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런 무시, 뭔가 익숙해. (1)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될까?”
“죽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술을 마시다 갑자기 질문을 던지는 친우에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런 걸 생각할 시간에 검을 조금 더 날카롭게 다듬는 게 나았으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러면 다음에는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나면 좋겠어. 조용히 살고 싶거든.”
조용히 살고 싶다는 내 말에 그는 한참을 웃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할 생각인가?”
“그래.”
“지금도 많은 이들이 재앙에 고통받고 있어. 네가 움직이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겠지.”
“상관없어.”
“유쾌해 보이던 친구에게 이렇게 아픔이 많은 줄은 미처 몰랐군.”
“누구에게나 아픈 과거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일이 끝나면 다시 괴수 사냥이나 가자고.”
“상대할 재미가 있는 놈이나 찾아 놔.”
그는 낄낄대고 웃다가 술을 단번에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았다.
“성공하길 빌지. 대신 기도라도 해 주랴?”
“신 따위는 믿지 않아. 이것만 믿을 뿐이지.”
내가 검을 흔들며 웃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어련하실까.”
스으윽.
검은 원이 나타나며 친우의 몸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진다.
“거참, 편리한 기술이야.”
혼자 남은 나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한 잔, 두 잔, 세 잔.
다시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후회한다.’
루타니아 왕국 북부의 페르디움 영지.
왕국의 변방에 위치해, 끊임없이 야만인과 싸워야 하는 가난하고 척박한 영지.
나는 그곳의 대공자로 태어났다.
‘한심했지.’
다른 귀족 자제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불만만 가득한 삶을 살았다.
비교는 열등감을 불러온다.
열등감은 철없는 행동으로 분출되었고, 그건 곧 사고로 이어져 남들에게 끊임없이 손가락질받았다.
망나니, 미치광이, 방구석 소드마스터…….
온갖 안 좋은 별명은 다 들으며 살아가던 나는 결국 도망치듯이 가문을 떠났다.
용병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를 몇 년.
운이 좋았는지 수많은 전장을 구르면서도 살아남았다.
사선을 넘나들며 실력이 쌓이고, 명성이 늘어나니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때는 가문으로 돌아가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철없던 시절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에, 가문에 돌아가 큰 힘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갔을 때, 가문과 영지는 이미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엇 하나 해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을 피했다.
혹시 화를 입을까 귀족의 이름까지 버린 채 숨어 살아야 했다.
‘더 강해져야 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대륙을 강타한 수없이 많은 재앙에 맞서 끊임없이 싸웠다.
어느 순간 나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용병왕.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일곱 명, 대륙 7강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쯤 되자 삶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수많은 수하와 높은 명성, 그에 걸맞은 실력까지 있었으니.
‘그래도 부족했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갈증을 느꼈다.
이미 없어진 가문, 젊은 시절의 후회들, 뒤늦은 깨달음.
내 모든 과거가 밤마다 나를 괴롭혀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가족들과 친우들, 그리고 영지 사람들……. 이제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회한다.’
아직 전란은 끝나지 않았다.
대륙을 덮친 재앙들은 곳곳을 피로 물들였다. 사람들의 고통 어린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가슴은 더 이상 그 비명들을 담지 못했다.
‘때가 되었다.’
이제 후회는 잠시 접어 둘 때였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아직은 약해서, 아직은 부족해서, 아직은 조심스러워서…… 아직은…… 아직은…….
언제나 이렇게 이유를 붙이며 뒤로 미뤄 왔던 일.
‘복수.’
그래, 가문을 멸망시킨 자들에게 복수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허무가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다.
그들의 피로 내 안의 허무를 채울 것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 두고 검을 잡았다.
* * *
용병왕 지셀이 군사를 일으켰다.
대륙 7강에 이름을 올린 그가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비록 7강의 말석으로 꼽히긴 하지만, ‘용병왕’의 전술적 가치는 한 나라의 병력과 맞먹는다고 평가된다.
― 용병왕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아직 전란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지셀의 행보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왜 하필 지금 내분을 일으켰냐고.
그러자 그는 지금껏 숨겨 왔던 자신의 이름과 성을 밝혔다.
“나에겐 가문의 복수가 더 중요하다.”
복수의 상대는 그의 가문이 있던 루타니아 왕국. 지셀은 오래전 떠나온 고국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용병왕의 명성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지셀의 충성스러운 수하들, 이 기회에 한몫 잡아 보려는 자들이 섞여 그와 함께 칼을 뽑아 들었다.
“내 목표는 오직 루타니아의 멸망뿐이다.”
군사 강국이라 불리는 루타니아였지만, 대륙 7강의 일원인 지셀 또한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했다.
지셀은 파죽지세로 모든 것을 박살 내며 왕국을 유린했다.
하지만 그의 진격은 어느 순간부터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상하다.’
그간 이름도 알지 못했던 강자들이 속속 나타나 지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루타니아의 사람이 아니었다.
왕국과 관계없는 자들이 왜 지셀을 막아서는 것일까?
‘무언가 있다.’
지셀은 의문을 뒤로한 채, 침착하게 그들을 하나하나 해치우며 나아갔다.
지셀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하지만 숨겨진 강자들의 등장으로 그의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재정은 빠르게 나빠졌고, 용병답게 이해득실을 따져 이탈하는 자도 점점 많아졌다.
그러던 중, 승패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륙 7강, ‘고결한 기사’ 아이던이 참전한 것이다.
승부의 추는 급격하게 왕국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지셀은 적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카르토. 아니, 진짜 이름은 지셀이었나? 이렇게 승부가 나는군.”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금발의 미남자, 아이던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 역시 갑옷 곳곳이 깨지고 머리가 헝클어져 꽤나 곤욕을 치른 티가 났지만, 그래도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큰 상처는 없었다.
반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지셀은 수십 개의 창과 검에 꿰뚫려 몸에 온전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셀은 피를 흘리면서도 아이던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재수 없는 새끼. 네놈이 끼어들 줄은 몰랐다.”
아이던은 다시 웃으며 전장을 둘러보았다.
격렬한 전투로 사방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는 강이 되어 흘렀다.
“네놈 부하들은 다 도망갔군. 역시 긍지도 없는 천박한 놈들이다.”
“큭, 살아남는 길을 잘 찾는 놈이 실력 있는 용병이다. 살 수 있으면 굳이 죽을 필요도 없지.”
아이던은 코웃음을 치며 검을 들어 지셀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다. 왕국을 완전히 끝장내지 못한 게 아쉬울 뿐. 이제 죽여라, 이 느끼한 새끼야.”
“건방지기는.”
당당한 지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이던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평소에도 영 마음에 안 들었지. 천박한 용병 주제에 나와 한데 묶여 언급되는 게.”
“누군 좋았는 줄 아냐?”
“그런데 설마 페르디움 백작가의 생존자였을 줄이야. 그 점 하나는 놀랍더군.”
지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순히 전해 들은 사실에 대한 감상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한 어조였다.
지셀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본 아이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지셀의 귓가에 조금 더 고개를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사라졌던 페르디움의 대공자가 너였을 줄이야. 여동생이 죽고 그 뒤에 집을 나갔지? 한때 너를 찾아다녔었지.”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지?”
아이던은 루타니아 왕국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타국에서 있었던,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일을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찾아다녔다니?
“당연히 잘 알지. ‘우리’가 델파인 공작가와 손잡고 네 가문을 멸망시켰으니까.”
“뭐?”
아이던의 말은 지셀의 뇌리를 강타했다.
페르디움을 멸망시킨 델파인 공작가는 반란을 일으켜 왕국까지 손에 넣은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지셀은 왕국 자체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국의 인물들까지 그 일에 엮여 있을 줄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지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라고? 공작가에 배후가 있었다는 말이냐!”
“배후라……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군. 그보다는 차라리…… 아니다, 너 같은 놈한테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냥 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라.”
아이던은 오만하고 느끼하긴 하지만, 언제나 정의를 입에 담고 사는 놈이었다. 그렇기에 ‘고결한 기사’라 불리는 게 아닌가.
그런 놈이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는 음모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네놈이 우리 가문에…… 네놈과는 상관도 없는 타국의 영지가 아니냐!”
“세상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아. 뭐, 천박한 용병 따위가 그런 고차원적인 뜻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네가 이번 전쟁에 끼어든 것도…….”
“그래, 깔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지. 내 이름에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까 말이다.”
아이던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저 검이 떨어지면, 지셀의 목도 떨어질 것이다.
“이놈! 용서하지 않겠다!”
지셀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망가진 몸으로는 마나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멍청한 놈, 이제 끝이다. 그러게, 분수에 맞게 용병 짓이나 하고 살았어야지.”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아이던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파앗!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목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
시야가 빙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피어나는 선혈 속에서, 지셀은 그간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감정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후회, 허무, 아쉬움, 안타까움…….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은 건 끝없이 타오르는 분노였다.
― 다시 태어난다는 얘기도 있던데.
마지막에 친우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정말로 다시 태어난다면! 반드시 네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주겠다!’
털썩.
떨어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원통한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용병왕 지셀은 그렇게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 * *
‘살아 있다?’
분명 목이 베였는데. 설마 착각이었단 말인가?
지셀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눈만 조심스레 떴다.
‘막사?’
야영지에서나 쓰는 군사용 간이 천막이 보였다.
‘포로로 잡힌 건가?’
주변에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막사 안에는 그 혼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몸이 묶여 있지도 않았다.
‘건방진 놈들. 나를 그냥 내버려 뒀다고?’
자신이 상당히 우습게 보인 모양이었다. 묶지도 않고 이렇게 눕혀만 놓다니.
슬며시 마나를 끌어올려 보았지만, 바다와 같던 강대한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뭔가 조치를 해 둔 건가?’
그는 천천히 상체를 세우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
간이침대 옆에는 검 하나가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큭큭, 내가 정말 우습게 보였구나.”
마나를 쓰지 못해도 지금껏 쌓아 온 검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검 하나만 있으면 어지간한 병사 수백은 죽일 자신이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후회하게 해 주지.’
마나는 이곳을 탈출한 뒤 다시 회복하면 될 일이었다.
부스럭.
그때, 누군가가 막사 입구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셀은 잽싸게 도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병사 하나가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고소한 수프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조금 배가 고파졌지만, 지금은 먹을 것에 정신이 팔릴 때가 아니었다.
병사가 등을 돌린 채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지셀이 검을 뽑으며 번개같이 움직였다.
“쉬잇,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살려 주마.”
그는 잠깐 고민하다 조그맣게 덧붙였다.
“아닐 수도 있고.”
병사는 목에 검이 들어오자 깜짝 놀란 듯했으나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반항을 포기했다고 생각한 지셀이 궁금한 걸 물으려는 찰나, 병사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어딘가 짜증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하아, 대공자님. 또 왜 이러십니까? 심심하세요? 그냥 성으로 돌아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지셀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포로로 잡혀 있다고 해도, 한낱 병사 주제에 감히 용병왕에게 이런 식으로 지껄이다니.
그런데…….
이 짜증,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