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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66화 (166/195)

166화

종전 후 지하르크는 의문에 잠겼다.

안데르트는 분명 먼지가 되어 사라졌을 텐데, 맹세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다. 마치 안데르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종전 사흘.

퀸 섬에서 귀가를 기다리는 군인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꿈을…… 꿈을 꾸는 게 두렵습니다, 각하. 꿈을 꿀 때마다 저는 동료들을, 아버지를, 어머니를 학살하는 끔찍한 마귀가 됩니다.”

군인들의 호소는 퀸 섬을 벗어난 이후에도 계속됐다. 고심하던 지하르크는 연구원들을 다시 불러 고견을 구했다.

한데 연구원 한 명이 지하르크에게 되묻기를.

“혹시, 영웅이 메피스토와 자멸한 순간 그 주위에서 강렬한 공명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다른 자들은 몰라도, 각하처럼 격이 높은 무인이라면 느끼셨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 힘들다.”

“메피스토는 반신이라 불리는 악귀입니다. 그런 자의 심장이라면 퀸처럼 자아를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추측건대 메피스토의 영향인 듯하니 우선 심장을 찾아서 파괴하는 게 좋겠습니다.”

또 그 소리인가.

하지만 이번 경고만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지하르크는 일시 중단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개선 연구를 재개하는 한편, 퀸 섬에 탐색대를 보내 성터를 더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정작 퀸 섬에서 발견된 것은 심장이 아니라, 훤칠한 키와 얼굴에 기다란 자상을 가진 떠돌이 검사였다.

지하르크는 탐색대를 손쉽게 제압한 청년의 무위를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쓸 만한 솜씨다. 갈 곳이 없다면 나를 따라오겠나?”

“당신이 누군데?”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지하르크는 청년에게 ‘가로쉬’라는 이름을 붙인 후 제자로 받아들였다.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제국에 완전한 평화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참전파와 침묵파.

두 세력으로 나뉜 귀족들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 내전으로 이어질 것처럼 한층 과열된 분위기는 황제가 아슈네이케 황자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며 극에 달했다.

“말도 안 되오! 황제 폐하께서 아슈네이케 황자의 손을 들어 주셨다니? 믿을 수 없소. 펜 로타 제국의 황위를 이을 만한 황족은 오직 나타샤 황녀 전하뿐이란 말이오!”

참전파는 마치 군대라도 일으킬 기세로 거세게 부정했다.

사안이 사안이었던 터라, 두 세력 사이에서 중도를 고수하던 지하르크 역시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다.

‘항시 이성적이었던 황제 폐하께서 아무 연유 없이 나타샤 황녀를 내치셨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 연유는 대체 무엇이지?’

아슈네이케 황자가 지하르크에게 독대를 유구한 것도 정확히 그 시기였다. 요구에 응해 아슈네이케 황자를 찾아갔을 때, 지하르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행방불명되었다던 나타샤 황녀가 아슈네이케 황자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지하르크 공작. 우리에게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한 손에는 불쾌한 기운을 풍기는 돌을 손에 쥔 채.

두근…….

두근…….

돌에서 퍼져 나온 끔찍한 고동이 귓전을 파고드는 순간, 지하르크는 확신했다.

저것이 메피스토의 심장이라는 것을.

저 심장 때문에, 나타샤 황녀가 아슈네이케 황자의 손을 잡은 게 틀림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심장 결정석과 관련된 연구를 은밀히 진행해 왔다고 들었다. 메피스토의 심장을 분석하기 위해 공작의 지식이 필요하다.”

“심장의 무엇을 분석하시겠다는 겁니까?”

“마귀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그 에너지라면 죽은 전우들을 되살릴 수 있을지 몰라.”

아.

지하르크는 탄식했다.

지금 소생을 하겠다는 건가? 그 현명했던 황녀가 소생 같은 소릴 입에 담는다고? 안데르트 파거의 죽음으로 미쳐 버린 것일까?

아슈네이케 황자가 나타샤 황녀의 제안을 거들었다.

“이는 황제 폐하의 명이기도 하다, 지하르크 공작. 나타샤를 도와 소생 연구를 진행하라.”

문득, 연구원의 경고가 떠올랐다.

반신의 심장은 자아를 가진다는 말이.

지하르크는 아직까지 그 주장을 믿지 못한다. 지고의 무인인 그는 일반인들이 얼마나 쉽게 강자의 힘에 매료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반신이라는 존재가 선사하는 환상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심장은 펜 로타에 득이 될 것인가, 독이 될 것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남자. 정해진 답이 어떠하든, 그의 결단은 하나였다.

“황명을 받듭니다.”

셋은 기밀 유지를 위한 맹세를 나누었다.

그 장면이, 내가 훔쳐볼 수 있는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 * *

기껏해야 5초쯤 되는 시간이었다.

검성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그 순간, 검성 또한 칼레파의 마법에서 벗어났다.

의식이 돌아오기 무섭게 거리를 벌린 그는 손바닥에 박혀 있던 단검을 단숨에 빼 버렸다.

촤악.

단검에서 자유로워진 손등은 꿰뚫린 흔적 없이 말끔했다. 검성은 이마를 부여잡은 채 잠시간 심호흡한 후 입술을 뗐다.

“……대단한 마도구로군. 내 기억을 훑어본 건가?”

노골적인 조소를 입가에 띤 그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래서. 이 난리를 쳐서까지 살펴본 감상은 어떻지?”

감상? 대단할 것 없다.

“공작님다우십니다.”

“나답다고? 우습군. 그게 다인가?”

그래, 그게 다다.

‘디안 케트의 심장으로 10년 가까이 연구해 왔단 사실은 놀라웠지만.’

덕분에 질질 끌어 오던 오해도 풀렸다. 참전 군인을 대상으로 한 정신 치료는 순수한 의도로 진행된 치료였다는 사실 말이다. 사냥제 사건과는 일말의 관련도 없던 것이다.

‘아마 기밀 유지 맹세 때문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던 거겠지.’

상대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쪽도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디안 케트의 손거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유산이 저에게 있습니다.”

“넷?”

나는 얇아진 검성의 눈매를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모으고 있었죠.”

“……자작님? 수명이라니요?”

진의 눈이 멍해졌다. 나는 씁쓸함을 삼키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숨겨서 미안해. 사실 내가 이 모습이 된 것도 목숨이 간당간당해서거든. 이 시절의 육신을 빌려서 겨우 버티고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거야.”

“맙소사. 어떻게 그런…….”

진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

검성 또한 그녀 못지않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언제 어디서나 냉철함을 고수하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마를 짚던 기다란 손가락이 서너 번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대체 왜! 황성에서 말하지 않은 거지, 안데르트?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겨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 역시 검성답지 않은 역정이다. 나는 내심 놀란 심정을 숨기며 지지 않고 답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공작님을 믿지 못하니까요. 기억을 확인한 것도 그 일환입니다. 방금 당하신 일은 업보라고 생각하세요.”

“업보?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을 줄은 몰랐군.”

쓴 표정으로 입가를 닦아 낸 검성이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래, 그대는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마침 잘됐다. 그대가 만나야 하는 이가 있다. 따라와라.”

“……갑자기 말입니까?”

“갑자기? 글쎄. 귀환 영웅으로 등장해 이목이란 이목은 다 끈 그대에게 갑작스러운 만남은 아닐 듯하다.”

그 말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나타샤.

‘나타샤가 이 성에 있는 건가? 그래, 그러면 검성의 행동도 말이 돼. 나를 생포하려던 게 아니라 나타샤를 만나게 하려던 거였어.’

검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갔다. 나는 한눈에 봐도 우울해진 진을 다독이며, 그런 검성을 뒤따랐다.

검성의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아니, 멀지 않는 것으로 모자라 바로 옆방이었다. 다섯 개의 잠금쇠를 푼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한겨울처럼 서늘한 바람이 마귀의 손처럼 뻗어 나왔다.

암막 커튼으로 꼼꼼하게 가려져 어두운 내부에는 둥그런 등불 하나만 오도카니 켜져 있었다.

“마도구로 구금 중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도록.”

검성의 말마따나 등불 아래 누군가 누워 있었다. 사지가 결박당했는지 꼼짝도 못 한 채 바닥에 들러붙은 형상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그림자를 바라봤다. 결코 반갑지 않은 기운이 그림자를 둘러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건 설마…… 나타샤 황녀, 전하입니까?”

진의 경악을 무시한 검성이 내게 말했다.

“미리 경고해 두지. 나타샤 황녀는 이미 자아를 잃었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서 나를 찾아왔지. 아마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였을 거다.”

“…….”

“이미 예상했던 얼굴이군.”

그는 길을 내주었고, 나는 어둠 속을 나아가 나타샤에게로 다가갔다.

나타샤의 얼굴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가온 나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왔구나, 안데르트. 드디어 네가 왔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네가…….”

퍽퍽하게 갈라진 음성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고목의 나뭇가지처럼 형편없이 마른 나타샤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응, 여기 있어.”

“안데르트, 안데르트. 내 말을 들어줘. 네게 간곡히 부탁할 게 있다.”

“말해.”

“나를 죽여 다오.”

죽음.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만큼은, 나타샤의 음성이 산 자의 목소리처럼 또렷했다.

“나는 큰 죄를 지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내 안에 메피스토의 심장이 있다. 네가 나를 죽여서 그 악귀를 영원히 쫓아내 다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를 죽여서 메피스토의 심장을 부수라고? 참 쉬운 말이다. 또한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았다.

정말, 너무 쉽지 않아…….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게다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간단한 해결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타샤의 죽음이 메피스토의 완전한 죽음과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디안 케트의 유산을 이용한다면…….”

검성은 내 고심을 한눈에 꿰뚫어 본 듯했다. 내 팔을 끌어 일으켜 세우고는, 통로로 내몰아 주저 없이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디안 케트의 마지막 유산을 경에게 넘기지.”

나는 콱 막힌 목을 힘겹게 풀어내며 되물었다.

“이렇게 쉽게 말입니까? 제가 무슨 선택을 할지 아시고요?”

“황녀의 상태가 예상보다 더 심각해. 연구의 성과를 볼지도 미지수인 와중에 메피스토가 유산으로 멀쩡해진 몸에 강림하기라도 한다면…… 뒷일을 장담하기 힘들겠지.”

거침없이 말을 잇는 검성의 눈동자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대가 살면 꽤 할 만한 싸움이 되지 않겠는가? 오히려 이쪽이 확률 높은 도박이야.”

검성에게, 나타샤를 살린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성의 선택은 확고했고, 은연중 내게 진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나타샤는 포기하고 너 자신을 위해 디안 케트의 유산을 사용하라고.

그것이 최선의 수라고.

“대신 조건이 있다. 유산에 각인된 마법은 내 성에서 발동해야 해.”

“……이유가 뭡니까?”

“괜히 의심할 것 없어. 만약을 대비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서니까. 전에 말하지 않았었나? 유산의 마법을 분석하고 있다고. 유산이 시동될 때의 공명을 마도구에 저장할 거다. 시기는 하루라도 빠른 게 좋아. 언제쯤 가능하지?”

언제쯤 가능하냐면……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되살아난 이래 처음으로, 온 세상이 내가 감당하기 힘든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과연 미룬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루와는 고작 세 번의 만남이 남았고, 나타샤는 메피스토에게 먹혀 가고 있으며, 내 몸은 시한폭탄이 되었다.

여기서 더 최악인 상황은 존재할 수 없다.

“준비를 마치고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만나지.”

불완전하더라도, 결국 때는 왔다.

디안 케트의 유산을 시동할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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