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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5화 (5/269)

5화 두 번은 안 당한다. (1)

“오빠?”

지셀이 갑자기 제 얼굴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썩이자, 엘레나는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오빠라는 놈이 평소에 언제 어디서 미친 짓을 하며 성질을 부릴지 모르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어? 아, 아니야.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구나!”

지셀이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엘레나의 죽음은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아픈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니 기뻐서 가슴이 벅찼다.

그는 구구절절하게 말로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다. 용병들의 왕답게 언제나 화끈하게 몸으로 표현했다.

“엘레나!”

지셀이 팔을 벌리며 다가가자 엘레나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왜, 왜?”

“정말 보고 싶었어!”

“며칠 전에도 봤잖…… 잠깐! 갑자기 왜 그래? 오지 마!”

덥석!

지셀은 강하게 엘레나를 껴안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벅찬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으악! 갑자기 소름 끼치게 왜 이러는 건데!”

엘레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그녀와 지셀은 사실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지셀은 언제나 성질만 내며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그러니 여동생이라고 살갑게 대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인데?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러는 거야?”

엘레나는 몸을 비틀며 지셀을 밀쳐 냈다.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 오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눈빛과 미소, 이유 모를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

난생처음 보는 지셀의 표정에 엘레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 자신도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왜 저러지? 또 사고 쳤나. 눈가는 왜 저렇게 쓸데없이 촉촉한 거야?’

엘레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저 표정이 진실하게 느껴졌다.

‘예전의 오빠 같기도?’

아버지는 항상 출정만 나가 있으니, 어릴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남매끼리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 적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지셀이 망나니가 되면서 둘 사이가 조금 소원해지기는 했지만.

엘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지셀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반가워서 그렇지. 그런데 내 방에는 무슨 일이야?”

“와.”

엘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만 해도, 지셀은 그녀가 찾아왔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꺼져. 재수 없게 눈앞에서 알짱대지 마. 네 숨결이 느껴지는 거 되게 불쾌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사실 찾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오크한테 죽을 뻔했다는 말을 듣고 예의상 온 것이었다.

“아니, 벨린다가 한번 찾아가 보라고 해서…… 오크한테 당해서 위험했다던데, 괜찮아 보이네?”

벨린다는 세상만사를 조금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 엘레나가 병문안을 가면 다시 남매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으리라.

벨린다가 자꾸 부탁하니 엘레나도 어쩔 수 없이 오긴 했는데, 막상 와 보니 지셀의 상태가 꽤 괜찮았다.

방구석에서 열이나 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줄 줄은 정말 몰랐다.

“오크? 그거 내가 다 처리했는데 뭐. 별거 아니야. 이 몸은 매우 강하거든.”

젠체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지셀을 보고 엘레나가 픽 웃었다.

“뭐야? 쓰러져서 돌아온 주제에.”

“오, 무슨 소리야. 잘 들어 봐. 내가 그놈들을 어떻게 잡았냐면…….”

갑자기 손짓, 발짓을 하며 제 무용담을 자랑하는 오빠를 보고 엘레나가 크게 웃었다.

허세를 부리는 게 웃기기도 했고, 오랜만에 오빠의 밝은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리카르도 그놈을 내가 불렀는데…….”

“아, 나 그 사람 누군지 알아. 그 바람둥이 병사 말이지?”

“알아? 잘생기긴 잘생겼더라.”

“유명해. 여자들한테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흠, 아이던만큼 나쁜 놈이었군.”

“아이던? 그게 누군데?”

“있어. 아주 나쁜 놈.”

지셀이 언뜻 살기 어린 눈빛을 내비쳤다. 엘레나는 ‘역시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나아진 건 다행이었다. 또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제 갈게. 몸조리 잘해.”

“그래, 다음에는 드래곤 잡은 얘기 해 줄게.”

“꿈에서 잡았어? 드래곤이 뭔지는 알고?”

지셀의 허풍 섞인 무용담을 다 듣고, 엘레나는 기분 좋게 돌아갔다.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예전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

예전에는 성질머리 때문에 잠깐도 대화하기 힘들었으니까.

엘레나가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던 지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발견된 엘레나의 모습을 지셀은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다른 이들 또한 잊어 본 적이 없지.”

영지로 돌아왔을 때, 목이 베여 성문 앞에 걸려 있던 아버지와 가신들의 얼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겁쟁이였고 비겁자였다.”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갔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기억한다.

미소 짓던 지셀의 얼굴에 갑자기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는 전생의 한심했던 망나니 공자가 아니다.

“페르디움의 멸망은 내가 막는다.”

지셀은 펜과 종이를 찾아 기억나는 대로 미래의 정보를 휘갈겼다.

대륙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시기는 대충 안다. 이는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지금은 엘레나를 살리는 게 우선이지만…….”

일주일 뒤에는 축제가 시작된다. 풍요를 기원하는 이 축제는 수확의 계절이 시작됨을 알리는 행사이기도 하다.

야만인들과의 전투가 끊이지 않는 척박한 북부의 영토에서도, 사람들은 축제를 벌이며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그때 분명히…….”

당시 지셀은 계속해서 비난을 받고 무시당한 탓에 가문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축제가 시작되었고, 엘레나의 권유로 그녀와 같이 축제를 구경하러 나갔다.

하지만 기분이 엉망인 상황에서 축제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국 지셀은 혼자 성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영지 안에서 벌어지는 축제이고, 엘레나에게는 호위 기사도 있었으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엘레나가 사라졌지…….”

엘레나와 호위 기사들은 실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사고까지 터지자 지셀은 더 견디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피해 도망치듯이 성을 빠져나왔다.

그게 지셀과 페르디움의 마지막이었다.

“내가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사실 같이 있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지셀은 형편없을 정도로 약했으니까.

하지만 엘레나를 내버려 두고 혼자 성에 돌아왔다는 죄책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설마, 엘레나가 죽은 것도 공작가가 꾸민 일이었던 건가.”

전생에 엘레나를 죽인 자는 축제를 구경 온 다른 영지의 공자였던 걸로 밝혀졌었다.

당연히 범인으로 몰린 쪽에서는 억지 누명이라며 반발했고, 페르디움은 영지전에 휘말려 큰 피해를 보았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사건이 이어져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냄새가 난다. 고블린 똥 같은 냄새가.”

지셀은 영지전이 시작되기 전에 떠났기에, 그 뒤의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그저 복수하려고 뒤늦게 알아본 정보로 큰 흐름 정도만 파악하고 있을 뿐.

처음에는 반란을 일으키려고 반대할 것 같은 영지들을 미리 멸망시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이던이 페르디움의 멸망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음모가 있었다는 걸 아는 지금은 모든 게 의심스러워 보였다.

“이 가난하고 쓸모없는 영지를 왜 멸망시킨 거지? 뺏어 봤자 우리 대신 야만인들과 싸워야 할 텐데.”

인근에 숨겨진 자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생에 그게 이유였나 하고 몇 번이나 확인했었던 일이었으니까.

“뭐…… 이유야 상관없겠지.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되니까.”

지셀은 표정을 서늘하게 굳혔다.

전생에는 모든 일의 배후라 생각한 공작가만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이던이 말하던 ‘우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페르디움을 적대하는 자들은 앞으로 모조리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지셀은 손가락으로 턱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엘레나와 호위 기사의 시체는 빈민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지.”

그들이 축제 때 굳이 빈민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아마 누가 불러서 따라갔거나 강제로 끌려갔을 것이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네.”

엘레나의 죽음이야말로, 페르디움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시발점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바로잡고 가면 될 일.”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바로 방을 나섰다.

“급한 대로 빨리 몸부터 만들어야겠다. 시간이 없는 게 문제네. 일주일이라…….”

지셀은 일단 영주 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페르디움 성에 살았던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성의 구조며, 사용인들의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마다 지셀에게 인사는 해 왔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무시 혹은 무관심이 섞인 표정들.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데.’

아마 이 시기에 자신은 성질이 예민해 여기저기 화만 내고 다니는, 마주치기도 싫은 껄끄러운 상대였을 것이다.

“도련님! 지셀 도련님!”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누군가가 지셀을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오…… 퍼거스 영감?’

호위 기사인 퍼거스였다. 이미 은퇴해서 느긋하게 지낼 나이인데도 성을 떠나지 않고 지셀의 곁을 지키는 충신이었다.

퍼거스는 지셀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아니, 대체 얼마나 뛰어다닌 거야.’

지금 암살자라도 들이닥치면 누가 누구를 호위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래도 그의 충심은 높이 살 만했다.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퍼거스는 죽을 때까지 집 나간 자신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헉, 헉……. 도련님, 혼자 어딜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벨린다도 모른다고 해서 이 늙은이가 한참을 찾았습니다.”

퍼거스는 말하면서도 계속 숨을 헐떡였다. 어지간히 급하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거참,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해.”

“허허, 이 늙은이 눈에는 아직도 아이 같으십니다.”

지금은 몸까지 약하니 더 어려 보일 거다.

지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왕 시절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말을 어제오늘 참 많이 듣는다.

“영감이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나는 왜 찾았어?”

“허허, 도련님께서 움직이시는데 제가 따라다니는 게 당연하지요. 새삼스레 왜 그러십니까.”

늙은 기사가 지셀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지셀은 순간 움찔거렸다.

‘그랬지.’

이 시절 지셀은 열등감과 분노 때문에 호위 기사마저도 전부 거부했다. 모두가 적인 것 같고,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보살펴 온 퍼거스와 벨린다만은 예외였다.

그 소중함을 잃은 후에서야 깨닫다니, 이리 멍청할 수가 없었다.

지셀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서 퍼거스를 꽉 껴안았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려 했지만, 소중한 사람을 다시 만난 기쁨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영감, 오래 살아. 우리 같이 오래 살자고. 죽는다는 거…… 그거 정말 기분 더럽거든.”

갑작스러운 지셀의 행동에 퍼거스가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처럼…….”

그걸 눈치채다니! 역시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 퍼거스라면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줄 것이다. 그는 지셀이 오크 토벌 건으로 욕을 먹을 때도 유일하게 그를 편들어 준 충성스러운 기사였으니까.

마음을 정한 지셀이 결연하게 말했다.

“영감, 잘 들어. 정말 중요한 얘기야. 사실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허허, 그만하시지요.”

역시 안 믿어 주나.

“……그래, 아무튼 오래 살아. 부활하는 거 쉽지 않아.”

“당연히 도련님 결혼하시기 전까지는 살아야지요.”

“으음, 결혼이라니.”

지셀이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사랑이니, 결혼이니 따질 처지가 아니다.

영지의 멸망이 코앞인데 그런 거에 신경 쓰다가 죽으면 누굴 원망하라고.

지셀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버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퍼거스가 그 뒤를 급하게 따라오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 가십니까?”

“연무장. 수련을 좀 하려고.”

퍼거스는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도, 도련님이…… 수련을…… 허억, 꺼억!”

“으헉! 뭐야! 영감, 정신 차려! 숨 쉬어! 숨 쉬라고오오오오!”

왜 이렇게 아무도 나를 안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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