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거 다 제 겁니다. (3)
호메른의 입에서 격렬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왕실에서 페르디움에 지원해 주는 건데 무슨 권리로 대공자가 분배를 결정한단 말입니까?”
“왕실의 결정입니다.”
쉐어 남작은 품에서 서류 하나를 더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 줬다.
북부의 군수 지원 관리관으로 지셀을 임명한다는 임명장이었다.
임명장 하단에는 왕실의 인장이 주먹만 하게 찍혀 있다.
즈발터도, 페르디움의 가신들도 당혹감에 의미 없는 질문만 반복했다.
“대공자가 왕실 직책까지 얻어 왔단 말이야?”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북부 영지 중 왕실에서 지원하는 영지는 페르디움뿐이기에, ‘북부 관리관’이라고 해도 이름뿐인 직책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원을 받는 페르디움에서는 매우 강력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직책이기도 했다.
쉐어 남작은 놀라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했다.
“펜리스 남작님은 왕실의 재가까지 받은 궁내부 소속 관료이시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원품도 펜리스 남작님께 가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모양새가 안 좋아서요. 공식적으로는 페르디움에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하게 됐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한 마디로 즈발터의 체면은 살려 주되 실리는 지셀에게 다 몰아 줬다는 말이었다.
뻐끔뻐끔.
가신들은 다들 입만 뻐끔거리며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호메른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러면 매년 온다던 지원품도…… 대공자가 분배를 한단 말입니까?”
대답은 지셀에게서 나왔다.
“네, 제가 분배할 겁니다.”
“그, 그러면 얼마나 주실 건가요?”
“영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일단 이번에는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지셀이 선심 쓰듯이 말했다.
호메른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전부 내 것인 줄 알았던 선물이 절반으로 줄어드니 기쁨도 절반으로 줄어 버렸다.
거기다 ‘이번에는’이라는 말도 마음에 걸린다.
“내, 내년에는요?”
“글쎄요? 그때 가서 상황 보고 나눠 드려야죠.”
마음에 안 들면 하나도 안 주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셀의 말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르디움 사람들의 낯빛이 한층 더 우중충해졌다.
대공자의 힘으로 얻어 온 것들이니 전혀 안 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절반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앞으로도 대공자에게 멱살 잡혀서 끌려가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게 생겼다.
지셀이 이번에는 알버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재무관님. 정말 식량 지원 필요 없어요? 안 줘도 됩니까?”
“아니요……. 그거 잘못 들으신 겁니다.”
자신만만했던 알버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눅 든 어조로 웅얼거렸다.
지셀은 즈발터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아버지, 괜찮으시죠? 아무래도 제가 분배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 그래라……. 난 상관없다. 네가 얻어 온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야지…….”
즈발터는 내년에 지원품이 도착하면 조금이라도 빼돌릴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쉐어 남작이 말했다.
“아, 그리고 내년부터는 펜리스 영지로 지원품이 바로 갈 겁니다. 거기서 분배해서 페르디움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
호메른은 이제 실망할 기력도 없어 넋 나간 것처럼 헛웃음만 흘렸다.
대충 상황 정리가 끝나자 쉐어 남작이 지셀에게 친한 척하며 달라붙었다.
“펜리스 남작님, 짧게나마 함께 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요. 오히려 남작님이 고생하셨죠. 중간중간 영지에 필요한 것들도 산다고 시간을 좀 지체했는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쉐어 남작과 지셀은 서로 웃으며 악수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즈발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쉐어 남작, 이 사람의 아들과 꽤 친해 보이는구려.”
쉐어 남작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브랜포드 후작님이 여신 연회에서 만나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여기까지 동행하는 동안 남작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호쾌한 기상에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에 페르디움 가신들은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대공자처럼 막 나가는 놈은 얼핏 보면 호쾌해 보이긴 하지.
너희들이 그 실체를 몰라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이 넋이 나가 있는 동안에도 지셀과 쉐어 남작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며칠 쉬다 가실 겁니까? 가장 좋은 귀빈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셀의 물음에 쉐어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노튼 백작님께서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하루만 쉬고 돌아가겠습니다. 요새 수도 분위기가 어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먼 길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오래 쉬시지도 못하고……. 저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우리 사이에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가 따로 가져온 선물입니다.”
쉐어 남작이 작은 보석 상자 하나를 지셀에게 건넸다.
“부담스럽게 뭘 또 이런 걸 가져오셨습니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지셀의 손은 말과 달리 자연스럽게 상자를 받아 벨린다에게 넘긴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찌 빈손으로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혹 나중에 장관님들을 뵐 기회가 되시면 말씀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아휴, 그럼요. 이렇게 성의를 보여 주셨는데 보답은 꼭 해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즈발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청탁이야? 지금 내 아들이 청탁을 받고 있는 거야? 그것도 왕실의 행정관한테?’
게다가 아주 당당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고 있다.
사고뭉치에 싸움이나 좀 하던 아들과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모르겠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모르겠어.’
대화를 끝낸 지셀이 안내해 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페르디움 사람들은 다들 넋이 나가 있었다.
지셀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타박했다.
“일단 서기관님부터 성으로 안내하시죠. 언제까지 여기 세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 내 정신이 없어서 미처 챙기지 못했구나. 어서 들어가자.”
“아, 저는 지원품을 분류하고 바로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벌써 간다고?”
“네. 할 일이 많아서요.”
“아니, 잠깐……. 여봐라, 일단 왕실의 손님들부터 어서 귀빈실로 모셔라! 내 금방 정리하고 뒤따라갈 터이니.”
가신 몇 명이 기사들과 함께 쉐어 남작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온 몇 명의 행정관과 호위들도 성으로 들어간 뒤, 즈발터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정신이 없구나.”
왕실에서 온 사람들이 눈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손님들도 하루만 쉬고 간다 하니 오래 눈치 볼 일도 없었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을 조금 다스린 즈발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쁜 건 기쁜 거고, 짚고 넘어갈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저기…… 쉐어 남작도 없으니 다시 확인차 묻는 건데……. 절반이라도 양이 꽤 많더구나. 이거 정말 받아도 되는 거냐? 문제없는 거지?”
“네, 문제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좋긴 좋은데 솔직히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간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이 미흡했던 것도 사실 아닙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걸 이제 받는 겁니다.”
“그건…… 그랬지.”
‘네가 절반을 뚝 떼 가긴 했지만 말이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즈발터에게 지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누구도 이곳을 무시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즈발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목이 메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들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짧은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걸까?
그래도 확실히 아들이 예전과 달라진 건 알겠다.
‘좋구나…….’
아들은 페르디움 내에서도 칭송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왕실과 고위 귀족들에게도 인정받는 위치까지 성장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간 무시당하며 쌓인 억울함, 가난으로 인한 고단함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큰일을 하고서도 여유로운 게 꼭 지 엄마를 닮았어.’
아내도 아들의 이런 모습을 같이 봤으면 좋으련만.
‘여보, 왜 그렇게 빨리 가서…….’
즈발터는 눈시울이 화끈해지는 느낌에 괜히 눈을 비볐다.
‘생각해 보니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도 닯았군.’
지셀이 지금까지 쳤던 사고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쏙 들어갔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기분이었는지 떠올리니 새삼 등줄기가 선득했다.
‘이왕 철이 들 거면 조금만 더 들지.’
확실히 지셀이 최근에 해낸 일들만 보면 어지간한 영주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기쁘고 대견스러웠다. 아들의 성장이, 오랜 기간 힘들었던 영지를 살리고 있는 저 능력이.
하지만 아들이 하는 짓은 아직도 불안하고 위험천만해 보였다.
브랜포드 후작과 내기를 하고 목숨이 위험했던 건 어쨌든 사실이지 않은가?
‘끙, 이제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손을 놓으면 더 천방지축처럼 날뛸 게 뻔하니 원.’
북방의 야만인들이라도 열심히 막아서 아버지도 아직 멀쩡하다고 증명하는 수밖에.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즈발터에게 지셀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지원품은 미리 수레 단위로 분류해 뒀으니 나누는 데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즈발터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셀을 붙잡았다.
“왜 그렇게 급하게 간다는 거냐. 오랜만에 왔는데 밥도 좀 먹고 쉬다가 가지. 동생 얼굴도 좀 보고.”
“아닙니다. 차후에 따로 시간을 내서 오겠습니다. 란돌프 단장도 빨리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에 연락도 안 하면서 나중에 찾아오기는 무슨. 너 필요할 때만 오지 않았느냐.”
“……아, 바빠서 그렇다니까요.”
“세상에 바쁜 사람이 너밖에 없더냐? 다른 사람들은 바쁜 중에도 가족들 잘만 챙기더라. 그렇다고 네가 부인이나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
“말 나온 김에 얘기나 들어 보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만나는 사람도 없지?”
옛날에는 안 이랬던 거 같은데 아버지도 나이를 먹으니 잔소리가 많아진다.
아무래도 아까 혼수품 얘기로 헛물을 켜서 결혼시킬 생각이 더 커진 모양이었다.
지금은 연애하고 결혼할 생각도 없고 시간도 없다.
지셀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가신들까지 끼어들어 외친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빨리 다른 혼처를 찾아야 합니다.”
“결혼이야 일찍 하면 할수록 좋은 겁니다. 후계 자리를 튼튼하게 해야죠.”
“평판이 올라간 지금이 적기입니다. 시기를 놓치면 대공자 성격상 언제 또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즈발터도 말이 나온 김에 밀어붙일 심산으로 딱 잘라 말했다.
“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으니 내가 혼처를 알아보마.”
“지금은, 결혼 생각이, 절대, 없습니다.”
지셀이 또박또박 끊어 말하며 강조했지만, 상대방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없어도 해야지. 결혼은 네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잖으냐.”
귀족가에서 결혼의 결정권은 언제나 가주에게 있었다.
지셀은 푹푹 한숨을 내쉬며 대화 방향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야말로 재혼 자리를 찾아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요새 좀 외로워하시는 거 같던데.”
즈발터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난 인기가 없다.”
“…….”
사나이의 안타깝고도 솔직한 발언에 지셀은 할 말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