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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42화 (142/195)

142화

사냥 대회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전말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이는 사냥제가 철저히 귀족 가문만으로 구성되었기에 가능했다.

특권층이라는 공통점으로 똘똘 뭉친 이들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안을 세상에 공개하여 불안을 가중할 필요는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날의 비밀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당장 타오를 불씨를 방지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 보였다.

“정말 황실일까?”

내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말리콥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가장 높네. 조사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겐가?”

“응.”

“제대로 조사할지부터가 의문이군.”

“라파엘로가 직접 움직여서 그런 걱정은 들지 않아. 다만 그 또한 조사 결과를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라서.”

애초 결사대 자체가 비밀스럽게 유지되고 있지 않았던가?

라파엘로는 황실의 대응에 불만족스러운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아마 나처럼 황실을 의심하기 때문일 테다.

‘오늘 그에게 조사 결과를 물어봐야겠어.’

그 외에 지금의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없다. 힐끔, 시계를 확인한 직후 말리콥스에게 다른 화제를 던졌다.

“전에 말한 ‘그 물건’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디안 케트가 오래전부터 찾아 헤맸다던 ‘그 물건’.

말리콥스 할아범은 그동안 ‘그 물건’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서 우선 대륙에 뿔뿔이 흩어진 디안 케트의 제자들을 수소문했다.

디안 케트의 유산은 애초 그들에게 내려진 물건이었으니까.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네. 적잖은 시간이 흐른 만큼, 직계 제자분들 모두 타계하신 지 오래더군. 그 핏줄 중 대부분은 디안 케트라는 인물에 관해서도 잘 모르는 느낌이었어. 유일하게 딱 한 명만이 이 말리콥스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가졌었지. 그자에게서 전해 들은 직계 제자분의 유언이 유일한 성과나 마찬가지였네. 다만 떠나기 전 그 집에서 맛봤던 사과 파이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아. 무 맛이 강한 사과였는데…….”

“사과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고. 그 직계 제자가 남긴 유언이라는 게 뭔데?”

“죽지 마세요, 애쉬.”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이 멍했다.

“……그게 뭐야?”

“디안 케트의 유산에 각인된 고대 마법의 명칭이라더군. 아마 다섯 개의 유산을 모두 모으면 발동하는 것 같네.”

“마법의 명칭? ‘죽지 마세요, 애쉬’가?”

“그래.”

마법의 명칭 하나로 디안 케트의 취향과 성격이 보이는 건 왜일까?

“굉장히 특이한 명칭인데? 어감상 치유 효과가 있는 건 확실해 보여.”

“그뿐만이 아니네. 디안 케트 님이 찾아 헤맸던 ‘그 물건’의 정체도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되었어. 애쉬는 아스트로사에서 매우 흔한 인명 중 하나거든”

말리콥스는 마법의 명칭 자체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말하고 있었다.

“그럼 디안 케트가 찾는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 건가? 그가 알고 있을 정도면 엄청 늙거나 죽지 않았을까?”

“그럴 확률이 높겠지. 혹은 애쉬라는 이름을 가진 자의 흔적을 찾으셨던 것일 수도 있고.”

미드윈트리에서 찾을 수 있는 물건.

이름은 애쉬. 사람으로 추정. 죽었을 수도 있음.

이 정도면 디안 케트가 찾는 존재의 범위가 꽤 유의미하게 좁혀졌다.

“할아범. 왜 그동안은 이런 정보를 얻지 못한 거야? 별로 어렵게 찾아낸 것도 아닌 듯한데?”

“허어. 말은 쉽지! 전쟁이 끝난 지 고작 4년일세. 나도 그간 한창 바빴어. 그나마 자작이 웨더우즈 가문의 중심을 잡아 줘서 움직일 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주인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방문을 열고 등장한 이는 하녀장이었다. 그녀는 눈꼬리를 바짝 세운 채 입술 사이로 불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분명 아주 잠깐이면 끝날 대화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약속하신 시간보다 무려 10분을 더 허비하셨어요!”

“허비라고 하지 마. 나름 가문 존속을 위한 중요도 높은 회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죠. 바로 사냥제 연회 준비요! 아직 준비를 덜 마치셨으니 당장 이리로 오세요!”

나는 하녀장에게 질질 끌려가며, 어김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저녁 8시 30분.

그렇다. 오늘은 사냥제 연회가 열리는 날이다. 별로 즐거운 날은 아니니 부가 설명은 넘어가도록 하자.

단장을 위해 침실로 끌려가는 길에는 실내 화분에 물을 주는 진이 보였다.

“안녕, 진. 오늘 기분은 어때?”

휠체어에 앉은 그녀는 며칠 사이 살 오른 뺨을 동그랗게 올리며 웃었다.

“우렁찹니다.”

그래, 다행이네.

하녀장은 나를 화장대 앞에 앉히기 무섭게 대단한 비밀이라도 캐묻는 양 속삭였다.

“주인님. 설마 첫 춤도 리웨인 경과 추는 건 아니시겠죠?”

“춤? 아마 라파엘로와 추게 될 것 같아.”

툭.

내 앞머리를 바짝 뒤로 넘기던 빗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좋은 징조다.

“왜 그래? 불안하게.”

“주인님께서 먼저 요청한 건 아니실 테고…… 제나일 공작 측이 먼저 말을 꺼낸 건가요?”

“응. 왜? 안 돼? 설마 첫 춤을 추면 결혼해야 하는 황법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미간을 두드린 하녀장이 느리게 뒷말을 이었다.

“사교계 데뷔 시, 첫 춤 상대는 보통 가족인 남성이 맡습니다. 매 무도회마다 차례로 가족이 맡다가, 그다음에는 가족의 지인이 맡아요. 어느 순간부터 외간 남성이 맡게 되는데 이때 첫 상대는 아주 신중하게 골라야 해요. 보통 서로 어느 정도 마음을 튼 경우에 상대측에서 제안하거든요. 한마디로 외간 남자와의 첫 춤이란 ‘우리는 서로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다’는 표시죠.”

호감이 있다는 표시라.

그 의미를 되새기며 코를 긁적이다가 하녀장에게 혼쭐이 났다. 나는 간지럼도 세간의 평도 반쯤 포기한 채 대답했다.

“이제 그런 건 됐어. 소문이야 돌 만큼 돌았으니까.”

“그래도 주인님은 이미 장성하신 지 오래고, 사교 활동을 하는 가족도 없으니 여러 변명을 두기 충분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최대한 많은 남자와 추세요.”

그 구두를 신고 최대한 많은 남자와 춤을 추라고? 됐네, 이 사람아.

그보다는 루가 신경 쓰인다. 첫 춤 따위의 속뜻이 그렇게 의미심장해서야. 루를 앞에 두고 라파엘로와 희희낙락 춤출 수는 없잖아?

‘만약을 대비해 수를 써 놓길 잘했네.’

속 좁은 루라면 100퍼센트 만족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은 풀 수 있으리라.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두 명분의 인기척이 현관에서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손님이라면 필시 응접실에서 멈춰야 할 발걸음이었다. 한데 아주 당당한 자태로 내 침실 앞까지 걸어와 방문 인사를 건넨다는 것은.

“음. 에스코트하러 왔네, 웨더우즈 자작. 설마 선약이 있는 건 아니겠지?”

바로 상대가 루, 아니, 세레니예 백작이라는 의미겠지.

세레니예 백작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볼륨 있게 넘긴 윤기 흐르는 은발과 밝은 색 연미복의 조화가 저세상의 균형처럼 훌륭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의 눈부신 미모보다 더 강하게 심장을 치고 지나가는 고민이 존재했으니.

과연 세레니예 백작의 에스코트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냐는 의문.

“당연하지.”

일단 긍정한 나는 눈빛으로 하녀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스코트와 첫 번째 춤은 관련 없겠지?’

하녀장이 답했다.

‘네, 하지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죠.’

나는 다시 급박하게 눈짓했다.

‘문제?’

하녀장은 마주 눈짓을 보내는 대신 크게 헛기침했다.

“흠흠! 주인님, 현관에 노란색 손수건을 걸까요?”

“……갑자기? 그게 뭔데?”

“이 집의 아가씨는 연회장에 함께 갈 파트너가 있다는 표시예요. 노란 손수건이 걸린 집의 여인에게는 에스코트를 신청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 좋은 관례가 있다고?

순간, 머릿속으로 아주 불편한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걸어.”

“네.”

고개를 숙인 하녀장이 총총걸음으로 침실을 나갔다.

그녀가 떠난 후의 빈자리는 세레니예 백작의 특출난 존재감이 채웠다. 수새처럼 한껏 꾸민 세레니예 백작의 자태는 내게도 퍽 어색해서, 거울을 통해서만 힐끔힐끔 살필 때였다.

그에게 전달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안이 떠올랐다.

“맞아, 루! 내게 디안 케트의 심장을 먹인 사람을 알아냈어. 바로 검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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