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여기는 미친 곳이야. (4)
지셀이 아니었다면 모두 무엇에 당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말았을 것이다.
용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카오르는 옆에 있는 길리언에게 물었다.
“저 양반 도대체 뭐야? 망나니라더니 사실은 페르디움의 비밀 병기 같은 거 아니야?”
카오르는 지금껏 그가 보아 왔던 지셀의 실력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데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지. 저 나이 또래에 우리 공자님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길리언도 지셀이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몬스터들과 싸울 때도 지셀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단순히 천재라는 수준을 넘어서,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오르에게 대답하는 길리언의 표정에는 감격과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즐겁고 신이 난 건 아니었다.
“아, 비켜요! 비켜 봐!”
벨린다는 놀라서 용병들을 발로 차고 밀치며 지셀에게 달려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니, 실력이 갑자기 또 늘었잖아요! 정말 도련님 맞아요?”
벨린다는 지셀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가장 많이, 오래 보아 온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지셀의 실력은 몰려오는 팔로르들을 상대할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먼저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지셀이 이번에도 예상했던 것 이상의 실력을 보여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괜찮아. 초반에 진이 무너졌는데 벨린다 덕분에 시간을 잘 벌었어. 모두 고생했고, 일단 부상자들부터 수습하자.”
하지만 벨린다는 칭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지셀의 상처를 보기 바빴다.
“도련님부터 치료받으셔야 해요.”
“그리 큰 상처는 아니야.”
벨린다의 말대로, 지셀도 무리하게 싸우는 바람에 이곳저곳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지셀뿐만 아니라 길리언과 카오르도 몸 곳곳에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난전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들 같은 실력자들이 상처를 입을 만큼 고된 전투였던 것이다.
힘이 세고 속도가 빠른 팔로르가 수까지 많았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호들갑을 떠는 벨린다를 보고 용병들은 서로 눈짓하며 웅성거렸다.
고작 하녀로만 생각했던 벨린다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에 다들 놀란 것이다.
“나는 단검 던지고 마나 두를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웃기시네, 그런 놈이 수프 끓여 달라고 하냐? 너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다고.”
전투의 여운으로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니 용병들이 하나둘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단순무식한 태도에 지셀이 혀를 차며 말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시체들은 한곳에 모아라. 곧 라이트의 효과가 떨어지니 램프들도 새로 꺼내 걸고.”
살아남은 용병들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지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육의 고든’도 그중 하나였다.
“휘유, 징그러운 새끼들.”
공터의 가장 바깥쪽을 정리하던 고든은 팔로르들의 시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들 때문에 며칠을 마음고생했으니 근육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을 것이다.
‘돌아가면 운동을 더 빡세게 해야겠어.’
그는 도망가다 죽은 팔로르들의 시체를 대충 집어 던져 한곳으로 모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시체들을 따라가던 고든이 아무 생각 없이 숲 쪽으로 다가갔다.
일행들과는 떨어져 있고 나무로 가득 찬 숲의 어둠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빛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트 마법의 지속 시간이 끝나 가면서 구체에서 나오는 빛도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고든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재빨리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의 다리를 잡았다.
후딱 뒤로 집어 던지고 일행에게 돌아갈 심산이었다.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팔로르가 눈을 번쩍 떴다.
“어?”
예상치 못한 일에 놀라 고든은 멍한 소리만 내뱉었다.
카아악!
팔로르의 팔에 달려 있는 촉수들이 순식간에 늘어나 고든의 목과 팔, 몸, 다리를 감쌌다.
“으아아아악!”
모든 사람이 비명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고든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고든!”
“젠장! 살아 있는 놈이 있었잖아!”
“저 멍청한 새끼!”
용병들은 고든을 쫓아 우르르 달려갔지만, 공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숲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어떡하지?”
“끝났어. 어둠 속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못 구해.”
“겨우 이겼는데 안타깝군.”
숲은 나무들로 가득 차 바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팔로르는 어두울수록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
결국 끌려간 고든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용병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지셀이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벨린다와 길리언이 그의 팔을 잡고 외쳤다.
“도련님! 미쳤어요?”
“공자님,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지셀은 자신을 만류하는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고는 다시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용병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고용주의 잘못이 아니다.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항상 앞장서 싸우는 고용주라도 이런 사고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
돈을 받고 목숨을 파는 일을 한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불운일 뿐이었다.
카오르까지 지셀의 앞을 막아서며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포기하시죠. 이미 늦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것은 용병들이 감내해야 하는 몫입니다.”
살 수 있다면 당연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는 죽음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용병의 삶이었다.
지셀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싸우다 죽는 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용병으로서 감수해야 할 위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서 눈앞에서 끌려간 동료를 내버려 두는 건, 대륙 7강이자 용병왕이었던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더 그렇다.
지셀은 눈을 감은 채 나직하게 내뱉었다.
“나는…….”
이어지는 말이 모두의 귀에 꽂혔다.
“나를 따르는 자들을 단 한 번도 포기해 본 적이 없다.”
심상치 않은 발언에 벨린다와 길리언이 불안감 어린 눈빛을 내비쳤다.
천천히 눈을 뜬 지셀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병들을 지키고 있어. 나 혼자 갔다 올게.”
벨린다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한 번 말해서 들은 적이 없다니까!’
그녀는 미리 독을 발라 둔 단검을 잽싸게 꺼냈다.
아프게 하기는 싫지만, 이 사고뭉치는 기절시키지 않으면 끝도 모르고 달려갈 터였다.
“공자님, 이제 그만하시죠? 저 화나면 어떤지 아시죠?”
호칭이 바뀌었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벨린다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증거다.
지셀은 그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파앙!
그러고는 벨린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자…… 님? 야! 어디 가!”
단단히 화가 난 벨린다가 방방 뛰다가 길리언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여기 지키고 있어요!”
그녀는 그 말만 던진 뒤 바로 지셀의 뒤를 쫓았다.
“네가 지키고 있어라.”
길리언도 무표정한 얼굴로 카오르에게 내뱉은 뒤 벨린다의 뒤를 따랐다.
카오르는 눈앞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 진짜 별것들이 다 날 우습게 보네? 어디다 대고 명령질이야? 하, 참. 하, 진짜.”
왠지 지셀을 만나고 난 뒤부터 자신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다.
“에라이, 진짜! 더러워서! 확 그냥 다 그어 버릴까?”
괜히 애꿎은 돌을 걷어찬 카오르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구경났냐? 빨리 정리들 해. 일단 기다리자고. 게으름 피우는 놈들은 모가지 날려 버린다.”
용병들에게 카오르는 여전히 무서운 미친개였다.
그들은 찔끔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카오르는 자리에 주저앉아 육포를 뜯으며 입맛을 다셨다.
“쩝, 좀 아쉽네.”
세 사람을 쫓아가면 재미있을 거 같지만, 자신마저 자리를 비우면 용병들을 이끌 사람이 없었다.
한편 그때, 지셀은 엄청난 속도로 고든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움직이는 팔로르를 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는 움직이는 기척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 거리가 멀어진다면 그마저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전생에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발자크 백작도 팔로르를 상대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고든이 팔로르에게 잡혀 있고, 그는 인간이라 어둠에 동화될 수 없었다.
― 으아아아아!
멀리서 고든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셀은 그 소리를 쫓아가며 마나를 담아 크게 외쳤다.
“고든! 계속 소리를 질러라! 내가 따라가겠다!”
숲이 울릴 정도로 엄청난 소리.
이 정도면 충분히 고든에게 목소리가 닿았을 것이다.
사실 마수의 숲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는 건 금물이다.
다른 몬스터들이 깨어나거나 눈치를 채고 쫓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팔로르의 영역이고, 지금은 밤이다.
몬스터들은 아직 팔로르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 으아아! 살려 줘!
지셀의 외침을 들었는지 고든은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통해 방향을 가늠하며 쫓아가던 지셀은, 어느 순간부터 고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입이 막혔거나.’
지셀은 이를 악물며 마나를 더 뿜어내었다.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그래도 그의 시체를 눈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찌이익!
지셀이 품에서 라이트의 스크롤을 꺼내 찢자 주변이 밝아졌다.
그는 순식간에 바닥의 흔적을 훑어보고 방향을 가늠한 뒤 미친 듯이 달렸다.
‘고든, 버텨라!’
지셀의 예상대로, 고든은 입이 촉수로 막힌 상태였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걸 느낀 팔로르가, 고든이 소리 지르는 게 원인이라 생각하고 바로 입을 막은 것이다.
“웁웁! 우우웁!”
고든도 지셀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 자신을 찾게 해야 하는데, 눈치 빠른 괴물이 입을 막아 버렸다.
‘어으으, 숨을 제대로 못 쉬면 근손실이 온다고.’
고든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 어두운 숲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고든은 점점 삶의 희망을 잃어 갔다.
‘그러고 보니 고용주가 글도 가르쳐 준다고 했었는데.’
개척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갔다면 글도 배울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자신은 운동을 해야 하니까 거절했겠지만.
‘끝이구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모두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거나 찾지 못해 추적을 포기할 것이다.
그 생각이 맞는다는 듯, 지셀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체념한 고든의 예상과는 달리, 지셀은 계속 그를 쫓고 있었다.
그러나 쫓아가는 속도는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고든이 소리를 내지 못해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된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언가를 쫓는 건 아무리 경험 많은 지셀이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도련님!”
“공자님!”
지셀의 속도가 느려진 사이 벨린다와 길리언이 그를 따라잡았다.
“흔적을 찾아! 바닥부터 주변 모두!”
다급한 외침에 벨린다와 길리언도 일단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두 사람 또한 추적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이지만, 흔적은 갈수록 찾기 어려워졌다.
종국에는 정확한 방향마저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도련님, 돌아가요. 더 이상 숲을 헤매다가는 위험해요.”
“벨린다의 말이 맞습니다. 이미 죽었을 겁니다.”
두 사람이 설득했지만, 지셀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에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소리가 들린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마음에 지셀이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모두의 귀에 무슨 뜻인지 모를 고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세 사람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