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이거 다 제 겁니다. (2)
즈발터는 다가오는 자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깃발은 요란하게 달았지만 사람 수는 적다. 짐이 너무 많은데……. 선발대가 보급품을 싣고 온 건가? 그런데 선전 포고도 없이 그냥 이렇게 왔다고? 아무리 왕실이라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가신들 앞에서는 호기롭게 외쳤지만 사실 즈발터도 심경이 복잡해 미칠 거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냥 달려 나가서 용서를 비는 게 낫지 않나 고민된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기에 명성이 자자한 고위 귀족들이 힘을 합쳐 병사들을 보냈을까?
다가갈수록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손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때였다. 다가오던 연합군이 이쪽의 군대를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즈발터도 이동을 멈추고 상대편을 살폈다.
“영주님, 일단 저쪽 지휘관을 만나서 무슨 일인지 대화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호메른의 말에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말을 탄 몇 명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기마술이 제법이구나.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보……. 어?’
다가오는 놈들이 뭔가 좀 낯이 익다. 그런데 가장 선두에 선 젊은 놈은 더 낯이 익었다.
‘그놈 참 잘생긴 게 내 아들을 닮았……?’
즈발터가 다가오는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외쳤다.
“야!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선두에 선 자는 지셀이었다. 옆에 따라오는 자들도 벨린다를 비롯한 아들의 측근들이었다.
대체 아들이 왜 저 귀족들의 깃발 무리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즈발터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지셀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나야 지금 전투 준비를…….”
“누구랑요?”
“너, 너희들이랑?”
“……?”
“……?”
두 사람 다 얼이 빠져 잠시 주변에 침묵이 맴돌았다.
호메른이 그 침묵을 깨고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대, 대공자님! 살아 계셨습니까? 이게 지금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냥 화장품 팔고 왔는데요?”
너무 별일 없었다는 말투에 호메른이 지셀을 보챘다.
“별일 아닌데 왜 왕실과 귀족들이 군대를 보냈단 말입니까!”
“아,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즈발터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 그 브랜포드 후작과 시비가 붙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일 때문에 군대가 온 게 아니었느냐?”
“아하, 무슨 상황인지 알겠네요. 그건 정말 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후작님과 괜찮은 거래를 한 거죠.”
“거래? 소문으로는 네가 브랜포드 후작가에 감금됐다고 하던데? 인질로 잡힌 게 아니야?”
보름 동안 감금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로잘린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뭐, 확실히 실패했으면 도망도 못 가고 일이 커지긴 했겠지만……. 성공했으니 아무 문제 없다.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혼란스러운 거 같으니 빠르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셀은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즈발터와 가신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딸을 치료해 준 대가로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고?”
“네.”
“에일즈버 백작과 노튼 백작 등이 널 후원하고 지지한다고?”
“네.”
“너도 친왕파의 일원이 되었다고?”
“아, 그리고 아버지도요.”
“내가 왜?”
“그렇게 됐습니다.”
즈발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애초에 자신은 왕실에 충성하니 친왕파나 마찬가지였다.
그쪽에서 그간 안 끼워 주고 무시해서 그렇지.
‘이,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살짝 지셀 뒤에 있는 군대를 다시 봤다.
왕실과 고위 귀족들의 깃발이 여전히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저게 다 조작한 거라면 아들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터다.
‘이게 정말 진짜라고?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니 환장할 거 같았다.
좋은 일도 어느 정도가 되어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좋은 일이 과하면 오히려 의심이 싹트고 불안해진다.
즈발터는 눈을 감았다.
‘이건 꿈이다.’
“아버지?”
‘눈을 뜨면 현실로 돌아온다.’
“아버지!”
‘물러가라! 이 사특한 것들!’
번쩍!
즈발터가 마나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떴다.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눈에는 정기가 가득했다.
그래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변함이 없었다.
“아, 그대로네. 진짜네.”
지셀은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답답함에 투덜거렸다.
“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세요?”
“……미안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사실이니까 그냥 받아들이세요.”
“……그래.”
지셀의 설명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즈발터만이 아니었다. 총관인 호메른이 침까지 튀겨 가며 빠르게 내뱉었다.
“대, 대공자님, 그 거짓말 사실입니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제가 쓸데없이 왜 합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말이 되나…….”
호메른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브랜포드 후작이 후견인이 됐다고? 왕국 최고의 권력자라 불리는 그 사람이?
게다가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후원과 지지를 보내다니!
사실이라면 이제 지셀은 공식적으로도 아버지인 페르디움 백작보다 더 유력한 귀족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작위를 뛰어넘는 정치력의 힘.
예전에는 돈만 많은 망나니였다면 이제는 뒷배까지 든든한 망나니가 되어 돌아왔다.
가뜩이나 돈줄을 쥐고 있어서 건들지 못했는데 무시무시한 뒷배까지 생겨 버리다니.
즈발터를 따라온 몇 명의 가신들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 왜 그런 권세가들이 저 망나니를?’
‘단체로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즈발터는 그제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그럼 저 많은 수레는 설마…….”
“네,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저건 브랜포드 후작님이 주도해서 저희에게 준…….”
“혼수품이구나!”
“……네?”
“딸을 치료하고 후견인까지 됐으니 당연히 그다음은 혼인이 아니겠느냐! 네가 이것저것 능력이 출중하니 마음에 드셨나 보구나. 허허허허!”
즈발터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에 상황을 끼워 맞췄다.
아무리 지셀이 딸을 치료해 주었다지만 선물치고는 양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혼수품밖에 없었다.
호메른도 옆에서 자지러질 정도로 기뻐했다.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파혼 뒤에 걱정이 많았는데 브랜포드 후작가가 사돈이라니요! 이건 정말 가문의 경사입니다! 경사!”
“허허, 이 사람도 참. 너무 호들갑 떨지 말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 아들 정도면 사실 괜찮은 남자 아닌가? 그쪽에서도 사람을 잘 본 거지.”
“그럼요, 그럼요. 돈도 많고 능력도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성질머리가 좀 더럽긴 하지만, 그 집에 들어가면 강제로 고쳐지겠죠. 하하하하!”
“그렇지? 으하하하!”
페르디움 사람들은 다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큰일이 아니었던 데다, 지셀이 브랜포드 후작가의 사위가 된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
지셀과 그의 측근들은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안 믿을 때는 언제고 한번 믿으니 이번에는 선을 세게 넘는다.
착각을 정정해 줘야 할 텐데, 너무 좋아하니 도대체 어느 타이밍에 저걸 끊어 줘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지셀은 기뻐하는 아버지에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혼수품 아닙니다.”
“하하하……. 아니야?”
“네.”
“정말?”
“아니라고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즈발터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물었다.
“크흠흠, 그럼 저건 대체 뭐냐?”
“페르디움에 보내는 지원품입니다. 왕실에서 서기관이 함께 왔으니 마저 설명을 들으시지요.”
“왕실에서?”
즈발터는 깜짝 놀랐다. 왕실에서 여기까지 사람을 따로 보냈단 말인가?
지셀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하자 곧 준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북부의 용맹한 늑대, 페르디움 변경백을 뵙습니다. 저는 왕실의 서기관으로 있는 앤디 쉐어 남작입니다.”
“어, 어서 오시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직접 오셨소이까?”
“영명하신 국왕 폐하의 말씀을 전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마, 말씀하시오.”
대충 상황을 알았으니 의연하게 있으려 했지만 괜히 목소리가 떨렸다.
브랜포드 후작이야 그렇다 쳐도 왜 왕실까지 페르디움을 돕는지는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과하게 긴장해 어색하게 구는 페르디움 사람들을 보고 쉐어 남작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 반란 모의라도 하고 있었나?’
상당히 수상했지만 그런 위험 요소를 캐는 건 감찰관의 일이다.
그는 숙련된 행정관답게 곧 고급스러운 두루마리를 펼치며 말했다.
“……왕국의 변경을 수호하는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페르디움 백작에게 지원품을 보낸다. ……또한 궁내부 장관이 주청하고 자문회의 귀족들 또한 적법한 절차에 따라 모두가 동의한 바, 앞으로 페르디움에 지원을 지금보다 늘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며…….”
온갖 미사여구가 붙어 지루할 정도로 긴 문장이 이어졌다. 간단히 줄이자면 앞으로 페르디움에 지원을 조금 더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전언이 끝나자 쉐어 남작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년에는 지금보다 지원 규모가 조금 줄어들 겁니다. 이번에는 그간 미흡했던 부분을 채우는 의미도 있어서요.”
즈발터와 가신들은 입만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쉐어 남작이 하는 말이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의 후견인이 되었다더니, 이렇게 바로 지원을……!’
“우와아아아!”
호메른이 참지 못하고 환호를 내지르자 다른 가신들도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고생이 끝났습니다! 이 정도 양이면 일 년 내내 북방 경계에만 신경 써도 될 정도입니다!”
“다른 영지에서 오는 지원도 있으니까요. 앞으로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겠군요!”
다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지셀이 룬스톤을 지원해 준 뒤에는 예전보다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 마음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지셀의 눈치를 보며 항상 나눠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게 너무 불편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왕실에서 지원을 해 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즈발터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이제 영지 살림이 제법 피겠구나. 잘했다, 지셀.”
‘이제 아들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된다. 아버지의 권위를 되찾겠구나.’
호메른도 한마디 얹었다.
“대공자가 아주 큰 일을 해내셨습니다. 하하하. 룬스톤을 찔끔찔끔 받아서 쓰느라 예산 운용이 조금 어려웠는데 잘되었네요. 뭐, 그래도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공자님. 으허허허.”
‘우리가 언제까지 네놈한테 끌려다닐 줄 알았냐. 크크큭.’
호메른의 표정에서는 이제부터 비굴한 부탁 따위는 안 하겠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매년 이렇게 지원해 준다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는가?
재무관인 알버트는 평소의 냉정한 모습을 던져 버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보내 주신 지원품이 목록과 일치하는지부터 확인하고 정리해야겠습니다. 우리 건 우리가 챙겨야죠. 아, 대공자님? 몇 달 뒤에 식량 나눠 주신다고 했던 거…… 안 주셔도 될 거 같은데요? 하하하!”
‘지원품 나눠 받고 싶으면 대공자 너도 우리한테 사정해 보든가.’
즈발터와 호메른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 이거 다 우리 거야!”
“우리도 이제 마음 편히 좀 써 봅시다!”
모두가 행복해하던 그때, 쉐어 남작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저기…… 이거, 전부 페르디움에 가는 게 아닙니다.”
“응?”
즈발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르디움에 보낸 지원품이라면서 다 주는 게 아니라니, 그런 얄궂은 말이 어디 있는가?
쉐어 남작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 얼굴에는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배는…… 펜리스 남작님이 할 겁니다.”
즈발터를 비롯한 페르디움 사람들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지셀이 팔짱을 끼고 서서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