어 하겠느냐. 너도 나처럼 되기 싫으면 지금 시기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젊고 잘나갈 때 빨리 결혼해야 해.”
“……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프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남편은 일 년의 반을 북방으로 출정 나가 자리를 비운다. 얼핏 들으면 집에 남편이 없어서 정말 좋아 보이지만, 남편만 없는 게 아니니 문제다.
돈도 없고, 위험하기만 한 시골 촌구석에서 남편도 없이 홀로 지내야 하는 처지를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페르디움 백작가는 언제나 인근 영지의 영주 가문에 사정사정해서 혼약을 맺어 왔다.
지셀과 아멜리아의 예전 약혼도 그런 식이었다.
그나마 약혼이라도 이루어지면 나은 경우다. 즈발터는 젊은 시절에 제대로 된 혼처를 구하지도 못했다.
“나를 봐라. 우연히 네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결혼도 못 했을 거다. 네 엄마도 몰락 귀족이라서 넌 지금 외가도 없지 않으냐.”
즈발터의 말에 벨린다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목을 긁적였다. 지셀의 어머니도 지참금 하나 없이, 덜렁 벨린다 하나만 하녀로 데리고 시집왔었다.
그래도 페르디움 쪽에서는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절하며 그녀를 모셔 왔다.
자조에 가까운 사실 나열에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다. 결혼이 어려운 건 꼭 영주 가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호메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공자의 위세가 많이 높아졌으니 레이폴드 백작 영애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멜리아? 그럴까?”
즈발터는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 레이폴드는 북부를 대표하는 대영주의 딸로, 고귀하고 우아하며 현명하고 자애롭다는 소문이 자자한 재원이었다.
브랜포드 후작가의 사위가 되면 더 바랄 게 없지만, 솔직히 그건 너무 양심 없는 바람이고.
‘그렇지, 이 척박한 북부에서 살려면 마음씨 곱고 착한 사람이어야 해. 그래도 일단 약혼했던 사이니까 이번에는 더 쉬울 거야.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나?’
레이폴드는 북부의 대영주다.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관계가 조금 소홀해지긴 했지만 영지도 가깝고 선대부터 명목상 오랜 동맹이었다.
레이폴드 백작은 자식도 많아, 이전에도 선심 쓰듯이 지셀과 아멜리아의 결혼을 허락했었다.
지금은 지셀의 평판이 매우 좋아졌으니 그쪽에서도 다시 받아 줄 확률이 높았다.
가신들도 하나둘씩 찬성 의견을 던졌다.
“레이폴드 백작 영애라면 전혀 부족하지 않지요. 오히려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레이폴드 백작이 다시 혼처를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바에는 오랜 동맹인 우리와 하는 게 낫지요. 관계야 다시 정립하면 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분위기가 다들 좋다는 방향으로 흘러갈수록 그에 비례해 지셀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지셀이 버럭 외쳤다.
“절대 연락하지 마세요. 죽어도 그 여자랑은 결혼 안 합니다.”
“아니, 왜요? 솔직히 이 북부에 아멜리아 아가씨만큼 좋은 분은 없지 않습니까.”
호메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배경 좋지, 아름답지, 마음씨 좋기로 유명하지, 성격도 조용하고 차분하니 내조도 잘할 거 같지. 아무리 봐도 이런 여자가 없었다.
“예전 일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런 거야 브랜포드 후작님이 뒤에 있으니 다 넘어갈 겁니다. 오히려 지금은 더 좋아할걸요? 원래 정치란 게 다 그런 겁니다.”
“아, 하지 말라고요. 절대 안 할 거니까 그리 알아두세요. 진짜 진행하면 다 엎어 버릴 겁니다. 그냥 우리 다 같이 죽는 거예요.”
지셀은 평소와 다르게 눈까지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서로 죽이려고 이를 가는 사람들을 결혼시키겠다고?
아마 신혼 첫날부터 어떻게 서로를 암살할지 고민할 게 뻔했다.
지셀의 격렬한 거부에 다들 아쉬워하며 입맛만 다셨다.
‘대체 왜 저렇게 질색하는 거지? 예전에는 분명 좋아하지 않았나. 혹시 저번에 지원금 받아왔을 때 차인 건가?’
즈발터는 내심 혀를 찼다.
집안이 차이가 나면 자존심 상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젊을 때는 사이가 안 좋더라도, 살다 보면 정도 들고 그러는 법이다.
주변만 봐도 다들 그렇게 산다.
그래도 저렇게 눈 돌아갈 정도로 싫어하니 당장은 억지로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아뇨, 지금은 생각 없으니까 결혼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저 갑니다. 야! 지원품 빨리 분류해! 영지로 돌아간다!”
지셀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즈발터는 아쉬운 눈으로 지셀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멜리아만 한 며느릿감이 없는데 말이다.
* * *
“드디어 돌아왔네요! 역시 집이 제일 좋아요.”
펜리스의 외성을 지나며 벨린다가 기뻐했다.
수도 저택도 화려하고 좋았지만 지셀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불안해서 편히 쉬진 못했다.
역시 집보다 편한 곳이 없다는 건 고금의 진리였다.
다른 일행들도 노골적으로 티 내지는 않지만 표정에서 안심한 기색이 묻어났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으로 고위 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영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영지민들이 몰려들었다.
“영주님이 오셨다!”
“우와! 그런데 저게 다 뭐야?”
사람들은 지셀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수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병장기, 각종 자재와 멋진 군마들.
그 뒤로 온갖 생필품들로 꽉 찬 수레들도 줄을 이었다.
영지에 들어오는 상단들의 행렬과도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한 번에 이 정도로 많은 물건이 들어오는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저 수레들 좀 봐. 어마어마하잖아?”
“화장품인지 뭔지 판다더니 대박이 났나 봐!”
영지민들은 수레들을 구경하며 눈을 반짝였다. 지셀이 이번에도 가져온 물건들을 영지에 풀 거라고 기대에 부푼 눈빛이었다.
뭔가를 가져오면 무조건 영지를 위해 쏟아붓는다.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고 편의 시설도 증가하는 중이었다.
일부러 노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일을 할 수 있었고 정당한 보수를 받았다.
아직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굶었던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야.”
“그러게, 나도 걱정 많이 했다니까?”
“영주님이 안 계시는 동안 어찌나 불안하던지.”
이들의 머릿속에는 아직 예전 영주와 귀족들의 폭정이 두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혹시나 지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런 놈들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다들 밤잠을 설치며 영주의 소식을 기다렸다.
영지민들은 영주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순수하게 기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영주님! 이쪽도 봐 주세요!”
“이제 어디 가지 마세요!”
영지민들은 다른 영지에서처럼 영주가 지나간다고 바닥에 엎드려 코를 박지도 않고 벌벌 떨지도 않았다.
그간 지셀이 소탈한 모습을 보여 주고, 영지민들에게 지원도 후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의 실무자이자 총관인 클로드는 이런 기회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바로 말에서 내려 이동하는 수레 위로 올라가더니 크게 외쳤다.
“모두 들어라! 이번 영주님의 상행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매우 큰 이득을 얻었고 왕국의 고위 귀족분들과 친분을 다지셨다! 특히 궁내부 장관이신 브랜포드 후작님이 영주님의 후견인으로…….”
영지민들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사람들이 브랜포드 후작이 누구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는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하여 그 수익으로 영지에 필요한 물품들을 대량으로 구매…… 갑자기 치솟은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이니 영지민들은 기존 시세보다 싸게 구입이 가능하며…… 영지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영주님의 자비로움에 모두 감사하도록!”
“우와아아아아!”
“영주님이 최고다!”
“역시 우리를 챙겨 주는 사람은 영주님뿐이야!”
땅이 들썩일 정도로 거센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감동이 극에 달한 몇몇 영지민은 눈에서 눈물을 쏟으며 쓰러졌다.
밀을 대량으로 수확하면서 식량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사람은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옷도 입어야 하고 맛있는 것도 가끔 먹어 줘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주변 영지도 펜리스 영지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생필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음식을 하는 데 필요한 조리 도구와 솥마저도 이웃끼리 공유해서 쓰는 형편이었다.
영주성 부근에는 상단이 꾸준히 찾아와 물건을 팔고 있지만 필요한 양보다 훨씬 부족했다.
그 현상은 영주성에서 거리가 먼 마을의 경우 더 심각해졌다.
그런데 영주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대량으로 구입해 왔다고 한다.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수레들에 실린 물건은 영주를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각종 생필품이었다.
그냥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놀라운 선물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클로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외쳤다.
“앞으로도 아무런 걱정 할 필요 없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영주님과 내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영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으하하하!”
영지민들도 클로드의 말에 화답하듯이 손뼉을 치며 환호를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총관님도 만세!”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총관님이 숟가락 얹는다!”
“어떤 새끼야? 나와!”
“잘못 들으신 겁니다! 와하하하!”
지셀은 웃고 떠드는 영지민들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공식적으로 발표하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깜짝 발표를 할 줄이야.
역시 주둥이 놀리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전부 희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랬던 영지민들의 밝아진 표정을 보니 뿌듯하고 보람찼다.
‘도로 정비도 빨리 해야겠어.’
북부의 상단 대부분은 펜리스 영지까지 오지 않고 레이폴드에서 물량을 쏟아 내곤 한다.
레이폴드가 크고 부유한 영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이 험한 이유도 있었다.
상단들이 더 드나들기 쉽게 하고, 화장품을 수도나 각 지점에 실어 나르려면 도로 정비는 필수였다.
영지민들의 끝없는 환호를 받으며 지셀은 천천히 영주성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도 영지로 돌아오니 마음이 다소 편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별 사고도 없었던 거 같으니 이제 다음 계획을 빨리 진행…….
콰아아앙!
생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멀리 영주성 쪽에서 큰 굉음과 함께 화염 줄기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붉은 빛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구름에는 순식간에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
지셀은 당황해서 영주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저런 폭발이 일어난 걸까? 누가 습격이라도 한 건가?
고민하던 지셀은 저 위치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