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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45화 (145/195)

145화

쉽사리 입을 열기 힘들었다.

루의 입에서 들려온 ‘사랑’이라는 단어가 몹시 낯설뿐더러, 또 마냥 가볍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루는 감정을 명확히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건가?’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감정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기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날 보면 이가 간지럽다는데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고민 끝에 가장 솔직한 마음을 담아 전달했다.

“나에게는 마치 고백처럼 들려.”

그러니까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그 언저리쯤은 되지 않으려나. 나름 명답이라 생각했는데,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는 투의 반문이 들려왔다.

“널 씹어 먹고 싶다는 소리가?”

“정말로 씹어 먹을 건 아니잖아.”

“정말로 씹어 먹을 수도 있지.”

그러지 마. 진짜 그럴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으면 불쾌했을 거야. 하지만 루라서 괜찮다는 뜻이야.”

“그럼 너는 날 어떻게 하고 싶지?”

“나?”

나는…….

분명, 루를 향한 내 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고 싶느냐’는 질문에는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딴에는 ‘그냥 너와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같은 답도 진심이라지만, ‘그런 건 가족과도 할 수 있잖아?’라는 반문을 받으면 할 말이 없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하필 그와 몸을 밀착한 상태라 그런지 여우 꼬리처럼 요사한 입술이 너무나 잘 보였다. 아니, 잘 보이는 것으로 모자라 그것밖에 안 보인다.

입술밖에 안 보여.

“데이지.”

황성에서 재회했을 때, 내 윗입술을 스치듯 지나갔던 온기가 떠올랐다.

그건 루의 의식적인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우연? 실수? 그도 신기루처럼 맞닿았던 입술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

“이?”

“이, 입 맞추고 싶어.”

이게 다 루 때문이다.

루의 솔직담백한 태도가 내게 전에 없던 용기를 심어 줘서 이런 거야. 사람도 씹어 먹는다는데 입술쯤이야 별것 아니지, 하는 인식을 심어 줘서 그런 거라고. 하여간 다 루 때문이야!

루는 굳었다.

말 그대로 굳었다. 무대 위 한가운데 덩그러니. 덕분에 나도 같이 굳었다. ‘아무리 내가 널 좋아한대도 입술은 아닌 것 같다’는 답이 들려올까 두려워, 함부로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어졌다.

이윽고 긴 한숨을 뱉은 루가 내 어깨를 붙잡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무언가 가늠하듯, 긴 손가락으로 내 몸을 톡톡 두드리다가 품 안 가득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으스러질 만큼 아주 세게.

“윽. 아파!”

“조금 아파도 돼. ……빌어먹을, 미쳤어? 예고도 없이 왜 그런 소리를 해?”

“아, 아프다니까?”

“입맞춤은 안 돼. 그리고 앞으로는 내 앞에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뭐? 안 된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앞으로 언급조차 말라고?

루의 품에서 한참 버둥대던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길 포기하고 반쯤 오기가 섞인 서운함을 담아 외쳤다.

“왜 안 돼!”

“안 되니까.”

“그러니까 왜?”

“곤란해져.”

“누가?”

“네가.”

그때, 나를 가두고 있던 팔 힘이 스르륵 풀렸다. 이때다 싶어 몸을 떼고 올려다본 루의 얼굴은 아주 복잡한 감정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재차 한숨을 내쉬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니, 내가…… 못 참을 것 같다는 뜻이야. 여러모로.”

나도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이다.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서운함이 눈 녹듯 녹아 버림과 동시에, 어쨌든 루가 내 입맞춤 요구를 거절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신경질적이게 비난했다.

“변태야?”

“아니.”

못마땅한 기색으로 표정을 구긴 루가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

“맞나?”

그사이 루 앞으로 다가가, 저 높이 달린 파란색 머리를 끌어내려 입 맞추고 도망갔다.

하지만 도주는 짧았다.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한 채 손목이 붙잡혀 버린 것이다.

“자, 잠깐만!”

“뭐가 잠깐이야? 이리 와. 아직 곡 안 끝났어. 너는 쓴맛을 봐야 해.”

루는 벗어나려는 날 아예 둘러업기까지 해서 무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날 안아 든 채 저 홀로 춤추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짓 그만두라고 외쳤지만 루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멋대로 흔들리는 몸과, 시시때때로 머리를 후려치는 어지럼이 너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한참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와 드레스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아무렴 어때.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 * *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 의복과 머리를 재단장한 후, 곧장 황성으로 이동했다.

연회장에 미리 도착해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는지 황성 앞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세레니예 백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차했을 때, 저 멀리에서부터 꽂혀 온 수십 쌍의 눈길이 끈덕지게 뒤따랐다.

“이번에는 세레니예 백작이로군요.”

“설마 딸자식까지 있는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을 줄이야.”

“정말 대단한 여자네요. 여러 의미에서요.”

“잠시만요. 이 비난은 잘못됐어요. 웨더우즈 자작은 세레니예 백작의 은인이에요. 아직 성치 않은 저 어깨를 보세요. 게다가 웨더우즈 자작은 혼기가 한참 지났는데 미혼이고, 반대로 세레니예 백작은 슬하에 딸 하나를 둔 환부(아내를 잃고 혼자 지내는 사내)이니 이상하게 볼 것도 없지요.”

“흐음. 백작 부인의 말도 옳습니다. 웨더우즈 자작의 첫 춤 상대가 기대되는군요. 그 상대가 세레니예 백작이라면, 부인의 말대로 순수한 인연으로 보는 게 옳겠죠.”

연회장 입구에는 리웨인이 서 있었다. 홀로 서 있는 걸 봐선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은 듯했다.

우리의 조합이 퍽 놀라웠던 것일까? 리웨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채 걸어왔다.

“자작님.”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짧게 입 맞춘 그가 내게 속삭였다.

“노란 손수건을 걸어 두셨기에 라파엘로 공작님과 오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

리웨인은 의아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면 선착순이었던 겁니까?”

“내 에스코트를 해 줄 신사 말하는 거야? 아니.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골랐어.”

내 대답이 리웨인의 심정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나 보다. 표정이 더 기묘하게 일그러진 걸 보면.

우리 사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세레니예 백작이 비소에 가까운 미소를 걸치며 끼어들었다.

“젊은 리웨인 경은 나 같은 중년이 웨더우즈 자작의 눈에 띈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군.”

“아닙니다. 그리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대놓고 말하던걸. 젊은 리웨인 경은 우리 웨더우즈 자작에게 다른 볼일이 있나?”

“어머니께 자작님을 모시란 명을 받았습니다.”

“아하.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젊고 착한 리웨인 경. 경의 자리를 빼앗아서 미안하게 됐네. 어머니께서 많이 실망하시겠어.”

세레니예 백작은 나와 웍호드 가문 사이의 거래를 알고 있다. 내게 리웨인의 몸값을 불려 줄 의무가 있는 터라, 셋이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말도 이미 전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빈정거리다니.’

그를 탓하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리웨인을 반대쪽 옆으로 이끌었다. 세레니예 백작은 리웨인이 내 옆에 서기 무섭게 감탄을 터트렸다.

“이런. 우리 웨더우즈 자작께선 두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는 쪽으로 선택하신 건가?”

리웨인이 대답했다.

“아스트로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펜 로타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주로 성숙한 여성이 숫기 없는 친우나 친척을 주변에 소개하고 다닐 때 함께 움직이죠.”

“젊고 착한 리웨인 경은 우리 웨더우즈 자작의 친척이 아니니, 아무래도 숫기 없는 쪽인가 보군. 내가 잘 돌봐 줄 테니 걱정 말게.”

분명 가운데에 선 건 나인데. 왜 나만 빼고 대화하는 느낌인 걸까.

“아. 그런데 경은 안 쪽팔리나? 파트너 자리에 비집고 들어오는 신세인데.”

리웨인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저도 아쉽게 생각합니다. 웨더우즈 자작님께서 인품이 훌륭하고, 더 젊으며, 슬하에 아이를 두지 않은 미혼 남성분과 파트너가 되셨다면, 제가 이런 식으로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화났나?”

“황제 폐하의 귀중한 손님께 제가 어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화난 거 같은데.”

이쯤 되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루의 균형이 깨진 건 정말 잘된 일이었을까?

설마 보이는 족족 시비를 걸고 다니려는 건 아니겠지. 벌써부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신분이 아스트로사 백작이며, 그의 권위가 로궤의 칼레파인 사실이 이토록 불안한 날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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