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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4화 (4/269)

4화 이런 무시, 뭔가 익숙해. (4)

안 움직이던 근육과 힘줄을 갑자기 무리하게 썼으니 온몸이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남은 오크의 수를 티 나지 않게 세어 보았다.

‘와, 아직도 다섯 마리나 남았어?’

처음 계산했던 대로라면 지금쯤 모두 처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몸뚱이가 생각보다 더 저열해서, 오크를 전부 죽이기는커녕 서 있기도 힘들었다.

“크륵, 크르륵.”

그러나 다행히 지셀의 허세가 잘 먹혔는지 오크들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오크가 전투 종족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떠돌이 오크들은 전투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중요시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오크들은 전의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크, 도망가면 안 되지.’

마음이 다급해진 지셀이 바로 오크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리가 순간 풀리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

당황한 표정을 짓는 지셀을 보고 오크들은 눈을 빛냈다.

“크아아!”

눈치 빠른 오크 하나가 바로 도끼를 들고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스코반이 깜짝 놀라며 뛰쳐나갔다.

“대공자님!”

스코반의 경악 어린 외침과 함께 오크의 도끼가 지셀을 향해 떨어졌다.

콰아앙!

지셀이 땅을 구르며 피하자 오크의 도끼는 간발의 차이로 땅을 찍었다.

지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오크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악!

피가 흩뿌려지며 오크가 쓰러졌다. 다급히 달려오던 스코반이 걸음을 멈췄다.

지셀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훗, 작전 성공.”

“크르륵!”

오크들은 다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지셀이 일부러 허점을 보여 유인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스코반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셀을 뜯어보았다.

‘진짜야? 진짜 속인 거 맞아? 그런데 왜 저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들고 있는 손도 미세하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저건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지셀의 표정은 마치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저게 정말 연기라면 극단의 배우로 나가도 대성할 재능이었다.

오크들과 스코반이 반신반의하며 눈치만 보고 있던 그때, 지셀은 결단을 내렸다.

‘안 되겠다. 모양 빠지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아까는 자신만만하게 구경이나 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병사들을 움직여야 할 때였다.

솔직히 진짜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순간, 적들의 기세가 더 올라갈 테니까.

지셀은 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너희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이제 남은 오크들을 공격해라!”

“…….”

하지만 병사들은 눈만 껌뻑일 뿐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셀이 놀라운 실력을 보여 준 건 사실이나, 예상 밖의 일이라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셀도 눈만 껌뻑이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한 명도…… 안 움직이네?’

새삼 이 시절에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대우를 받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리 망나니였다지만 병사들까지 이렇게까지 자신을 무시할 줄이야.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정확하게 콕 집어서 명령해야 한다.

“리카르도! 너라도 나와! 앞을 막아라!”

아쉬운 대로 아는 놈을 불렀지만, 잘생긴 리카르도는 기겁하며 외쳤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와, 미치겠네. 진짜 내 말 듣는 놈이 어떻게 한 놈도 없냐?”

병사들이 말을 안 들으니 ‘진짜’ 지휘관을 갈굴 수밖에 없었다.

“스코반! 뭐 해! 오크들이 도망가잖아! 빨리 안 움직여? 다 죽고 싶냐 이 새끼들아!”

멍하니 있던 스코반은 분노한 지셀의 포효를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네! 모두 공격해라!”

과연 ‘진짜’ 지휘관은 다르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칼같이 움직였다.

“와아아아!”

스코반은 순식간에 오크들의 앞을 막아섰다.

오크들은 이미 몸을 돌려 도망가고 있었지만, 그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다.

움직이는 속도 자체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빨랐다.

스코반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오크들의 도주를 늦추는 사이, 병사들이 그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셀도 남은 오크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크윽, 꼭 뼈까지 뒤틀린 거 같네.’

결국 지셀은 움직이는 걸 포기하고 바닥에 멋지게 앉았다.

싸움은 기세와 자신감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용병들의 기본 소양인 ‘허세’와 ‘겉멋’이었다.

그나마 스코반이 제법 실력 있는 기사라 남은 오크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크아아아악!”

쿵, 쿠웅!

얼마 지나지 않아 남아 있던 오크들도 모두 쓰러졌다.

여유로운 척 앉아서 구경하던 지셀이 웃었다.

“다 잡았네.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지? 어때? 다들 할 만하지 않았어?”

지셀의 물음에 병사들은 모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지셀은 한심한 쓰레기였다.

수련은커녕 운동조차도 제대로 안 해 허약한 주제에 허세는 가득했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갑자기 엄청난 검술을 내보이며 스무 마리 가까운 오크들을 혼자서 척살했다.

이런 실력자라는 게 알려졌다면 그동안 그렇게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대, 대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스코반이 떨리는 눈으로 지셀을 돌아보았다.

그의 심정도 병사들의 마음과 다를 게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페르디움의 기사단장도 그런 검술은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지셀을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지셀이 선수를 쳤다.

“아, 괜찮아. 그나저나 이제 성으로 돌아갈 건가?”

“네. 오크를 다 잡았으니 성으로 돌아가야죠.”

“잘됐군. 그럼 지금 바로 성으로 돌아가라.”

“네?”

왠지 다급한 어조에 의아해졌지만, 스코반은 지셀에게 왜 그러냐 묻지 못했다.

“최대한 이 몸을 빠르고 안전하게 성으로 옮겨라. 또 죽으면 안 되잖아.”

쿵.

제 할 말이 끝나자마자 지셀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용병의 허세와 겉멋도 한계는 있었다.

* *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깨끗한 천장에 지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네.”

마나도 없이 육체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탓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 곳곳이 아팠다. 지금 상황이 꿈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오, 이곳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단아하게 꾸며진, 마치 귀족이나 머물 듯한 방이었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환경에 지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억이 되살아날 듯 말 듯 했다.

“성에 돌아왔나 보네. 여기가 내 방이었나?”

정신을 잃고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덜컥.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두리번거리며 방을 구경하고 있는 지셀을 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응?”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자가 기쁜 듯 손뼉을 쳤다.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지셀은 깜짝 놀라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벨린다?”

눈앞에 선 여자는 분명 자신의 전속 하녀장이자 가정 교사인 벨린다였다.

페르디움의 모두가 지셀을 욕해도 항상 그의 편을 들어 주었던 사람이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벨린다!”

지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꽉 껴안았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또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벨린다가 부드러운 말투로 그를 달랬다. 지셀은 몸을 떼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니, 반가워서 그렇지.”

“매일 보는데 갑자기 뭐가 그렇게 반가우실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벨린다와 눈을 맞추고 지셀이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네, 네. 오크한테 죽었다가 지금 침대에서 부활하셨네요. 와, 놀라워라.”

지셀이 또 헛소리할 낌새가 보이자 벨린다가 바로 말을 끊어 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녀는 살며시 지셀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도련님, 지금 위험한 상태인 거 아시죠? 하녀들이 듣고 소문나면 정말 감금당해요.”

“…….”

그 말에 지셀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용불량자는 진심을 전달하기가 참 힘들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어디긴요. 도련님 방이지요. 어쨌든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기억에 남은 풍경이었다.

눈에 설지만 익숙한, 추억을 자극하는 공간. 그가 젊은 시절에 쓰던 방이 확실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을 구경하는데, 벨린다가 말을 이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신 거 같고…… 땀을 많이 흘리셨으니 일단 목욕부터 하셔야겠네요.”

그녀는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있던 금색 종을 몇 번 흔들었다.

딸랑, 딸랑.

곧 문이 열리며 하녀 몇 명이 후다닥 들어왔다.

“도련님 씻겨 드려.”

“네, 하녀장님.”

하녀들은 지셀에게 우르르 다가와서 그를 들고 갈 기세로 끌어당겼다.

“어? 어?”

지셀은 당황해 그대로 끌려갔다.

* * *

단장을 끝낸 뒤 지셀은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물에 비친 모습과 다르게 현실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거울에 비친 그는 완연한 귀공자였다.

얼굴을 가득 채운 상처도, 잔인한 눈빛도, 무섭게 변한 표정도 지금은 없다. 잘생기고 밝았던 과거의 지셀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가 넋 나간 표정으로 거울만 바라보고 있자 벨린다가 픽 웃었다.

“본인 얼굴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시나 봐요?”

“그래, 아주 마음에 들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한 대답에 벨린다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보자 지셀은 하염없이 거울만 들여보고 있었다.

갑자기 자기 얼굴에 저렇게 빠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와, 정말 마음에 드나 봐. 하긴, 사고 치는 것보다는 거울만 보고 있는 게 낫겠지.’

오늘따라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도련님이 이상한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조금 더 쉬셔야겠네요.”

벨린다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에도 지셀은 한참 동안 거울만 바라보았다.

끼익.

그가 거울을 들여다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살짝 열리며 한 소녀가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오빠?”

“엘레나?”

지셀은 그 얼굴을 보고 놀라 외쳤다.

열여섯,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녀.

바로 그의 여동생인 엘레나였다.

그녀를 보고 지셀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과거로 돌아와 전투를 치르느라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동생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에 엉켜 있던 기억 사이에서 사건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잠깐, 그러면 며칠이 남은 거지?’

전생에는 토벌대가 전멸한 뒤 지셀에게 엄청난 비난이 몰려들었다.

사고를 많이 치긴 했어도, 그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때 내가 엉터리 지휘만 하지 않았어도.’

가신들은 대공자를 감금해야 한다고 성토했고, 그걸 견디지 못한 지셀은 가문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 오크들과의 전투가 시작이었지.’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겠다 결심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지내던 동안, 사건이 일어났다.

엘레나가 당한 사고는 지셀이 가문을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엘레나!”

지셀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부르자, 엘레나가 깜짝 놀라며 답했다.

“응? 왜?”

“축제까지 얼마나 남았지?”

“어, 일주일?”

지셀은 엘레나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손으로 감싸고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크 토벌에 실패한 날 온갖 비난을 받으며 영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그의 인생이 바뀐 날은 따로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손으로 가려진 그의 두 눈에 진득한 살기가 가득 차올랐다.

‘가장 되돌리기를 바랐던 날. 평생을 괴롭혔던 기억.’

일주일 뒤, 엘레나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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