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루를 상대할 때마다, 나는 내가 말주변이 없단 사실을 처절히 실감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큰 경악을 느꼈다.
‘어, 어떻게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야?’
이상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눈으로 루를 보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다만 제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루가 대단하게 다가올 뿐이다. 나 스스로가 겁쟁이처럼 느껴질 만큼.
솔직함은 결국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게 유리한 감정만 내보인다면, 상대도 나를 속단하기 힘들 테니까.
루가 제아무리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여도, 멱살을 흔들며 ‘네 진심을 말해!’라 외치지 못했던 것 역시……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이해하는 까닭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데이지. 설마 심장이 터져서 죽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 가슴께에 귀를 댄 채 장난스레 속삭이는 루의 얼굴을 밀어 냈다.
감정을 숨기면 뭐 하겠는가?
심장은 숨길 수가 없는데!
“내가 그렇게 좋으면 계속 내 옆에 머물든가! 칼레파로 안 갔으면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아스트로사 왕국.”
“……그 먼 곳을 다녀왔다고?”
“소생 실험에 관한 옛 금서를 살짝 뒤졌지. 그래 봤자 고작 150년 전의 기록이지만.”
흥분으로 살짝 달아올라 있던 체온이 서서히 식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몸을 바짝 붙이는 것뿐이었지만) 루에게 물었다.
“뭘 확인했어?”
“말 그대로 소생 실험의 전말. 쉽게 표현해서 마귀라고 해야 할까?”
마귀?
순간, 유명한 가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10년간 마도 전쟁에 참전한 너라면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겠군. 마귀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배열된 존재야. 인간의 시체를 재활용해서 만든 언데드지.”
역시 그랬던 건가.
마귀가 변형된 인간이란 가설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널리 퍼진 가설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루가 밝힌 진실은 마냥 놀랍지 않았다.
“기원은 그리 멀지 않아. 마귀의 첫 기록은 150년 전 북대륙에서 일어난 로궤교 내란에서 시작되지. 당시 로궤는 아스트로사 왕국을 거대한 소생 실험의 무대로 삼고 있었거든.”
담백한 어투였으나, 그 어투가 담아내는 내용은 마도 전쟁 못지않게 끔찍했다.
“기록에 따르면 소생 실험에 실패한 몇몇 시체가 마치 산 사람처럼 움직였다더군. 살아난 시체는 아주 낮은 지능을 지녔고, 실험 에너지로 활용된 마의 의지를 따랐다고 해. 한마디로…… 시체로 꾸려진 군대, 마귀 군대를 만들 수 있게 된 거야.”
“…….”
“로궤는 마귀의 군대로 대륙 통일 꿈꾸었지만, 실패했지. 나한테 쥐어 터졌거든. 이후 소생 실험과 관련된 기록들은 전부 금서로 지정되어 폐기되었어.”
“그럼 메피스토는……?”
“어디선가 그 금서를 습득해서 군대를 일으켰겠지. 본디 벽을 넘기 위한 소생 실험이었겠지만…… 욕망은 끊임없이 살집을 부풀리는 법이니까.”
불현듯 전시에 지겹도록 마주한 마귀들의 외형이 떠올랐다.
녹아내린 살점과 코끝을 자극하는 악취. 그래, 전부 죽은 이의 흔적이었다. 우리는 죽은 사람과 싸우고 있던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이자 연인이며 친구였을 이들과.
……그렇다면, 나는 학살을 저지른 건가?
깊게 심호흡하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흔들리지 마. 깊게 생각해서는 안 돼. 마귀를 벤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당장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뿐이다.
마음을 다잡고 루를 쳐다봤다. 마주한 시선에서 내 결의를 엿본 것일까?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루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어깨에 난 상처 깊숙이 내 손끝을 박아 넣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달된다. 나는 숨을 집어삼키며 발버둥 쳤다.
“이게 무슨……!”
“기억해, 데이지. 이 기운이 바로 메피스토의 힘이야. 마귀를 조종하는 에너지의 원천.”
순간, 나는 격렬히 거부하던 몸짓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힘의 파동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게…… 메피스토의 힘.’
거북하지만 묘하게 익숙하다. 날 죽인 원수의 힘이어서 그런 거겠지.
그제야, 루가 사냥제에서 이런 깊은 상처를 감내한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마귀를 조종하는 에너지의 근원을 밝히고, 내게 그 에너지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처는 사냥제의 마귀가 낸 상처.’
사냥제의 마귀.
그 마귀가 낸 상처에서 풍기는 메피스토의 기운.
‘어제 그 마귀들. 역시 메피스토의 심장으로 탄생된 마귀였어.’
황실에서 만들어 낸 마귀가 맞았던 거야. 그렇다면 그 시체들은…… <베리드 렛>이 수거해 간 전우들일까?
“확인되지 않은 사안을 미리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행위가 없지.”
루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반듯하면서도 확실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괜한 우려로 집중도가 흐려지면 판단력까지 저하된다. 그건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야, 데이지. 안 그래?”
“……그렇지.”
흔들리지 말자.
나는 루의 조언을 되새기며, 멍하니 시계를 올려다봤다.
연회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1시간 남짓. 예정된 일정을 실행할 때였다.
“루, 괜찮다면 함께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
루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루와 함께 타운 하우스를 나와 마차에 올랐다. 번화가는 사냥제 축제를 즐기는 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고, 그래서인지 우리가 탄 마차는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15분가량이 흘러서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대극장 앞이었다.
제도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한 대극장답게, 외관과 내부 모두 바로 어제 완공한 것처럼 깔끔했다.
이 극장의 소유주가 누구냐고? 모른다. 나는 그저 웍호드 자작 부인을 통해 적절한 값을 지불하고 대관했을 뿐이다.
“……어디냐고 안 물어봐?”
“극장 간판이 건물 앞에 대놓고 달려 있던데.”
“내 말은 왜 이런 곳에 왔는지 안 묻느냐는 뜻이었어.”
“이유가 있겠지.”
날 위한 관용이란 걸 알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관용이 미워졌다.
아닌가? 외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원래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라고 하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지배인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라갈에서 가장 넓은 오페라 극장이었다. 육중한 문이 닫힌 후 나를 루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텅 빈 관객석의 풍경이, 내게는 몹시도 불안하고 낯설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저지른 일을 무를 수도 없는 법.
“흠흠.”
이 순간만큼은, 루가 그러했듯 나 역시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여기가…… 무도회장이라고 생각해 줘.”
루의 눈이 얇아졌다.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곳에 끌고 왔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루도 눈치채지 못하는 게 있구나. 새삼 내가 얼마나 뜬금없고 매너 없는 행위를 저지른 건지 실감됐다.
“물론 힘들다는 걸 알아. 고작 극장의 무대 따위가 황성에서 여는 무도회에 비할 바겠어? 샹들리에도, 노래도, 음식도 없는데.”
아니, 아니지. 이 장소를 너무 깎아내리지 말자. 내 얼굴에 똥칠하는 것밖에 더 돼?
이 장소는 내 나름 최선의 대비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선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신과 첫 춤을 추고 싶어서. 그래서 온 거야.”
나는 이곳에 춤을 추러 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루와.
연회에서 가장 의미 있다는 첫 춤을.
“사실, 사냥제 연회의 첫 춤 상대는 이미 결정됐어. 예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과 추게 될 거야.”
나는 차마 루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서,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뜨린 채 뒷말을 이었다.
“나는 첫 춤의 의미 같은 거 크게 상관 안 해. 타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관심 없으니까. 그런 건 내 삶에서 가장 쓸데없는 요소 중 하나였거든.”
“…….”
“그런데 그 타인이 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바뀌더라고. 남들은 몰라도…… 루가 오해하는 건 싫어.”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하고 싶다.
또한 단언컨대, 내 행복에는 이 남자가 필요하다.
무대 앞쪽에 서 있던 루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혹여나 내 말을 비웃지 않을까 싶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검은 구두는 내 앞에서 멈추었고 이내 곧 내려온 흰 손이 다정하게 허락을 구했다.
“당신과 첫 춤을 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웨더우즈?”
무슨 정신으로 수락했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고 있었고, 내 손은 그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춤을 출 때는 상대의 얼굴을 봐야지.”
아주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나와 첫 춤을 추는 상대는 더 이상 세레니예 백작이 아니었다. 루였다.
루는, 웃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아름답게 웃은 그가 첫발을 내디딘 순간. 들릴 리 없는 무도회 연주가 시작되었다.
고요했던 공간에 음악이 채워지자 텅 빈 극장의 어둠은 저 멀리 물러가고, 천장에서 진주색의 달빛이 떨어졌다.
단단한 나무 바닥은 이따금 모래사장으로 뒤바뀌었다. 하지만 우리의 발은 힘없이 푹푹 꺼지지 않았다. 그와 나는 모래를 밟고, 파도 위를 거닐다가 새하얗게 부서지는 바다 위에서 춤을 추었다. 퀸 섬에서 보았던 익숙한 오색의 은하수가 하늘에 펼쳐졌다. 그와 함께 올려다봤던 밤하늘이…….
어느샌가 나는 입꼬리가 다 아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반대로 루는,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차분해진 분위기였다.
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역시 칼레파에 가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
“……나는 걱정돼. 당신이 말했잖아. 칼레파에서 안식을 취하지 않으면 무게 추가 기운다고.”
“맞아. 하지만 무게 추가 기울어질수록 네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여. 그리고 불필요한 사념도 많아지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닌데. 이상하게 나쁘지만은 않아.”
“괜찮은 거야?”
“괜찮지. 아마도. 한데 어떤 사념이냐고는 안 묻나?”
“꼭 물어야 해? 또 사람 난감하게 만들 소리나 할 거면서. 아, 아파! 어딜 깨물어!”
“손가락. 클 만큼 큰 주제에 뭘 먹고 그렇게 귀여운 거야?”
“날 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건 당신밖에 없어!”
“당연히 그래야지. 또 누구한테 귀여워 보이려고? 리웨인 웍호드? 아니면 라파엘로 제나일?”
“왜 자꾸 그 이름들이 나오는 건데? 루는 내, 내가 그렇게 좋아?”
“아무렴. 아. 안 그래도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방금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려고?”
“너를 보면 이가 간지러워.”
“뭐?”
“잘근잘근 깨물어서 씹어 넘기고 싶어. 약해서 그런가? 내 배 속이 이 험악한 세상보다 안전하긴 하지.”
“나는 안 약해.”
“약해. 약해서 불안해. 너를 보면 이가 간지럽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모든 게 비효율적이고…….”
“……”
“너를 영원히 내 안에 가두고 싶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도, 거부당할까 두려워하는 표정도 모두 나만 볼 수 있도록.”
“…….”
“이런 나를 두고 죽어 버리면 네 사지를 전부 씹어서 삼켜 버릴 거야.”
“…….”
“이런 욕심이 사랑일 리 없겠지, 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