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돌아오니까 좋네. (2)
펜리스 영지, 영주성 근처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부들은 자재를 나르고 건물 토대를 쌓느라 바빴다.
그러나 공사장 한쪽 구역에는 기이할 정도로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
“야야, 요새 좀 살 만하지 않냐?”
지저분하게 해진 로브를 입은 채 땅바닥에서 뒹굴던 알포이가 툭 내뱉었다.
그 옆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마법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알포이와 비슷하게 해진 로브를 입고 있었다.
누가 보면 마탑의 도도한 마법사는커녕 공사장 인부로 생각할 만한 모습.
풀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누워 있는 알포이는 겉모습만 놓고 보면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었다.
“영주가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알포이가 꿍얼댔다. 다른 마법사들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영주가 없으니 참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공사 일에도 제법 숙련이 됐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마법사들은 지금의 이 소소한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저들끼리 낄낄댔다.
“수도에서 사고를 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그 성격에 분명 고위 귀족이랑 시비가 붙었을 거야.”
“어쩌면 이미 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라요.”
“와, 듣기만 해도 행복하다.”
마법사들은 영주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도망갈지 논의하기도 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건 아니고, 그저 희망 사항에 가까웠다.
놀 만한 거리가 없는 척박한 영지에서는 이런 얘기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심심한데 게임이나 한번 할까?”
“그럴까요?”
알포이의 말에 마법사들이 화색을 띠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도박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순진한 마법사들이, 내기에 지고 클로드와 어울리게 된 뒤부터는 매일 자기네들끼리 도박을 하며 놀았다.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한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요새 공사가 좀 늦어진다고 총관 대리가 지랄하던데요……. 오늘은 좀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해. 걔가 뭐라고 겁을 먹냐.”
알포이는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다.
로웰이 영지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권한을 받긴 했지만 알포이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알포이는 마탑의 후계자고 펜리스 영지의 마탑 지부장이었으니까.
영주 외에는 누구도 그를 쉬이 건드릴 수 없었다.
“오늘은 뭘로 할까? 홀짝?”
“네, 뭐. 간단하게 홀짝으로 하시죠.”
“좋아, 나부터 접는다.”
모두가 동의하자 알포이가 동전 네 개를 꺼냈다. 그는 동전을 양손 안에 넣고 흔들다가 그대로 주먹을 쥐고는 한 손을 내밀었다.
“걸어. 홀이야? 짝이야?”
한 마법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짝이요.”
“짝?”
“네, 짝이요.”
알포이가 피식 웃었다.
“야, 동전 네 개로 시작하면 보통 사람들은 홀을 골라. 그게 맞지. 그런데 굳이 짝을 고른다고?”
“네, 네. 그러니까 몇 개인지 얼른 확인을…….”
“아, 가만 있어 봐. 내가 지금 얘기하잖아. 그래서 안 바꾼다는 거야?”
“예예, 전 그냥 짝으로 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바꿀 기회를 주잖아! 이 새끼야!”
호통을 치는 알포이를 보며 마법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씨…… 또 시작이네. 이 새끼 가끔가다가 이렇게 맛이 간다니까?’
영지민들을 가끔 도와주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다.
가뜩이나 무급 노예라 돈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돈을 뺏기면 곤란하다.
‘이거 잃으면 술 마실 돈도 없어져! 절대 못 잃는다!’
알포이와 마법사가 서로를 노려보며 상대의 빈틈을 찾던 그때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망을 보던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와 외쳤다.
“영주가 돌아왔어!”
마법사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소소한 행복도 이제 끝이다. 다시 죽어라 일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알포이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하자. 빨리빨리 움직여, 어서!”
마법사들이 허겁지겁 일어서는 사이, 그는 동전을 슬그머니 로브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엄마! 깜짝이야!”
갑자기 큰 굉음과 함께 영주성 쪽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깜짝 놀라며 위치를 가늠하던 알포이가 중얼거렸다.
“어? 저기는…… 바네사의 연구실이잖아?”
검은 연기와 불길이 주변을 조금씩 잡아먹기 시작했다.
* * *
환호하던 영지민들도 갑작스러운 폭발에 모두 놀라서 영주성 방향을 바라보았다.
오늘같이 즐거운 날 이 무슨 사고란 말인가?
지셀은 폭발이 일어난 위치를 가늠하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바네사!”
폭발은 바네사의 수련을 위해 영주성 옆에 만들어진 마법 연구실에서 일어난 게 분명했다.
“저기에는 룬스톤도 옮겨 놨는데!”
지셀은 마력이 부족한 바네사를 위해 연구실 주변에 룬스톤을 옮겨 주었다.
마법 시전이 힘들 경우 룬스톤을 이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젠장, 달려라!”
지셀이 말에 박차를 가해 영주성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폭발에서 느껴지는 마력 수준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룬스톤의 마력이 사용됐다는 뜻이다.
그 많은 룬스톤의 마력이 한꺼번에 폭발하기라도 하면 영주성 인근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지셀을 쫓아 달렸다.
불길이 치솟은 장소에 도착하니 주변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바네사의 연구실은 중심이 되는 건물 주위에 다양한 용도의 부속 건물들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처음에 중앙 건물에서 시작했던 불은 잠시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부속 건물까지 잡아먹고 다시 크기를 키웠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기 위해 노력했다.
“도끼! 도끼 가져와! 일단 부숴!”
“다른 사람들은 물과 모래를 가져와라!”
하지만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번져 갔다.
“로웰!”
지셀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영주님!”
안절부절못하며 사람들을 지휘하던 로웰이 그를 보고 화색을 띠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모르겠습니다. 바네사 님의 연구실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바네사는?”
“아, 안에 있는 거 같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고?”
“없을 겁니다. 이 근처에는 바네사 님 외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소식에 지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들은 어디에 있지?”
“지, 지금 공사장에 있을 겁니다.”
“당장 모두 불러와! 어서!”
아직 영지에는 제대로 된 소방 시설이 없었다. 인력으로 불을 끄기에는 화재 규모가 너무 커졌다. 마법으로 불길을 잡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우지끈!
뼈대만 남아 있던 바네사의 연구실이 불꽃을 토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가서 바네사를 데리고 오겠다.”
지셀이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고 무너지는 건물에 들어가려는 찰나.
건물 안에서 무척이나 당황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위, 윈드 블래스트!”
파아아악!
아래로 떨어지던 건물의 잔해들이 바람에 밀려 사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피해!”
“뭐야아아아!”
“왜 여기로 날아와!”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았다.
지셀과 수하들은 날아오는 잔해들을 쳐 내며 사람들을 보호했다.
잔해의 비가 잠잠해지고 난 뒤 다시 건물 안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워터 스트라이크!”
쿠아아아아!
이번에는 곳곳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콰아앙! 쾅!
불이 났으니 물을 뿌리는 건 좋다. 하지만 힘 조절이 안 됐는지 물기둥이 너무 크다.
거대한 물기둥에 뚫리고 터진 잔해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셀이 다급하게 외쳤다.
“막아!”
영지민들은 뒤로 멀찍이 자리를 피하고, 지셀을 따라온 용병들이 열심히 움직이며 잔해들을 쳐 냈다.
“으아아아! 어떡해!”
안에서 마법을 시전한 사람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비명을 질렀다.
“디, 디스펠!”
사아아아아.
다시 이어진 외침과 함께 물기둥이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건물 여러 채를 잡아먹은 불은 이미 죄다 꺼졌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만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치이이익.
잔뜩 고인 물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살아남은 불씨가 넘쳐흐르는 물에 휩쓸려 사그라드는 소리가 군데군데서 터져 나왔다.
“…….”
지셀과 일행들은 온몸이 젖은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서로의 몰골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한 여자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어어엉, 엉엉, 잘못했어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눈물 콧물을 죽죽 흘리며 나온 여자는 꼴이 엉망이었다.
머리는 물에 젖어 미역처럼 늘어지고, 얼굴은 까만 숯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 해진 옷에 매달려 있던 룬스톤 파편이 자기들끼리 부딪혀 짤랑였다.
지셀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모양새를 한참 뜯어보다가 당혹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바네사?”
“어허허헝,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해서 모두에게 피해를……. 으허허헝.”
지셀의 물음에도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펑펑 흘려 댔다.
지셀이 난감해하며 재차 물었다.
“진짜 바네사 맞아?”
“네, 제가 바네사예요. 으허허헝. 제가 그 죽일 년이에요. 으어엉.”
“……몸은 괜찮아?”
“어허헝, 저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정말 죄송해요. 으허허헝.”
바네사는 진심으로 미안한지 엎드려서 오열하기만 했다. 지금 누가 말을 거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바네사처럼 소심한 사람이 이런 큰 사고를 일으키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당연했다.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말해 봐.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어허허헝, 제가 마력 조절을 제대로 못해서 실수를 했어요. 죄송해요. 흐어어엉.”
“조절을 제대로 못했다고?”
지셀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록 마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바네사는 마법 이론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
대마법사나 시전할 수 있을 거대한 함정 마법도 훌륭히 성공시켰지 않은가.
그런 그녀가 이렇게 큰 실수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어쩌다가 실수를 한 거야?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 봐.”
바네사는 몇 번 훌쩍거리더니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 마법은 처음 시도해 보는 거라 확실하게 하려고 룬스톤을 조금 과하게 썼어요. 마법을 중첩시켜서 마력의 파동을 조절한 뒤 구조 역학을 뒤바꾸어 공간적 형태와 좌표를…… 중얼중얼…… 그렇게 해서 드디어 6서클의 마법을 성공시켰는데…….”
“…….”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뭐라 뭐라 이유를 설명하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단어 하나는 귀에 쏙 들어왔다.
“6서클?!”
지셀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6서클에 오르다니, 과연 소름이 돋을 정도의 재능이었다.
“하하하! 6서클! 6서클이라니!”
건물이 날아간 사태는 지셀의 머릿속에서 싹 날아가 버렸다. 그는 주위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던 바네사는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정신이 없어서 물어보는 대로 대답은 했는데……. 총관 대리인 로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 지금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린 시야에 눈을 비비고 다시 올려다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영주님!”
지셀이 온몸이 젖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세상을 얻은 듯 기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