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두 번은 안 당한다. (2)
지셀이 재빠르게 심장을 압박하며 응급처치를 한 덕분에 퍼거스는 겨우 숨이 돌아왔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영감의 몸과 영혼이 분리될 뻔했다고. 부활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끄응, 나이를 먹으니 심장이 약해져서…… 깜짝 놀라면 가끔 이럽니다.”
오래 살라고 덕담까지 했는데 오늘 만나자마자 헤어질 뻔했다.
지셀은 혀를 차며 퍼거스의 손을 주물러 주었다.
“나중에 만드라고라 뿌리라도 하나 달여 줘야겠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어.”
“그래도 제가 도련님을 호위해야…….”
“아니, 제발 들어가서 쉬어 줘. 신경 쓰여서 미칠 거 같아. 지금 내가 영감을 호위해야 할 판이라고.”
“그러면 수련하시는 동안만이라도 곁을 지키겠습니다.”
퍼거스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지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라고 해 봐야 어차피 명목상일 뿐, 성내에서만 지셀을 쫓아다니는 보모나 마찬가지였다.
퍼거스는 나이 탓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것마저 못하게 하면 삶의 낙이 없을 것이다.
지셀은 성안을 둘러보며 대충 지리만 익힌 뒤, 바로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키는 사람도, 청소하는 사람도 없이 버려진 지저분한 연무장을 보며 지셀은 감회에 잠겼다.
‘내가 그땐 왜 그랬을까.’
개인 연무장에서 온전히 마나 연공과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은, 용병 시절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역시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지셀은 새삼스럽게 얻은 깨달음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하인을 불러 연무장을 청소시켰다.
“정말 수련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이제 열심히 해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고말고요.”
퍼거스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셀이 무슨 짓을 하든, 또 입만 살아서 저런다고 무시할 것이다.
언제나 퍼거스만이, 도련님은 잠깐 방황하는 것뿐이라며 지셀을 믿어 주었다.
퍼거스가 연무장의 입구를 지키고 선 동안, 지셀은 안에 들어가 마나 연공을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자신에게는 전생에 쌓은 지식과 경험이 있다. 그걸 이용한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자신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일주일인가…… 시간이 촉박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전생과 비교하면 지금의 몸 상태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었다.
형편없는 몸을 일주일 만에 강철 같은 몸으로 만드는 건,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나만 다룰 수 있어도 육체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다.
“못해도 최소한 마나를 다루는 수준까지는 올려놔야 해.”
전생에 쌓은 경험까지 활용한다면 비루한 몸뚱이로도 어지간한 기사급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으으…….
지셀의 의지에 따라 주변의 마나가 움직여 몸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배꼽 아래의 코어에 쌓이기 시작했다.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였던 그가, 마나를 몸에 받아들여 변환하는 단계까지 순식간에 이른 것이다.
남들이 본다면 기겁할 일이었지만, 전쟁터에서도 마나 연공을 하던 그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미처 몸 안에 쌓이지 못한 마나는 붉은 아지랑이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아깝군.’
지셀의 마나 연공법은 아직 불완전하다.
가문의 연공법을 멋대로 뜯어고치고 자기 몸에 맞게 개량한 연공법이기 때문이다.
실전을 통해 개량한 것이라 살기가 짙고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빠르고 확실하다.
전생에도 그는 이 개량한 연공법을 써서 강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천운도 있었지.’
대륙 7강의 자리에 선 것은 고대의 유적에서 우연히 얻게 된 마법서 덕분이었다.
이름도 없고, 낡고 다 떨어져서 반쪽만 남아 있던 불완전한 마법서.
하지만 지셀은 거기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마나 연공법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우우웅!
지셀의 오른쪽 가슴에 마나가 뭉치더니 새로운 코어가 생성되었다.
인체에 본래 존재하는 코어만 이용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아예 다른 위치에 인위적으로 코어를 만든 것이다.
우우웅!
곧이어 왼쪽 가슴에도 코어가 생성되었다.
구우우웅!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배꼽 아래의 것까지 포함해 역삼각형으로 자리 잡은 코어들은 서로 이어져 빠르게 마나를 순환시켰다.
오직 지셀만이 쓸 수 있는 마나 연공법의 장점이었다.
여러 개의 코어가 유기적으로 연동하며 뿜어내는 마나는 폭발적인 힘을 자랑한다.
바로 이 힘으로 지셀은 대륙 7강에 이름을 올리고, 용병왕이라 칭송받았다.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법.
지셀이 쓰는 연공법은 기운이 너무나 불안정하다는 게 문제였다.
“역시 버겁군.”
세 개의 코어에 쌓인 마나가 몸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지셀은 그 반발을 억제하며 마나가 자신의 통제에 따르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이것도 천천히 고쳐야겠어.’
폭발적으로 힘을 발현할 수 있으니 강력하지만, 그만큼 단시간에 엄청난 마나를 소모한다.
전생에야 쌓아 둔 마나 양이 바다와 같았으니 같은 급의 상대가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형편이 다르다.
적은 마나를 효율적으로 쓰려면 중요한 순간에만 폭발시켜야 했다.
스으으…….
‘아직은 세 개까지인가.’
세 개로도 어지간한 기사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은 코어를 더 늘리기보다는 마나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용병왕 시절에도 다섯 개의 코어를 제어하는 것이 한계였다. 코어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부담은 몇 배로 강해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이상은 육체가 버티지 못해.’
지금 만든 세 개의 코어에 쌓인 마나의 양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당장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지셀은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이 불완전한 연공법을 완성하고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지셀이 가진 힘의 원천은 복수심과 분노.
전생에 그가 절대 강자의 반열에 들 수 있던 건, 오직 복수를 위해 뼈를 깎는 고행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전생의 마지막 순간을 되새겼다.
‘아이던, 이번에는 네놈 목을 잘라 주지.’
전생에 그가 마지막으로 검을 맞대었던 ‘고결한 기사’ 아이던. 그를 떠올리다 지셀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할수록 열 뻗치네.’
아이던은 이미 지친 그를 상대하겠다고 휘하 기사단을 끌고 왔었다.
일대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인데 협공까지 하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치사한 새끼…… 일대일로 싸웠으면 내가 이겼어.’
대륙 7강 중에서도 지셀의 순위는 일곱 번째였고 아이던의 순위는 다섯 번째로 꼽혔다.
하지만 순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시기와 활약에 따라 제멋대로 붙인 숫자에 불과하니까.
실제로 그들은 모두 종이 한 장 차이의 실력이라, 싸우는 날의 몸 상태나 주변 상황에 따라 누가 이길지 모른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륙 7강쯤 되면 자부심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도 이상하게 열이 뻗치곤 했다.
전생에 마지막으로 술 한잔을 했던 친구, ‘일인군단’이자 대마도사로 불렸던 그는 간혹 자신을 이렇게 놀리곤 했다.
― 나는 3위, 너는 7위잖아. 응, 너 싸움 존나 못함.
― 헛소리하기는…… 심심하냐? 오랜만에 한판 뜰까?
그럴 때마다 주변이 초토화되고 지형이 바뀌는 탓에 수하들이 제발 좀 참으라고 말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아오, 빡쳐.’
다시 생각하니 또 열이 뻗친다.
사실이 아니란 걸 서로 뻔히 아는데도, 상대가 유치하게 나오면 짜증이 난다.
타고난 투쟁심 때문인가. 서열을 세우는 게 본능에 새겨진 욕구인지도 모른다.
‘그래, 이번에는 대륙 7강이 아니라 대륙 제일이 되어 주마.’
어차피 전생에도 다른 7강 놈들을 만날 때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붙어 봐야 안다고 생각했고,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단 한 명은…… 예외였지만.
‘대륙제일검……. 그 인간은 확실히 강했지.’
누구나 인정하는 대륙 7강의 첫 번째 자리.
자기 실력에 자신 있는 지셀도 무심코 ‘아, 이건 좀 힘들겠는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강한 자였다.
그 무지막지한 무위를 떠올리자마자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이길 자신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벽이 느껴졌다.
‘아니지. 지셀 페르디움, 이 멍청한 놈! 무슨 한심한 생각이야! 벌써 주눅 들 이유가 뭐가 있어!’
‘대륙제일검’이 그 시절 정말 강하기는 했지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나도 이제 젊은 몸이라고.’
지셀에게는 전생에 쌓은 경험과 지식이 있고, 이제는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젊음까지 주어졌다.
한번 해볼 만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영지와 가문의 멸망을 막는 일이다.
하지만 최고가 되고 싶다는,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 없다면 실력을 키울 수도 없을 것이다.
‘모조리 박살을 내 주마.’
이번 생에서는 공작가와 그 뒤에 숨어 있는 놈들을 모두 끝장내고, 반드시 최고가 될 것이다.
이를 악문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 * *
지셀은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기본적인 몸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수련에 집중하면서도 지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엘레나와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아직은 좀 어색하지만.’
하지만 엘레나도 달라진 그를 조금씩 받아들이는지, 예전보다는 관계가 좋아졌다.
“요새 다시 수련하는 거야?”
“응, 명색이 기사 가문의 후계자인데 쉴 수는 없지.”
“오빠 그런 거 다 싫다며? 공부나 수련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거다, 대충 명령만 내리면 알아서들 할 텐데 내가 왜 하냐, 이랬잖아? 인상까지 팍팍 쓰면서.”
“내가 그랬었나?”
엘레나가 찡그린 인상까지 흉내 내며 말했다. 지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자신이 언제나 불평불만을 달고 살았던 건 알지만, 솔직히 그런 멍청한 대화까지는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아빠도 짜증 난다고 했잖아. 빨리 영주 자리 물려주고 어디 시골에나 처박혀 살면 좋겠다고.”
“……뭐, 내가 불 속성 효자이긴 하지.”
전생에 얼마나 쓰레기처럼 살았는지 확실하게 뇌리에 꽂히는 대사였다.
“열심히 하면 아빠가 돌아와서 좋아할지도?”
“글쎄다.”
지셀의 아버지, 페르디움 백작은 북방으로 출정한 상태였다.
현재 영지에는 치안을 위한 병력만이 남아 있다.
주력이 빠져나간 상황에 혼잡한 축제까지 겹친다면 외부 세력이 난리를 피우고 도망가기 딱 좋지 않은가.
전생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더더욱 엘레나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그럼 수련하러 간다.”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이번엔 며칠이나 갈까?”
중얼거리는 엘레나를 뒤로하고 지셀은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시간이 흘러 드디어 축제 당일이 되었다.
‘오늘이다.’
지셀은 검을 허리에 차고 나갈 채비를 끝낸 뒤, 엘레나의 방으로 향했다.
구경을 나가려다 지셀과 마주친 엘레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수련 안 해? 오빠도 축제 나가려고?”
“그래, 같이 구경 가자.”
“와, 웬일이래? 나랑 같이 축제도 보러 가고.”
“뭐, 축제 정도는 즐겨 줘야지.”
“흠, 정말 이상해졌단 말이야.”
엘레나는 하녀들을 돌아보며 모두 쉬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아직은 하녀들이 지셀을 무서워하거나 불편해하기 때문에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지셀은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과 다르다.’
엘레나가 전생에 같이 나가자고 했던 것은 지셀이 항상 예민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축제를 통해 오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지셀의 행동이 바뀌니 엘레나도 굳이 먼저 축제를 보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미래도 조금씩 달라진다.
‘큰 흐름은 그대로이더라도 미묘하게 바뀌는 부분까지는 일일이 계산할 수 없다. 상황에 맞춰 반응해야 해.’
페르디움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놈들을 방해할수록 적이 손을 뻗쳐 오는 방식도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정보를 꿰고 있더라도 그것을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건 본인의 몫이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지셀은 속으로 되새기며 엘레나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엘레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틈에서 꽤나 즐거워했지만, 지셀은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해 축제를 순수하게 즐길 수는 없었다.
‘이상하군. 어쩌다 빈민가까지 간 거지?’
엘레나는 사람들이 많은 중심가에서만 축제를 구경하고 있었다.
빈민가로는 갈 생각도 없어 보였고 아직은 누가 부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따라 나왔기 때문에 미래가 또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간 더 구경하다가, 엘레나가 기지개를 켜며 투덜거렸다.
“아, 재미있긴 한데 매년 똑같으니 조금 지겨워.”
축제라는 게 매년 비슷하게 치러지는 행사이고, 가난한 영지에서 준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지겹게 느껴질 만도 했다.
“뭐 더 재미있는 거 없을까?”
조금 실망스러운 듯 두리번거리며 목적지 없이 걷는 그녀에게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다가와 속삭였다.
“아가씨, 그러면 다른 데로 가 볼까요?”
“응? 어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저 호위 기사의 이름은 쟈말.
오랫동안 엘레나의 호위 기사였던 인물로 성내에서도 꽤 평판이 좋은 남자였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외곽 구역에서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하더군요.”
“진짜? 뭔데?”
“저도 친구한테 그렇게만 들어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꽤 자극적으로 준비했다는 얘기만 들었거든요.”
“그래? 가자! 가 보자!”
엘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빨리 가서 구경해 보고 싶은 듯했다.
지셀은 물끄러미 쟈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놈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