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이거 다 제 겁니다. (1)
브랜포드 후작이 주도했다고는 하나 절반은 왕실의 재산이고 절반은 친왕파 귀족들의 재산이다.
그러니 왕실기와 함께 각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곳곳에 펄럭였다.
그 웅장함에 모두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 우와. 정말 이걸 전부 다 주는 거예요?”
벨린다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간 페르디움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진작 이렇게 지원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복잡한 정치 관계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페르디움이 이전보다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게 다 지셀 덕분이었으니 그를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아휴, 우리 도련님이 정말 잘 컸다니까.’
까마귀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로잘린도 성 밖까지 나와 지셀을 배웅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섭섭함이 묻어났다.
“살펴 가세요, 남작님. 건강 꼭 잘 챙기시고요.”
“네, 아가씨도 잘 지내세요. 화장품 판매도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수도에는 언제 다시 오실 예정이신가요?”
“수금할 사람은 자주 왔다 갔다 할 테지만, 직접 오는 건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산은 꼭 잘해 주세요.”
‘나랑은 돈 얘기 말고 할 게 없냐?’
로잘린은 섭섭함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빨리 돌아갈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다들 빠뜨린 거 없지? 이번에는 짐이 많으니까 잘 챙겨야 해.”
“네! 준비 다 됐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제 출발하자!”
지셀의 말을 신호로 수레들이 하나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까마귀들이 저 멀리 하늘에서 빙빙 돌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그래도 집을 떠나기는 싫은지 따라오는 놈은 없었다.
로잘린은 떠나는 지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펜리스 영지가 그렇게 좋은 건가? 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녀는 떠난 지셀이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날씨도 풀리고 있으니 이제 북방 요새로 출정할 준비를 해야겠어.”
즈발터의 말에 총관인 호메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만인들이 슬슬 움직일 때가 됐죠.”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앞으로의 정국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문득 즈발터는 아들 생각이 났는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화장품을 팔러 간다더니 수도에 꽤 오래 있는군. 이 기회에 인맥도 많이 쌓았으면 좋겠는데. 그놈이 어렸을 때부터 워낙 친구가 없었잖나.”
“그건 성질이 더러워서……. 크흠, 대공자가 그래도 많이 성장했지 않습니까? 고위 귀족은 얼굴 보기 힘들어도 또래 친구들은 조금 사귀었겠죠.”
“그렇지? 가난한 영지긴 해도 그 나이에 영주가 됐으니 친구들을 좀 사귀었을 거야.”
호메른이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장사치처럼 물건 팔러 간 게 문제죠. 수도의 귀족 자제들은 자존심이 강하니 어쩌면 형편없는 친구들만 사귀었을 수도 있습니다.”
“크흠,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 했는데 고집을 부리더군.”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한번 들어 보시고 영 시원찮으면 단단히 혼쭐을 내 주십시오. 귀족이라면 누구와 어울리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즈발터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게. 그놈이 요새 돈도 벌고 콧대가 높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 않은가?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으면 내 단단히 혼쭐을 내 주도록 하지.”
“하하하, 그럼요. 전쟁 이후로 대공자의 행실을 흐지부지 넘어간 면이 있는데 이 기회에 따끔하게 훈육하시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요새 영지가 평안하게 잘 굴러가니 마음도 편했다.
가난한 건 여전하지만 룬스톤을 지원받기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지셀에게 식량도 받기로 했으니 힘들게 살았던 이들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음, 그런데 수도에서 혹시 사고는 치지 않았겠지? 영 찝찝하네.”
“설마요. 수도 귀족들의 위세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천방지축인 대공자라도 거기서까지 사고를 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서 말이야.”
“아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촌놈이 수도에 처음 가 봤으니 주눅이 들어서 아무것도 못했을 겁니다.”
“흠, 그런가……. 하긴, 그 녀석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듯하니 알아서 조심했겠지.”
카르데니아는 보기만 해도 그 경이로움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즈발터도 수도에 처음 갔을 때는 감탄하기 바빠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지셀이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초행길에 함부로 설치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러면 란돌프가 돌아오는 대로 병력을 정비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 시끄러운 놈도 자리에 없으니 참 좋았는데 곧 돌아오긴 하겠군요.”
용병들을 교육하러 간 란돌프도 지셀이 돌아오지 않아 복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교양 있고 얌전한 사람들만이 남은 페르디움이 평화롭고 조용할 수밖에.
두 사람은 다시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벌컥!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남자는 영지의 재무관 알버트였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그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필시 아주 큰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즈발터가 벌떡 일어나며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야만인이 벌써 움직인 건가? 그렇다면 빨리 병력을 모아서 북방 요새를 지원하…….”
“아뇨, 그게 아닙니다!”
알버트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즈발터가 당황해 되물었다.
“그러면 마수의 숲에서 몬스터라도 튀어나온 건가?”
알버트는 이번에도 고개를 마구 젓는다.
“엘레나가 남자 친구라도 데리고 온 건 아니겠지?”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습니다.”
“그럼 뭔데! 빨리 말해 보게!”
“대공자가…….”
“지셀? 수도에 간 지셀이 왜?”
알버트가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수도에서 브랜포드 후작과 시비가 붙었다고 합니다!”
즈발터는 잠시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고민하다 헛웃음을 지었다.
“브랜푸드? 그런 후작도 있었나? 내가 수도에 안 간 지 오래 되긴 했나 보군.”
“아니요. 브랜포드 후작이요.”
“브랜파드?”
“브랜포드! 왕실의 궁내부 장관님 말입니다!”
즈발터가 말없이 눈을 끔벅이다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그 브랜포드 후작? 농담이지?”
알버트는 입을 꾹 다물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털썩.
즈발터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넋이 나간 즈발터 대신 호메른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얘기해 봐!”
“대공자가 브랜포드 후작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그대로 감금되었다고 합니다.”
“아니, 대공자는 장사를 하러 간 거 아니었어? 뜬금없이 왜 브랜포드 후작하고 시비가 붙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즈발터는 알버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그거 확실한 정보야? 헛소문 아니고?”
“저도 영지에 온 상인한테 들은 겁니다. 우리는 수도에 정보원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그냥 소문이라는 거 아니야?”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과 여행자들도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소문에 살이 붙었다 해도 시비가 붙은 것 자체는 사실 같습니다.”
즈발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셀 그 꼴통 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후우…….”
두 사람이 번갈아 한숨만 내쉬고 있자 알버트가 재촉하듯이 말했다.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다가 대공자의 목이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호메른이 벌떡 일어나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방법! 여기까지 소문이 났으면 이미 죄다 죽었을 텐데! 항상 겁도 없이 나대더니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북부의 변경백과 완전히 척질 생각이 아니라면 대공자 한 명쯤은 목숨을 붙여 놨을 수도 있습니다.”
알버트의 말에 즈발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말이 맞는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아무리 사고뭉치라지만 영주의 아들이자 이곳의 후계자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즈발터가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성대한 선물을 준비해서 수도로 사절을 보내도록 하자. 아들놈의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
호메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원래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선처를 부탁해 보는 게 어떨까요? 가끔 그렇게 발작한다고 말해 봅시다. 고의가 아니라고.”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지. 내 아들이지만 솔직히 미친놈은 맞으니까. 어차피 수도에도 정신이 이상한 놈이라고 소문이 다 났을 거다.”
세 사람은 바쁘게 움직였다.
가신들을 모아 대책을 상의한 뒤, 사과 서신을 쓰고 없는 재물도 다 긁어모았다.
가신들이 대전에 모여 사절로 누구를 보낼지 상의할 때였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다급하게 들어오며 외쳤다.
“성으로 군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갑자기 무슨 군대?”
즈발터를 비롯한 가신들이 깜짝 놀랐다.
영지의 경계에 있는 검문소에서는 전령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힘으로 순식간에 밀어내고 왔거나, 다른 길로 우회했다는 뜻이다.
즈발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병사를 닦달했다.
“깃발은 확인했나? 어디에서 온 병력이지!”
“그, 그게…… 깃발이 너무 많아서…….”
“깃발이 많다니……. 연합군이라는 말이냐?”
“그러기에는 병력의 규모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호메른이 손을 덜덜 떨며 캐물었다.
“그래서, 어느 가문의 깃발이 걸려 있었나?”
“왕실의 깃발을 선두로 브랜포드 후작가, 맥쿼리 후작가, 노튼 백작가, 에일즈버 백작가, 보이어 백작가, 브롬슨 백작가…….”
“…….”
나오는 이름들이 죄다 왕국에서 힘 좀 쓴다는 귀족들이다.
즈발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죄다 친왕파 귀족들이구나. 왕실의 깃발까지 있다면 브랜포드 후작이 병사를 움직인 게 분명하다. 지셀 그놈이 사고를 단단히 친 모양이야.”
“어, 어떻게 합니까?”
호메른이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지만 즈발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저들이 무력 시위를 하며 사과하라고, 명예에 손상을 입힌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면 그냥 들어주면 된다.
‘하지만 여기를 차지하려고 하면?’
겨우 망나니 아들놈과 시비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피곤한 일을 자처하진 않겠지만,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한다.
흔하지는 않지만 별의별 명분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의 영지를 빼앗아 자신이 밀어주는 귀족에게 넘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렵구나.’
군대를 영지 경계에만 주둔시켜도 전쟁의 명분이 되는 시대다.
그런데 그런 과정도 없이 왕실과 고위 귀족들의 군대가 성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쁜 소식을 들은 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즈발터는 결단을 내리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병사를 모아라.”
“영주님, 설마…….”
호메른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즈발터는 검을 잡으며 이를 갈았다.
“우리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
‘둘 다 없습니다.’
호메른은 속으로만 반박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가 만약 사로잡혀 있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일단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얘기부터 들어 보자. 그 녀석을 인질로 잡고 사과를 원한다면 보상을 해 주되, 그걸 핑계로 우리를 힘으로 밀어붙이고 핍박하려 하면 싸울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단호한 즈발터의 눈빛에 가신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바로 협상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총관부의 가신들은 따라와라.”
그 말에 몇몇 가신들은 낯빛이 굳어졌다.
만약 갑작스럽게 전투가 벌어지면 제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영주가 나오라는 데 거부할 수도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다들 흐느적거리며 따라나섰다.
땡땡땡땡!
병사들을 소집하는 종이 울렸다.
성안에 머물고 있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소집에 당황하면서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쿠우웅!
성문이 열리고 완전 무장을 한 즈발터가 말에 올라탔다.
그의 뒤를 따라 병사들이 페르디움으로 다가오는 병력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