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67화 (167/195)

167화

* * *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쿨드는 손수 제단 뒤쪽을 열어, 디안 케트의 일기장과 인장을 내게 건넸다.

“버클리그레이튼의 연구원이 ‘심장에 자아가 있다’라는 평을 했다는 말입니까?”

“네.”

“흐음. 재밌군.”

고개를 주억이자, 우르드가 짙은 흥미를 표했다.

그는 외국어 문외한인 나를 위해, 목조 의자에 쭈그려 앉아서 일기장의 내용을 제국어로 번역 중이었다. 언뜻 보이는 글씨체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악필이었다.

“꽤 그럴싸한 가정이다. 자아로 인해 실험에도 각기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된 거지. 메피스토의 심장을 이용한 실험은 실패를 거듭하되 결국 마귀를 만들어 냈어도, 디안 케트 님의 심장을 이용한 실험은 키메라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으니까.”

“확실히 디안 케트의 심장과 메피스토의 심장은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주위를 현혹하고 숙주를 장악하려는 메피스토의 심장과 다르게, 디안 케트의 심장은 날 차지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깨진 영혼 사이로 스며들어서 생명 연장의 기회를 선사했잖아요?”

우르드 옆에 쭈그려 앉아, 그가 번역한 제국어를 종이에 옮기던 베르단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디안 케트 님의 바람은 정말 그대를 살리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어.”

“치료술사라서 그런 걸까요?”

“글쎄? 그대의 논리대로라면, 데이지 양을 살리는 게 아니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그쳤어야 하지 않을까? 검성의 실험에서 그러했듯이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산의 마법 시동어도 그렇고, 새장에 달려 있다는 이름표도 그렇고. 모두 그대를 가리키고 있다며? 단순하게 생각해, 데이지 양.”

펜을 놓은 베르단드가 내 눈을 바라보며 확신의 어조로 말했다.

“디안 케트 님의 유산은 그대를 위해 마련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

“무슨 인연인지는 유산을 사용하면 밝혀지겠지. 알게 되면 나한테도 말해 줘. 궁금…….”

“그만 주절거리고 번역한 제국어나 제대로 옮겨라. 아는 게 북대륙어뿐이면 성실하기라도 해야지,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날 새벽 내내, 나는 잠든 루의 곁에 앉아 우르드와 베르단드가 번역해 준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읽었다. 루가 대강의 내용을 언급하기는 했으나, 내 눈으로 직접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기장을 탐색하길 두어 시간.

아침 해가 떴다.

“으으으음!”

길게 기지개를 켠 후 웨더우즈 저택에서 디안 케트의 알(하녀장이 침실 밖으로 내보내는 건 처음이라며, 깨뜨리지 말라고 노심초사했다)을 챙겨 오자, 제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세 명의 칼레파가 내게 다가왔다.

“데이지 양, 오늘 바로 유산을 사용할 생각입니까?”

“내가 같이 가 줄까? 솔직히 유산을 시동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미치겠어.”

“네가 가기는 어딜 간다는 거냐. 넌 로드 칼레파의 곁을 지켜라. 가도 내가 간다.”

“개소리하지 마. 당신이 지켜.”

“네가 지켜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칼레파는 다 스쿨드처럼 어른스럽고 이지적일 줄 알았는데.

‘로궤든 아니든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니까.’

루가 그간 이 세 명의 칼레파와 어떻게 지내 왔을지 대강 예상이 갔다. 꽤 재밌는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다섯 개 모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는지를 확인할 생각이에요.”

“신중해서 나쁠 것 없겠지요. 다만 시동어를 조심하십시오. 함부로 입 밖에 꺼냈다가는 유산이 시동될 수 있으니까요.”

“명심할게요.”

버클리그레이튼 성으로 이동하기 전, 나는 루가 잠든 제단을 돌아봤다.

‘……루.’

꿈속에서, 그가 남긴 힘으로부터 단 세 번의 만남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일부러 잠에 들지 않았다.

세 번의 만남이 모두 끝났을 때, 그의 힘이 나를 떠나면서 루도 영영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계속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열쇠를 이용해 곧장 버클리그레이튼 성, 정확히는 검성의 침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텅 빈 검성의 침대에 디안 케트의 유산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알, 새장, 일기장, 인장. 마지막으로…….

‘저게 그 손거울인가.’

탁자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낡은 은거울.

그래도 새장만큼 낡지는 않았다. 조금 오래됐을 뿐, 외관은 깨끗했으니까.

드디어 다섯 개가 다 모였다.

디안 케트의 전설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이제 남은 건 사용뿐이었다.

‘……역시 그게 제일 난관이야.’

나타샤에게 사용해 메피스토의 심장을 저지하느냐.

내 영혼을 고치느냐.

루에게는…… 사용할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는 않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앞선 둘이 전부였다.

‘역시 칼레파들에게 조금 더 조언을 구하는 게 좋으려나.’

마지막 디안 케트의 유산인 은거울을 네 개의 유산 옆으로 옮기려던 순간.

퍽!

목뒤를 강타하는 강인한 힘과, 호흡기로 스며드는 시큼한 향을 느끼며…….

나는 기절했다.

.

.

.

.

그리고 꿈꾸듯 흐릿한 심연을 헤매다가 곧바로 깨어났다.

“허억!”

뭐, 뭐지?

방금 기절했던 것 같은데?

일단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나는 몸을 굴려서 벽 쪽으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내 사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명해지는 시야 너머, 안개처럼 흐물흐물한 인형이 보였다. 기척은 한 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최소 넷 이상.

“역시 안데르트 경. 이 정도로는 고작 30초 정도 기절하는 게 전부로군요. 웬만한 곰보다도 더 약물이 들지 않아요.”

“……드셰로?”

익숙한 음성이 지척에서 들린 그 순간. 내 심장이 바닥으로 훅, 떨어졌다.

디안 케트의 유산을 한자리 모으기 무섭게, 무릎이 꿇린 채로 결박된 사지.

거기에 날 기절시키려다 실패했다는 증언까지.

‘설마 검성과 라파엘로가 나를 배신한 건가?’

그쯤 되자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내 앞에 자리한 인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확인하기 무섭게 말문이 막혔다.

라파엘로, 드셰로, 로즈벨 백작.

좋아,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들이 나를 배신했다고 여겼을 때 이상하게 여길 조합도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에 진이랑 안데르트는 왜 껴 있는 건가?

“이게 지금 뭐 하는…….”

“뭐 하는 거냐고? 그건 이쪽이 물을 말이다.”

씹어뱉듯 날 몰아세운 이는 라파엘로였다.

주먹을 휘둘러도 시원찮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본 그는 침실에 자리한 유물을 쭈욱 훑으며 말했다.

“이미 네 개를 모아 뒀다는 건…… 그래, 그만큼 간절했다는 의미겠지. 더불어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두 모으는 수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뜻일 테고.”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라파엘로의 싸늘한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한데 그런 귀중한 기회를……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나타샤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사용하려 한다고?”

어?

멍하니 눈을 깜빡일 동안, 라파엘로 옆에 묵묵히 서 있던 로즈벨 백작이 어두운 안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지하르크 공작 각하에게 이야기 전부 전해 들었네, 안데르트 경. 자네가 기껏 모은 유산을 다른 데 사용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만. 쯧쯧. 안데르트 경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건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요.”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찬 칼펜위버 후작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보게. 딸들에게 자네가 죽을 예정인 것 같다고 전하니 뭐라 했는 줄 아는가? 타라가 역시 그 세레니예 백작을 믿으면 안 됐다고 하더군. 여우 같은 매력으로 자네의 마음을 홀라당 훔쳤으나 결국 그자는 바람둥이에 불과했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웨더우즈 자작은 슬픔을 참지 못한 채…….”

“그, 그만!”

눈앞이 다 어질어질할 만큼 지독한 혼란을 겪던 와중, 이 자리에 없는 단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성.

‘검성에게 전해 듣고 하루아침 만에 이곳에 전부 모였다고?’

이게 다 검성 때문이다.

나는 분노를 담아 외쳤다.

“검성 불러!”

“닥쳐.”

이번에는 안데르트였다.

그는 라파엘로 못지않게 잔뜩 어그러진 얼굴로 내게 호통쳤다.

“그 빌어먹을 파란 머리가 못인지 뭔지를 뺀 덕에, 이제야 제대로 된 기억을 찾았는데…… 뭐? 누구 마음대로 죽어? 이 자식이 미쳤나? 서른쯤 되니까 인생이 만만해?”

“나는 죽겠다고 한 적이…….”

“닥쳐!”

아니, 나는 아직 아무 결정도 안 했다니까 그러네?

드셰로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내 반대쪽 어깨를 두드렸다.

“어쩔 수 없어요, 데이지 양. 그간 당신이 해 온 행동을 되새겨 보세요. 그러게 알아서 적당히 잘 이기적으로 살지. 누가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호구처럼 굴랍니까?”

“그러니까 나는…….”

“하아. 그리고 라파엘로 공작 각하께는 어쩌다 정체가 들킨 겁니까?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 경의 정체를 말한 적이 없습…….”

다 됐어.

지쳤어.

“흠흠. 자작님, 다음은 저입니다.”

또 뭔데? 기운 없이 고개를 들자, 수첩을 든 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작님이 생명 연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웨더우즈 사람들의 안부 쪽지를 모아 왔습니다. 가장 먼저 말리콥스 님의 쪽지입니다. 이보게, 자작.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그게 사실인가? 허어…….”

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고용인들의 쪽지를 술술 읊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마지막으로, 웨더우즈 가문의 하녀장님이 남긴 서신입…….”

“나타샤는?”

한참 만의 반문에, 방 안이 고요해졌다. 대답은 진이 아닌 안데르트가 대신했다.

“그 여자가 뭐?”

“내가 살면, 나타샤는?”

“네가 살면 그 여자도 살겠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안데르트가 네 번째 역정을 냈다.

“말 못 알아들어? 멍청한 내 누나도 살리고, 염병할 그 황녀도 살린다고. 누나도, 그 여자도, 둘 모두 살리겠다고!”

분노를 넘어서 혐오스러운 표정이 된 라파엘로가 안데르트의 말을 거들었다.

“너, 설마 우리가 나타샤를 죽게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안데르트 경. 자네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말게. 우리가 함께 전장을 굴러 온 시간이 자그마치 10년이야. 우리는 자네도, 나타샤 황녀 전하도 포기하지 않을 걸세.”

“뭐, 슬슬 그때의 빚을 갚을 때도 됐지요.”

포기하지 않는다고.

‘나를, 나타샤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참 이상한 일이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닐진대, 이상하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눈알이 빠지게 날 노려보던 안데르트가 진을 향해 턱짓했다.

“어이, 머저리. 그 할아범. 마, 말…… 말랑코 할아범? 그자가 알려 준 마법 시동어가 뭐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것까지 알아 온 거야?

“말랑코 할아범이 아닙니다, 미친개 가로쉬. 말리콥스 할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뭐냐니까?”

진은 고심하는 얼굴로 턱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아니지. 잠깐.

“아마 <죽지 마세요, 애쉬>라고 했던 것…….”

“잠깐! 말하면 안 돼!”

키이이이잉.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강렬한 파동이 방 안을 훑고 증발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파동의 발원지로 모아졌다.

“아.”

디안 케트의 첫 번째 유산.

거대한 알의 매끄러운 표면에서 청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알은 아주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시동어 감지.

이윽고, 나머지 네 개의 유산도 푸른빛에 둘러싸여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은 순식간에 창백해진 낯으로 나를 돌아봤다.

“자작님, 죄송합니…….”

-마법 시행.

디안 케트의 유산이 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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