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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68화 (168/195)

168화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사막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디 보자, 내가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됐더라?

“아마 <죽지 마세요, 애쉬>라고 했던 것…….”

아.

“제길.”

그래, 유산이 시동됐지? 그런데 왜 이런 사막에 떨어진 걸까? 심지어 육신이나 영혼이 건강하게 치유된 느낌도 아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시 본래 데이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점뿐.

“설마 지금 나 꿈을 꾸는 건가?”

“여긴 꿈속이 아니야.”

헉.

“까, 깜짝이야!”

나는 등 뒤에 우두커니 선 루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라고?

“그럼 넌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데?”

“꿈이 아닐 뿐, 이곳은 네 내면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의미였구나.

‘내면이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모래 언덕 저 너머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대로 ……하겠습니다.]

돌아본 그곳에는 벽이 존재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벽이.

[……아가씨, 괜찮…….]

아가씨?

다시 루를 쳐다봤다. 일전에 꿈에서 만났을 때처럼 속이 답답할 정도로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루한테는 저 소리가 안 들리나 본데.’

뭔가 수상하다.

“루, 저 벽으로 가자.”

“그래야 하는 이유는?”

누가 루의 이성 아니랄까 봐, 이유 하나를 시시콜콜 따지고 든다.

“저쪽에서 어렴풋하게 사람 목소리가 들려. 어쩌면 디안 케트의 부름일 수도 있잖아.”

내 말에 대충 긍정하는 루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왼손을 내밀었다.

“손.”

뚱한 표정으로 내 손을 쳐다보던 그가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저 시큰둥한 눈 좀 봐.’

정말 못 봐 주겠네. 어쩐지 심술 나는 기분이라, 이번에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요구했다.

“업어 줘.”

이것 봐라. 이번에는 내키지 않는 티를 낸다. 그래도 감정이 완전하게 배제된 상태는 아닌 건가.

싫은 티를 냈어도 루는 내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등에 업힌 채로 느긋하게 사막을 횡단했다.

그래도 장점은 하나 있네.

‘사람이 아닌 이성의 존재라 자각하고 있어서인지, 진짜 루를 대할 때보다 마음이 더 편해.’

흐음.

“루, 날 주인님이라고 불러 봐.”

“그런 날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 텐데.”

쓸데없는 부분까지 이성적이네.

“그런데, 이건 세 번의 만남으로 안 칠 거지?”

“제외해야 하는 이유는 없어.”

아, 진짜 쓸데없이 이성적이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건 꿈도 아니라며? 그럼 그 빌어먹을 이별 연습인지 뭔지에는 포함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만난 건 만난 거야.”

“잘 들어, 루. 네 주장은 비논리적이야. 생각해 봐. 다음에도, 다음의 다음에도, 다음의 다음의 다음에도 우리가 여기서 만나게 되면 어쩔 건데? 세 번의 만남이 다 이루어졌으니까 날 이 사막에 홀라당 버리고 혼자 떠나 버릴 거야?”

그의 말문이 막혔다. 이때다 싶어 더 몰아붙였다.

“루가 그러라고 너를 내게 남겼어? 아니잖아. 날 돌봐 주라고, 슬퍼하게 만들지 말라고 남긴 거잖아. 너 날 여기서 굶어 죽게 내버려 두고 홀라당 가 버릴 거야? 그럴 거냐고.”

계속 묵묵부답인 그가 답답해, 어깨 한쪽을 콱 하고 깨물었다

“드답해!”

“……네 말대로 할 테니 어깨 놔.”

좋아, 계속 그렇게 순순히 굴란 말이야. 난 잇자국이 난 피부를 뺨으로 슥슥 문질러 보듬었다.

“그렇게 좋은 건가?”

“응.”

“어째서?”

“그야, 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니까.”

“…….”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

“세상에서 제일로 좋아해.”

홀린 듯 말하면서도 입 안이 썼다.

정작 루가 내 옆에 있을 때는 못 했던 말들인데. 더 자주 내 마음을 표현할걸. 꼭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벽 안에 웬 그림이, 아니,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현실이 아니라서 그런가, 별꼴을 다 보네.’

벽 정중앙에 보이는 인물은 고위층의 자제로 보이는 소녀였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소녀의 곁으로 하녀가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 세레니예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세레니예.

익숙한 이름이다. 소녀는 대번 우울해진 낯으로 방을 나섰다.

이후로는 소녀의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세레니예 가주로 보이는 아버지를 만나고, 식사하고, 요상한 약물을 섞다가 잠드는…….

뭐, 이 이상한 벽은 둘째 치고.

“저 애는 누구지?”

“디안 케트.”

……뭐?

누구라고?

“거짓말이지? 지금 저 소녀가 디안 케트라는 거야? 하지만 여자인데? 게다가 분명 세레니예라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루는 차분히 답했다.

“저 지역의 전통이다. 한 세대에 열 명 이상의 아이를 낳고, 그중 몸이 약한 아이는 18세가 되기 전까지 정반대의 성별로 키워져. 악마가 아이를 잡아가지 못하도록 눈속임하려는 의도로.”

“악마?”

“세레니예 가문이 다산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릴 때 죽기 때문이었어.”

그 또한 악습에 따른 폐해였지. 루가 짧게 덧붙였다.

“살아남았더라도 그 일부는 평생 병든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 사람들은 그 병을 악마의 저주로 여겨서 아이들을 보호하려 한 거야.”

그럼 디안의 실제 성은 케트가 아니라 세레니예였던 건가.

다시 벽을 바라봤다. 가족 간의 저녁 식사 자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다지 단란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콜록, 콜록.]

디안은 종종 마른기침을 했다.

이렇게 보니 그는 확실히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다. 두꺼운 겨울용 여성 의복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어깨의 넓이라든지, 손가락의 골격이라든지.

나는 식탁을 살폈다. 디안의 형제는 총 여섯 명이었는데, 디안은 그중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확실히 저 나이대치고 많이 왜소하네. 신장도 작은 데다, 안색도 좋은 편은 아니야.’

상석에 앉은 디안의 아버지, 세레니예 가주가 술을 들이켜며 디안을 불렀다.

[곧 ‘그 노예’가 네게 보내질 것이다. 기억하고 있겠지?]

[예…….]

[준비에 차질 없도록 해라.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 줄 아주 귀중한 노예이니. 알겠느냐?]

[예.]

디안은 몹시 얌전한 소년이었다.

가족 간의 대화도 적었고, 식사량은 더 적었으며 감정 표현은 없다시피 했다.

그가 웃는 순간은 침실에서 키우는 새끼 매를 상대할 때가 전부였다.

[나는 괜찮아, 애쉬. 싫어도 어쩌겠어. 내가 해야 하는 일인걸.]

‘저게 그 애쉬구나!’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을 지은 디안이 새끼 매의 부리를 살살 쓸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맞는 걸까? 나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독약을 제조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

[빼애액!]

[맞아, 이런 자문은 의미 없지. 나는 당장 저 겨울 숲도 지나가지 못할 만큼 약해 빠졌으니까.]

그의 메마른 시선이 창밖의 눈 쌓인 숲으로 향했다.

[걱정이네, 애쉬. 내가 한 달 동안 ‘그 노예’를 잘 관리할 수 있을까? 하하. 굉장히 거칠다는데…… 자신 없어.]

여러모로 짠한 광경이다.

대체 뭐 하는 집안이기에 저 나이대 소년이 사람을 죽인다는 둥 독약을 만든다는 둥 하게 만드는 걸까?

‘세레니예라. 나는 그저 루가 관리하는 가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궁금한 점은 또 있었다.

‘언제까지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디안 케트의 유산은…… 그냥 디안 본인의 과거를 보여 주는 용도인 건가?

그때였다.

[하아, 하아…….]

디안이 돌연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랗다. 손끝과 입술은 희게 질렸고, 전신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면서 바닥에 풀썩 쓰러져야 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당황한 나는 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디안의 상태를 살폈다.

[누가, 누가 제발 도와줘……!]

그의 울음이 내게 닿은 순간.

두근…….

두근…….

왼쪽 가슴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디안의 죽음에 반응한 것일까? 심장이 아주 크게 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큰 울림은 어느 순간 강대한 공명을 만들었다.

돌연 내 심장께에서 하얀 줄이 솟아났다. 기다란 줄은 동그랗게 말리기 시작하더니, 곧 하나의 거대한 구를 만들어 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조각조각 깨진 구슬의 틈을 흰 안개가 가득 채운 형태였다.

“이건…… 내 영혼이잖아?”

나는 두 손을 뻗어, 살아 있는 심장처럼 거세게 뛰는 영혼을 쥐었다.

그 순간.

영혼의 형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새로운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안개는 깨진 구슬이 되었고 깨진 구슬은 안개가 되었다.

이제, 깨진 것은 디안 케트의 영혼이었으며.

깨진 영혼을 뒷받침하는 것은 나의 영혼이었다.

‘이게 왜……?’

나는 다시 벽 속을 응시했다.

죽어 가는 디안.

그런 디안을 주시하는 나.

그리고 우리를 잇는 것은…….

“영혼.”

우우우웅.

벽에 새까만 늪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확장된 늪은 믿기지 않는 속도로 내 영혼과 육체를 빨아 당겼다. 뭐야 이거!

“루!”

루가 다급히 내 팔을 붙들었지만, 끝내 늪의 힘을 이겨 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나는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구역질이 치민다.

그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누워 있던 침실에서 깨어나며 맨 처음 든 감상이었다.

전신이 욱신거렸다. 아주 천천히 눈을 뜨자, 창 너머로 떨어지는 흐릿한 햇빛이 보였다.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침대의 감촉, 천장의 구조, 하물며 공기까지도…….

“……아가씨?”

심지어는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낯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맡에 경악 어린 표정을 한 하녀가 보였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가린 하녀는 이내 곧 비명을 내지르며 침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세상에, 디, 디안 아가씨가! 아가씨가 깨어나셨습니다!”

디안 아가씨.

‘내가 디안 아가씨였나……?’

아니, 나는 디안이 아니다.

나는 데이지 웨더우즈.

태어날 때는 애쉬였고 과거에는 영웅이었으며 한때는 하녀였지만 지금은 웨더우즈 자작인 미혼 여성.

그런 내가 어째서 디안 아가씨라고 불리는 걸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모르겠어.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나, X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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