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런 무시, 뭔가 익숙해. (3)
지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스코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움도 안 되는 놈이 따라와서 귀찮아 죽겠는데 이제는 아예 지휘권을 내놓으란다.
‘미친 거 아냐?’
당장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지의 후계자를 때릴 수는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토벌대의 지휘관은 접니다.”
거기에 언제나 하는 무시를 살짝 곁들여 줬다.
무시당했다고 발끈하면 대충 달래서 보내면 된다.
“대공자님의 역량으로 병사들을 지휘하는 건 무리입니다.”
소리라도 지를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지셀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그래? 그래도 지금은 그냥 내가 할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지셀을 보고 스코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다른데. 왜 안 드러눕지?’
대공자는 겉모습부터 항상 열등감에 가득 찬 티가 났었다.
살짝 굽은 어깨와 허리, 묘하게 주변 눈치를 보는 표정, 뜻대로 안 풀리면 얼굴이 벌게져 소리부터 지르는 습성까지.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당하게 허리와 어깨를 펴고, 턱은 오만하게 살짝 쳐들었다. 거기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까지.
분위기와 기세 하나만큼은 진짜 소드마스터 저리가라였다.
‘뭐…… 이상한 거라도 먹었나? 오늘 점심이 뭐였지?’
방구석에서 화낼 줄이나 알던 인간이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니 생소했다.
그래도 스코반은 개의치 않았다. 겉모습이야 억지로 포장하더라도 한심한 알맹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안 됩니다. 이만 물러가서 쉬십시오. 토벌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할게.”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한다고.”
“대공자님!”
“내가 한다.”
“…….”
스코반은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고구마를 잔뜩 먹고 속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한심한 애새끼라고 속으로 욕하며 달래면 되었는데, 지금은 그냥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후…… 영주님께 지휘권을 받은 사람은 접니다. 아무리 대공자라도 영주님께 명령받은 권한을 함부로 넘겨드릴 수는 없습니다.”
“괜찮아. 지금은 현장에 있는 내 명령이 우선이다. 일선 지휘관의 판단에 맡겨야지. 전장에서는 뭐 당연한 일 아니야?”
‘그 일선 지휘관은 네가 아니라 나라고, 이 창의적으로 미친 새끼야! 네가 전장을 알긴 뭘 알아!’
갈수록 같잖은 말만 해 대니 기가 찬다. 그런데 신분은 더 높고 말도 안 통한다.
이 멍청한 놈은 지금 자신들이 병정놀이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됐다, 저놈한테 뭘 바라냐. 그냥 형식상으로 지휘관 놀이나 하라 하고……. 오크는 그냥 내가 죽이면 되겠지.’
만약 정말로 위험하다 싶었으면 대공자를 결박해서라도 막았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저 헛소리하는 입에 재갈을 물린 뒤 감옥에 처박고도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기사고, 지셀은 영지의 대공자였다. 스코반은 애써 화를 억눌렀다.
‘더러워서 진짜 진짜 이번에는 때려치운다.’
다른 영지로 가도 지금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정상적인 사람들과 지낼 수 있었다.
이번 임무만 끝내고 페르디움에서 나가자고 결심한 스코반은 지셀에게 말했다.
“정말…… 꼭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당연하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공자님에게 지휘권을 넘기겠습니다. 단, 책임도 같이 지셔야 할 겁니다.”
“오, 좋아. 잘 생각했어. 그러면 바로 준비하자고.”
“네? 뭘 준비합니까?”
“전투 준비.”
“아니, 오크는 아직 발견도 못 했는데 무슨 전투 준비를…….”
“설명하기 귀찮다.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테고. 일선 지휘관의 판단에 맡기라고.”
황당해하는 스코반을 뒤로한 채, 지셀은 바로 모든 병사를 소집했다.
삼십여 명밖에 되지 않으니 모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병사들은 피곤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대공자라는 작자가 매일 사고나 치고, 그 뒷수습은 전부 자신들이 해야 하니 그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 병사들을 보며 지셀은 미소 지었다.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단 말이지.’
옛날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이런 눈빛들이 싫어 더욱더 열심히 사고를 치고 다녔다.
갈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해지고, 그럴수록 열등감도 깊어졌다.
자신도,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속에 항상 분노만 쌓여 갔다.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한번 죽었다 깨어나 보니, 사실은 저들 모두가 자신이 지켜 줘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으르렁대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한참이나 병사들을 뜯어보던 지셀이 나지막이 말했다.
“곧 오크들이 쳐들어올 거다. 모두 방어 대형을 짜고 대기해라.”
병사들은 또 대공자가 미친 짓을 한다고 체념한 채 대열을 갖추었다.
‘이게 도대체 뭔 짓이야?’
‘하아, 정말 피곤하다.’
병사들은 가만히 서서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병사들을 보다 못한 스코반이 지셀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두두두두!
저 멀리서 무언가가 떼 지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오, 오크다! 진짜 나타났잖아!”
“뭐야, 왜 이렇게 많아!”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토벌대의 ‘진짜’ 지휘관인 스코반이 당황하며 검을 뽑았다.
“이, 이런! 모두 당황하지 말고 전투 준비를……. 어라?”
병사들을 돌아본 스코반이 눈을 크게 떴다.
병사들은 이미 방패를 앞에 세우고 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미리 방어 대형을 갖추고 있기에 순식간에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던 것이다.
만약 지셀이 미리 준비시켜 두지 않았다면, 갑작스러운 기습에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스코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지셀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우쭐거리며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했을 지셀은 병사들의 상태를 살피느라 바빴다.
아무리 미리 대형을 갖추었다고 해도, 오크의 수가 너무 많았다.
병사들은 잔뜩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벌벌 떨었다.
지셀은 긴장한 병사 하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이, 왜 이렇게 쫄아 있어. 고작 저런 게 무서워?”
“네, 네?”
“쯧쯧, 이렇게 겁먹어서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 그게 뭡니까?”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 병사에게 지셀이 여유롭게 답했다.
“기세, 기세가 중요해. 바로 저 오크들처럼 말이야.”
병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크들은 단숨에 적을 쳐 죽일 듯 광폭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는 대공자를 보니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 병사를 보며 지셀은 말을 이었다.
“겁먹지 마라. 겁먹으면 제대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게 죽으면 정말 억울할 거야. 안 그래?”
지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생에 신입 용병을 가르쳤던 때가 생각났다.
하지만 지셀의 말을 듣고 있던 병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등신이 왜 갑자기 멋있는 척을 하지?’
조언도 그럴듯한 사람이 해야 가슴에 와닿는 법이다.
일개 병사만도 못하다고 소문난 대공자에게 이딴 말을 들으니 솔직히 같잖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병사를 살피던 지셀이 갑자기 얼굴을 구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야.”
“네?”
“너 지금 속으로 욕했지.”
“네……니요!”
아주 잠깐 정적이 흐르고, 곧 지셀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어휴. 이렇게 무시당하는 거 익숙하긴 하지만, 역시 적응 참 안 되네.’
대륙 7강이자 용병들의 왕이었던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다니. 회귀 전 수하들이 알면 평생 놀림감이 될 상황이었다.
‘뭐, 평판이야 천천히 바꿔나가면 되겠지.’
지셀은 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여유롭게 검을 빙빙 돌리며 오크들에게 다가가는 그를 향해 스코반이 외쳤다.
“대공자님! 뭐 하십니까! 뒤로 피하십시오!”
“됐다. 넌 거기서 구경이나 해라.”
“네?”
“갔다 온다.”
지셀은 한마디 툭 던지고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젠장! 멍청한 새끼!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스코반은 이를 악물고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일단 병사들부터 후퇴시키고 지셀을 잡아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광경에 스코반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크아아아!”
가장 선두에 선 오크가 다가오는 지셀을 향해 녹슨 도끼를 휘둘렀다.
인간 정도는 단숨에 반으로 쪼갤 듯한 강맹한 일격.
그러나 지셀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설 뿐이었다.
콰아아앙!
빗나간 도끼가 빈 땅에 내리 찍혔다.
오크가 분노한 표정으로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스각!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지셀의 검이 번개같이 오크의 목젖을 훑고 지나갔다.
“크르르륵…….”
쿵!
오크는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는 오크를 보고 병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오크는 가죽이 두껍기로 유명한 몬스터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면 큰 상처를 입히기가 힘들다.
그런데, 분명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지셀이 오크의 목을 단번에 베어 낸 것이다.
“뭐, 뭐지?”
스코반도 가만히 서서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입만 뻐금거렸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자신조차도 마나의 파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건 즉…… 지셀이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단 일격에 오크를 무력화시켰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마나는 인간이 한계를 초월하게 도와주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그걸 사용하지 않고 오크를 단번에 죽이려면 엄청난 힘 내지는 극에 이른 기술이 필요하다.
수련한 적이 없어 육체도 비리비리한 지셀에게 그런 괴력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오크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정확한 타이밍에 가장 약한 곳을 공격하는, 상상도 못 할 검술 실력이 있다는 것이다.
“크르륵!”
“크아아!”
달려오던 오크들은 선두에 있던 놈이 갑자기 쓰러지자 모두 멈춰 지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셀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오, 잘됐네. 나부터 노리는 거야? 이러면 더 편해지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미리 병사들을 소집하고 진형을 짜게 했다.
오크 따위는 수가 얼마든 다 죽일 수 있지만, 병사들이 다치지 않도록 막는 건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멍청한 놈들이 전부 자신에게 몰려온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마나 없이 싸우는 건 오랜만인데?”
지셀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이 시절에도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수련한 적은 없었다.
전생에는 집을 나가서 용병으로 떠돌아다니게 된 뒤에야 수련을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나마도 초기에는 마나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오랫동안 쌓아온, 극에 이른 검술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자, 와라!”
“크아아아!”
콰아앙!
오크들이 마구 도끼를 휘둘렀지만 기묘하게 움직이는 지셀을 맞추지 못하고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며, 오크들이 다가오는 힘을 역이용해 가장 약한 목 부분을 갈랐다.
촤아악!
“크르륵!”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오크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어휴, 이거 몸이 제대로 말을 안 듣네.”
지셀은 검을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이 시절의 몸뚱이는 정말로 처참할 정도로 약했다.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리고 근육이 아플 정도로 당겼다.
무리한 움직임에 못 이겨 관절마저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수십 년을 전장과 살육 속에서 살아왔다. 전투를 즐기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한계까지 몸을 혹사하는 이 느낌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휘릭.
콰아아앙!
지셀은 오크들의 공격을 아슬아슬할 정도로 피하며 한 마리씩 쓰러트렸다.
그런 움직임을 본 스코반은 침만 꿀꺽 삼켰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자신도 저렇게 움직이지는 못한다.
‘어, 어떻게 대공자가 저런 움직임을 보이지?’
분명 힘겨워하는 건 보인다. 그러나 공격을 피하는 순간과 공격하는 순간만큼은 움직임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스코반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런 검술을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엄청나다.’
검을 익히는 자로서 배우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움직임. 마치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소드마스터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쳤다고 생각할 평가였지만, 오히려 사실에 거의 근접했다.
대륙 7강은 모두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초인들. 그들이 가진 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전투를 꿰뚫는 통찰력이었다.
그러니 마나가 없고 육체가 빈약해도, 지셀이 쌓아 온 경험과 기술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콰지직!
지셀이 검을 휘두르자 다시 오크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크르륵!”
오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스무 마리가 넘던 오크들은 이제 고작 다섯 마리만 남았다. 대부분이 그 잠깐 사이에 지셀의 검에 목이 베이거나 찔려 죽고 말았다.
“어이, 벌써 끝이야? 난 아직 몸이 덜 풀렸는데. 겨우 이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전투 종족 맞아?”
지셀은 오크들에게 검을 겨누며 이죽거렸다.
물론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하, 이러다 또 죽겠다. 그냥 눕고 싶어. 이때 내가 이렇게 약했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휘두르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셀의 빈약한 몸이 슬슬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