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화장대 위에 고이 놓여 있던 캐러멜 한 조각을 입에 쏘옥 집어넣은 세레니예 백작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그건 상당히 놀라운 진실인걸.”
“검성이 맞아. 확실해.”
벌어진 내 입 안으로 다른 캐러멜 조각이 던져졌다. 나는 소름 끼치는 달콤함을 혀로 이리저리 굴리며 뒷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했거든.”
“천천히 말하게. 잘못하다가는 혀까지 씹겠군.”
그는 창가 탁상 옆에 자리한 의자를 내 옆에 내려놓은 후 물었다.
“언제인지 기억하나?”
“대강. 자는 도중 몰래 먹였다면 죽을 때까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추측되는 날은 하루밖에 없어.”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널 살피고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몰래 먹여?”
“불가능한 건 아니지. 칼레파로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며?”
세레니예 백작은 입을 다문 채 의자에 포옥 앉았다. 이어서 몹시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싸 안았고, 가방이라도 옮기듯 가볍게 들어 제 다리 위에 앉혔다. 고작 한쪽 팔의 힘으로.
“어땠는지 말해 보게.”
이거 하녀장이 신경 써서 관리하던 드레스인데.
쓸데없이 주름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레니예 백작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라 대충 몸을 맡기며 그날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그날은 내가 메피스토의 성에 숨어들어 가기로 결정된 날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기로 한 날.
모든 지휘관의 동의를 받은 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직전. 나는 일부 전우로부터 정제된 <자애초> 알약을 선물 받았다.
<자애초>는 진통제로써의 능력이 탁월해서 잘만 사용하면 위기 시 기사회생이 가능하다.
그나마도 보급이 끊긴 상태라, 내게 모인 <자애초>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다. 연합군은 연합군 나름대로 내게 최후의 수를 맡긴 셈이다.
검성은 내가 귀중한 보급품을 털고 이제 막 몸을 풀기 시작할 즈음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나는 그가 던진 한없이 작고 가벼워 보이는 물건을 반사적으로 받아 냈는데, 동그랗고 투박한 알약이었다.
“이게 뭡니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약.”
뭐? 의도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시 돌려주기 위해서 자세를 잡는데, 검성이 어울리지 않게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농담이다. 군에서 사용하는 자애초와 똑같은 약이야. 다만 순도가 조금 높지. 고통을 더 효과적으로 줄여 줄 거다.”
“진짜입니까?”
“의심스러우면 열어서 확인해 봐.”
애초 <자애초>는 무색무취의 마약이다. 나 같은 문외한이 구분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충 냄새 정도만 맡다가 특별한 점이 없어 보여 주머니 안에 구겨 넣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고통 없이 세상을 뜨겠네요.”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을 내 앞에서는 항상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그야 공작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덕분에 편합니다.”
검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치다가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 편하면 나와 맹세나 하나 나누지, 안데르트 경.”
“……그 마법이 불법인 건 알고 계시겠죠? 너무 당당하셔서 누가 들으면 합법인 줄 알겠네요. 한데 이제 와 무슨 맹세를 나누자는 말씀이십니까?”
“살아남겠다는 맹세.”
이번에는 이쪽이 어처구니없었다.
살아남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불가능한 맹세를 요구하다니. 그답지 않게 감상에라도 젖은 건가?
“싫습니다. 그건 너무 끔찍하잖습니까? 제 육체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불태워 버리겠다는 뜻인데요.”
“비약이 심하군. 나는 단지 그대가 무사 귀환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맹세를 새겨서 맹세가 깨지면 영혼도 함께 깨지죠.”
“그러니 더더욱 내 맹세를 거절할 필요가 없는 거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깨지는 법. 그대가 죽어서 영혼이 깨지는 거지, 맹세를 어겨서 그대의 영혼이 깨지는 게 아니야.”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더니, 이번 역시 평소 같지 않게 고집불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료의 죽음이 주는 고통을 잘 안다. 그래서일까? 문득, 고작 이런 맹세 따위로 검성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검성과 맹세를 나누었다.
살아남겠다는 맹세를.
여기서 중요한 건 당시 그와 나눈 맹세가 아니다.
“그러니까…… <자애초>라 생각했던 그 알약이 실상은 디안 케트의 심장이었을 거다?”
“응. 그런데 내가 아는 심장 결정석처럼 매끈한 진주 형태가 아니라 더 작고 투박한 형태였어.”
“그건 가공되기 전, 가장 원형에 가까운 심장 결정석의 형태다. 하기야 디안 케트가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메피스토가 배신했으니…… 가공될 여유도 없었겠어.”
“그렇다면 확실해. 역시 검성은 심장 결정석의 힘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
“글쎄.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심장의 성능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가설에 무게가 실리는데.”
“어째서?”
그는 대답 대신 내 한쪽 어깨 근처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자와 나눈 맹세의 흔적이…… 아마 이쯤에 새겨져 있었나?”
뜯어내고 싶다는 듯, 얇은 의복 위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 대던 세레니예 백작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네가 살아 있다는 흔적을 항시 몸에 단 꼴이군. 건방지게.”
그 무슨 아리송한 말이야?
“……아!”
미간을 한껏 구기고 있던 나는 뒤늦게 숨겨진 뜻을 이해했다.
‘맹세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건, 다른 말로는 맹세가 깨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흔적 그 자체가 나의 생존을 뜻하게 되지 않은가?
검성은 그래서 내 생존의 ‘가능성’을 봤던 거야. 우리가 나눈 맹세의 흔적이 여전히 선명했으므로.
이제 막 깨달은 새로운 사실에 놀라, 편히 기대고 있던 등을 일자로 쭈욱 폈을 때였다.
“윽.”
뒤통수 쪽에서 고통에 찬 짧은 신음이 들려왔다.
루라는 존재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신음이라, 심장이 철렁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통증을 참느라 살짝 감긴 눈이었다. 이후, 등을 펼 때 머리를 살짝 찧었던 어깨가 보였다.
그의 어깨와 팔 전체는 단단히 고정된 상태였다. 미모에 온 신경이 쏠려, 한쪽 팔을 받치고 있던 붕대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루, 그 어깨 아직도 치료하지 않은 거야?”
가열하게 굴러가던 머리가 빠르게 식었다.
기분도 덩달아 우울해졌다. 눈치도 없이 환자의 다리에 앉아 있었구나 싶어 빠르게 일어서려는데, 세레니예 백작의 성한 팔이 내 허리를 강하게 옭아맸다.
“생각보다 그리 깊지 않아. 일곱 바늘 꿰맨 수준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답 없는 루의 행태가 수상하다.
그는 나처럼 불리할 때 입을 닫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영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불리해서?
“설마…… 못 하는 건 아니지?”
의문을 뱉기 무섭게 정답임을 확신했다.
순간, 심장 안쪽으로 강렬히 퍼진 불안감에 이성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루가 환자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그의 멋들어진 연미복을 강하게 그러쥐며 물었다.
“정말? 정말 못 하는 거야? 어째서?”
루는 흥분하는 내 몸을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다독였다.
“쉬이. 진정해. 무리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야.”
“그게 왜 무리가 되는데? 균형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렇지? 분명 칼레파에 다녀온다고…….”
“안 갔어.”
안 갔다니?
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는 흔들림 하나 없이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또 왜냐고 물을 것 같으니 미리 답해 두지.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
“가고 싶지 않았어.”
루는 차분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차마 그 얼굴에 대고 또다시 ‘왜’냐고 묻지 못했다. 마주하는 루의 얼굴에 변명이 아닌 순수한 진심만이 담겨 있었던 까닭이다.
불현듯 따스한 온기가 내 이마에 닿았다.
루의 이마였다. 사냥제에서 보았던 그 눈. 온전한 애정과 신뢰가 담긴 눈이, 거칠어진 내 호흡을 부드럽게 보듬으며 속삭였다.
“지금 내가 뭘 느끼고 있는 줄 알아, 데이지?”
천천히 깜빡인 은색 속눈썹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래, 떨렸다. 루의 속눈썹이 겁을 집어먹은 듯…… 혹은 주체 못 할 격렬한 태풍이 휘몰아치듯 고요히 동요했다.
“네가 미친 듯이 사랑스러워.”
루의 손가락이 내 눈가에 닿았다.
“내 고통을 분담하고 싶어 하는 이 눈이.”
그다음에는 콧등에.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이 코가.”
그다음에는 입가에.
“작은 앞니로 잘근잘근 씹어 대는 이 입술이…… 한입에 삼키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고.”
마지막으로는 내 심장에.
“그러니까 나는 후회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