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런 무시, 뭔가 익숙해. (2)
대공자라는 말에 잠깐 어안이 벙벙했던 지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공자라니. 감히 용병왕을 여기에 가둬 놓고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거냐?”
“하, 세상에 그런 왕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에는 왕 놀이를 하고 싶으세요? 도대체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짜증 섞인 병사의 말투에 순간 압도당한 지셀이 저도 모르게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여기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아, 그럼 제발 돌아가시라고요! 낮잠 주무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그냥 가라고? 네까짓 게 감히 날 풀어 줄 권한이 있다는 말이냐?”
“아니, 권한은 무슨 권한이요! 대공자님이 멋대로 따라오셨지 않습니까! 그냥 가시면 되잖아요!”
연기라기에는 너무나도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제야 지셀도 이상함을 느끼고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가 어딘데?”
“어디긴요. 영지 인근에 나타난 오크들을 토벌하러 온 거 아닙니까.”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뒷덜미가 간질간질했다.
“……내 마나는 어떻게 억제했지?”
그러자 병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수련도 안 하시면서 마나는 무슨 마나입니까. 마나가 뭔지는 아시고요?”
“…….”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것도 역시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지셀은 당황해서 새삼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러다 막사 한쪽에 걸려 있는 깃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검은 바탕에 흰색의 늑대 문장.
이미 멸망한 페르디움의 문장이 왜 여기에 걸려 있는 거지?
“저게 왜 여기에 있어? 이거 혹시 나 놀라는 꼴 보고 비웃으려고…… 뭐 그런 거야?”
병사는 이제 대꾸조차 안 하고 귀찮다는 듯 지셀의 팔을 휙 밀어 검을 치워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 그냥 병사가 하는 대로 풀어 주던 순간, 자신의 손이 지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헐, 손이 왜 이래?”
지저분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던 손이 하얗고 매끈했다. 그야말로 수련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 본 모양새였다.
지셀은 신기한 듯 제 손을 뜯어보다 다급하게 구석에 있는 물동이로 다가갔다.
“어? 어?”
그는 물에 비친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탐스럽게 윤기가 흐르는 금발, 하얗고 깨끗한 피부, 선이 고운 외모.
상처투성이인 얼굴에, 술에 절어 언제나 눈이 퀭하던 용병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으아아앗!”
자기 얼굴을 보고 발작하듯 놀라는 지셀을 보며 병사가 혀를 찼다.
‘미쳤네. 드디어 완전히 미쳤어.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동이를 들여다보더니 또 깜짝 놀란다.
확실히 대공자가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 얼굴을 보며 저렇게 놀라는 건 너무 자기애가 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보기 바빴다.
“……젊어졌잖아?”
다시 확인해 봐도 고작 십 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혹시 꿈인가?
지셀은 살짝 팔을 꼬집어 보았다. 날카로운 통증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용병왕이 되었던 기억 쪽이 꿈이었던 걸까?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하고, 잔인한 기억이었다.
‘꿈일 리 없어.’
모든 감각이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모두 꿈이 아닌 사실이다. 자신은 미래를 살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허!”
지셀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병사를 바라보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병사의 복장도, 거기 달린 문장도 분명 페르디움 영지의 것이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병사를 가리키며 입만 뻐금거리던 지셀은 결국 한마디 감탄사만 내뱉었다.
“와우.”
병사는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하시고 성으로 돌아가시지요.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병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지셀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잠깐! 잠깐!”
“왜 그러십니까?”
“어, 그러니까…… 그래, 이름이 뭐지?”
“리카르도입니다.”
“음, 멋진 이름이네. 얼굴도 제법 잘생겼고 말이야.”
“예예, 감사합니다. 대공자님도 잘생겼습니다.”
그러자 지셀이 민망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아휴, 그 소리 오랜만에 들어 보네. 내가 얼굴에 상처가 잔뜩 생긴 후에는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거든.”
“…….”
리카르도는 지셀의 하얗고 매끈한 얼굴을 보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손에 굳은살이 박인다며 수련도 제대로 안 하는 놈이 얼굴에 상처는 무슨 상처란 말인가?
원래도 좀 모자란 사람이긴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미친 거 같았다.
리카르도가 아무런 대답도 안 하자 멋쩍어진 지셀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흠흠, 아무튼 그게 말이지…….”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깐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앞에 서 있는 리카르도를 올려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카르도, 그러니까 말이지……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과거로 돌아온 거 같아.”
“…….”
“……못 믿겠어?”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리카르도가 안쓰러워하는 눈빛을 내비쳤다.
“혹시 수도원이나 탑에 가고 싶으신 건 아니죠?”
귀족이 정신병에 걸리면 대부분 수도원이나 탑에 감금된다.
안 그래도 지셀은 사고를 많이 쳐서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다.
대공자라는 신분 덕분에 지금까지는 아슬아슬하게 피해 왔지만, 정신병까지 있다고 알려지면 즉시 잡혀갈 것이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지셀이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농담이지 농담. 이 친구 은근히 농담 안 통하네. 아, 사람이 어떻게 과거로 돌아와. 아, 어떻게 다시 살아 나. 하하하하.”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가서 일 봐. 멀리 안 나갈게.”
리카르도가 나가자마자 지셀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미치겠네.”
당연히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진짜 과거로 돌아온 당사자도 믿을 수가 없는데 남이야 오죽할까.
“어쨌든 집 나가기 전이라는 건데.”
전생에는 이즈음에 과감하게 가출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페르디움의 병사가 그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아직 가출하기 전인 모양이었다.
“일단은 기억이나 되살려 보자.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다가는 진짜로 감금당할지도 몰라.”
지셀은 생각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막사를 나섰다.
“오…….”
주변에 있는 다른 막사들,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막사 천막은 거의 다 낡아 쓰레기나 다름없는 모양새였지만, 그렇기에 지셀은 과거로 돌아온 게 맞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시절 페르디움 영지는 정말 가난했으니까.
그를 발견한 병사들이 군례를 취하고 지나갔다. 예의를 차리고는 있으나, 표정에는 은근한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노골적인 무시에 오히려 더 과거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크크큭.”
믿기지 않는 상황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로 과거로 돌아올 줄이야.’
무슨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심장이 두근대 참을 수가 없었다.
“으하하하하하!”
지셀은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다!’
과거의 후회와 잘못, 앞으로의 절망까지.
평생을 괴로워하던 그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 되었다.
언제나 그리워했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안전한 건 아니지.’
그 생각에 이르자 지셀의 눈빛에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영지를 멸망시킨 델파인 공작,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자들.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들이 페르디움을 노리고 있다.
‘다 죽여 버리겠다.’
이제 전생과는 다르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쌓아 두었던 정보가 가득했다.
그걸 이용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모든 위험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흥분할 필요 없어. 하나씩, 하나씩 잡아 죽이면 돼.’
지셀은 크게 숨을 내쉬며 급격하게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식혔다. 일단 현 상황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오크라고 했지? 오크 토벌이라면……. 그래, 분명 그때다!’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죽을 뻔했던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자신을 무시하는 시선을 참다 못해, 공을 세우겠답시고 토벌대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토벌대라고 해 봤자 기사 한 명에 병사 삼십여 명이 전부였다.
영지 인근에 나타난 오크는 단 세 마리. 다들 그 정도 병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지.’
실제로 이 주변에 있는 오크는 이십여 마리가 넘었다.
토벌대는 갑작스럽게 주둔지를 급습한 오크들에게 된통 당하고 말았다. 지셀 또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당시 지셀이 지휘하겠다고 나대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컸었다.
‘틀림없어, 오늘이다.’
주변의 풍경과 막사의 배치를 보니 확실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기도 전에 오크들에게 기습당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었다.
‘잠깐,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지셀은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를 지나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대였다.
‘당장 준비해야 한다.’
오크들은 해가 지기도 전에 무식하게 밀고 들어왔다.
이 상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들이 나타날 것이다.
‘놈들도 계획적으로 공격한 건 아니었으니, 승산은 있어.’
애초에 오크들도 우연히 토벌대를 만나 공격을 시도한 거였다.
그러니 이쪽에서 미리 대비하면 전생처럼 큰 피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왕 과거로 돌아올 거면 좀 더 일찍 돌아오면 어디가 덧나나!’
지셀은 속으로 툴툴댔다.
갑자기 과거로 돌아왔으니 어안이 벙벙하고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다.
아직 현재 상황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오크를 상대해야 하다니.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전생이자 과거에는 자신 때문에 지금 여기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지셀도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주변의 비난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가 가문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 모든 후회의 시작점을 이번에야말로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피하는 게 오히려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미래를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다.’
오늘을 기점으로 영지의 미래는 전생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고개를 든 지셀의 얼굴에 더 이상 혼란은 없었다. 그저 굳건한 의지만 보일 뿐이었다.
“자, 그러면 오크가 세 마리가 아니라 스무 마리라고 일단 말을…….”
토벌대의 지휘관을 찾아 걸음을 옮기던 지셀이 잠시 멈칫했다.
이 시기 자신은 북부의 망나니이자 쓰레기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오크가 많으니 대비하라고 하면, 또 미친 소리를 한다고 욕이나 먹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설득도 안 통할 거 같은데.”
설득도 근거가 있고 믿음이 있어야 통하는 법이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해도 무시당할 게 뻔했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명쾌한 해답을 찾아냈다.
“어쩔 수 없네. 그냥 내가 지휘하는 수밖에. 그게 낫겠어.”
이러면 전생과 달라진 게 없지 않나 싶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지휘권을 어떻게 뺏었더라?”
지셀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렴풋이 옛 기억이 떠올랐다.
― 내가 지휘하겠다고! 오크도 세 마리밖에 안 된다며!
― 너, 나한테 대들고도 무사할 거 같아? 내가 영지를 물려받으면 네놈을 가만히 둘 거 같냐고!
― 날 무시하는 거야? 할 수 있다고! 나한테 달란 말이야!
……그냥 드러누웠었구나.
“허허……. 아주 애새끼처럼 징징거렸네.”
지셀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무시당하기는 싫어서 발버둥 치던 꼴이라니. 잘 때 이불을 뻥뻥 찰 만한 일이었다.
“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지휘권을 뺏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과거처럼 유치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철도 들었고 경험도 많이 쌓았으니까.
“그래, 일단 정중하고 품격있게 부탁해 보자.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
지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토벌대를 이끄는 기사를 찾아갔다.
기사는 지셀을 보자마자 바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노골적인 거부 반응에 지셀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와, 내 앞에서 이런 표정 짓는 놈 진짜 오랜만에 본다. 적응 안 되네. 그래도 부드럽게, 상냥하게 말해야지.’
“흠흠, 그러니까 말이지…… 아, 자네 이름이 뭐였지?”
“스코반입니다.”
스코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영지의 대공자나 되는 인물이 어찌 가문 휘하 기사의 이름도 제대로 모른단 말인가?
역시 이놈은 전혀 자질이 없는 놈이었다.
스코반의 속마음도 모른 채, 지셀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오, 그래. 스코반 경,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무슨 일입니까?”
상대가 퉁명스레 나와도 지셀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정중히, 정중하게 얘기를…… 아니 근데, 내가 달라고 하면 당연히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놔.”
“네?”
밑도 끝도 없는 요구에 스코반이 되묻자, 지셀이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지휘권, 내놓으라고.”
지셀의 기준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정중한 것이었다.
일단 안 때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