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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41화 (141/195)

141화

아직 공식적으로 마귀의 출현이 알려지지 않은 건가?

곧 조사를 나간 라파엘로가 서쪽에 즐비한 마귀의 시체들을 발견할 테고, 그렇다면 이 같은 혼란도 곧 정리될 터였다.

‘마귀라.’

설마 그 끔찍했던 전쟁을 다시 반복하게 되지는 않겠지.

마귀가 재출현하게 된 경위, 황실과 검성의 관계, 나타샤 등 고민할 거리가 많아서 그런지 외려 머리가 안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전환할 겸 주위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 점수판 앞에 섰다.

『<1등> 2조 (사냥꾼 : 라파엘로 제나일, 보좌 : 게른 로즈벨) 1,450점

<2등> 1조 (사냥꾼 : 리웨인 웍호드, 보좌 : 데이지 웨더우즈) 1,350점

<3등> 4조 (사냥꾼 : 고트 로즈벨, 보좌 : 에밀리아 로즈벨) 1,000점

<4등> 3조 (사냥꾼 :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보좌 : 케이트 에자넬) 92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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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2등으로 수직 상승. 한데 1,350점이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점수 아닌가.

‘트랩이 아니라 진짜 마귀를 사냥한 것까지 카운팅 됐구나.’

흠. 호재인데.

‘1등이랑 고작 100점 차이. 살짝 아쉬운걸.’

몰래 나가서 트랩 한 개만 더 챙겨 오면…… 안 되겠지?

‘점수를 올릴 만한 다른 방책이 뭐가 있으려나.’

진지한 고심에 빠질 동안, 등 뒤로 소란스러운 잡음이 일었다.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올해 사냥 대회는 현 시점에서 조기 종료입니다. 간략한 조사가 이루어진 후 전원 귀가 명령이 떨어질 예정입니다.”

“이런, 시종장. 진정으로 마귀가 나타났다는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는 겁니까? 트랩에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니까요.”

“한창 사냥을 즐기던 중에 이게 무슨 맥 빠지는 일이란 말입니까?”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으니 사냥을 재개하자는 말까지 나오는구나. 태연자약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꼴을 보니 숲에서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 나쁘지 않은 수가 떠올랐어.’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이제 막 스쳐 지나가려는 시종장을 붙잡았다.

“여기, 이의 제기.”

걸음을 멈춘 시종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문제 있습니까?”

“점수 말인데요. 진짜 마귀를 처치한 경우에는 추가 점수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가짜도 아니고 무려 진짜인데?

거기에 마귀를 처치해서 사람까지 구했으면 인명 구조 점수도 더해야지. 기대에 차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시종장 곁에 서 있던 귀족이 버럭 화를 냈다.

“웨더우즈 자작! 지금은 사냥 점수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부상자가 속출한 와중에 추가 점수를 운운하다니요? 이 상황이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왜 갑자기 발작하며 화내? 마귀가 등장한 상황에서 사냥 재개를 운운하던 게 누군데 그래?

그리고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나 같은 용자를 더 높게 쳐주는 게 도리다. 훌륭한 업적을 이룬 군인에게 상을 내려야 군의 사기도 함께 올라가는 법이니까!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기대를 보기 좋게 빗나갔다.

“눈치도 없군. 진짜 마귀를 본인이 사냥했다는 증거라도 있으면 몰라!”

“증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마귀라는 존재 자체부터가 의문이지 않나요? 마귀, 마귀라니! 전쟁이 끝난 지 4년인데”

“정말 거짓이라면 황실 모독이라 해도 할 말 없겠어.”

“애초에 트랩 문제라니까 그러네!”

한번 물꼬를 튼 비난과 의심은 빠른 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잠시 갈등했다.

‘때릴까?’

어차피 이들의 불신은 시한부다. 라파엘로와 리웨인이 증거를 끌고 오면 입 다물고 짜져 있게 될 녀석들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미리 때려 놔도…… 괜찮을지도?

마음을 다잡고선 왼쪽 손가락을 천천히 스트레칭할 때였다.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시는 거예요? 거짓말이라고? 혀로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요?”

지척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아까에 비해 한층 더 과격해진 듯한 어투의 주인은, 내가 구한 자매의 동생이었다.

“제가 봤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웨더우즈 자작님은 분명히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네 마리의 마귀를 베었습니다! 우리가 증인이에요. 그렇지, 언니?”

숲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차 지목된 언니 측은 이전처럼 당황한 낯이 아닌, 누가 봐도 화난 낯으로 긍정했다.

“제 동생의 말이 맞아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여러분도 확인하셨죠?”

세레니예 백작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긍정했다.

“마, 맞소. 분명 진짜 마귀가 존재했소.”

“아주 더럽고 끔찍했죠. 웨더우즈 자작님이 저희를 구해 주셨어요.”

“이봐요. 경도 봤죠? 그렇죠?”

동생이 핏대 세우며 가리킨 남자는 내가 자매를 도운 직후 구했던, 한쪽 팔을 다친 기사였다.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팔로 허우적대며 날 옹호했다.

“예, 물론입니다! 분명히 봤습니다. 제 의동생까지 구해 주셨는데 어찌 잊겠습니까? 믿기지 않을 만큼 용맹하셨습니다. 하하, 참전 군인인 제 꼴이 우스워질 정도였지요.”

기세등등해진 동생이 열심히 날 갈구던 노귀족 앞에 섰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죠, 백작님.”

턱을 높게 쳐들고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모습에서, 반드시 사과를 받아 내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서고 있는데, 거짓말? 우리가 전부 짜고 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단 소리이신지요?”

노귀족은 귀 끝까지 벌게진 채 한껏 침을 튀겼다.

“이…… 이런 맹랑한 어린 계집을 봤나!”

“맹랑하다니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날 이렇게 키웠는데 어쩌겠어요? 우리 아빠 아시죠? 칼펜위버 후작이요!”

응?

‘칼펜위버 후작? 이런 우연이 다 있다. 저 자매가 그 아저씨의 딸들이었어?’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어쩐지 겁이라고는 쥐뿔도 없다 했다…….

나는 한창 스트레칭하던 왼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이래서야 노인 공격도 힘들어지지 않은가?

주먹은 고사하고 아스트로사에서 단련한 모근 녹이기 검법이라도 선보여야 하나.

그때.

“그만.”

간결한 음성에 한창 이어지던 말다툼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감히 내 말을 끊어?’ 하는 눈으로 고개를 돌린 노귀족은, 기개가 무색하게 입술을 작게 오므리곤 헛기침했다.

현명한 처사였다. 다툼을 중단시킨 이는 다름 아닌 검성이었으니까.

“시종장.”

저 할 일에만 몰두할 뿐, 과열되는 분위기엔 일말의 관심도 없던 시종장이 겸손히 나섰다.

“말씀하십시오, 공작님.”

“근심이 많은 건 이해한다. 하지만 어영부영 넘기는 일만이 능사인 건 아니지. 더 큰 분열이 일기 전에 자네 선에서 결단을 내리게.”

결단.

‘어중간하게 군다 싶었더니. 황명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나.’

시종장은 심사숙고하는 얼굴이었다. 진실을 밝혔을 때 퍼질 파장을 우려하는 듯했다.

수십 쌍의 눈길 속에서도 꿋꿋하게 머리를 굴리던 그는 이내 곧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공표하겠습니다. 이번 사냥 대회가 중단된 이유는 마귀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긴 탄식이 터졌다.

무거운 손짓으로 하인을 불러낸 시종장이, 철제 상자 안쪽에 숨겨 둔 물건을 대중에게 내보였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맙소사!”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마귀의 손.

그 흉측한 형상을 지척에서 확인한 이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쳤다.

날 거짓말쟁이로 몰던 이들의 비난은 쏘옥 들어가고, 불안과 초조함으로 점철된 대화가 빈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내 사냥 점수는?’

이대로 묻히는 거야?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점수 조정을 요구하면, 그때부터는 진짜 진상이 되는 거니까.

“흐음. 기이한 분위기일세.”

문득, 아쉬움 가득한 기색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귀족들의 질문을 한 몸에 받아 내던 시종장이 놀란 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응급 치료를 마친 세레니예 백작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레니예 백작님? 몸은…….”

“괜찮네. 다만 내가 기대한 바와 많이 다르군.”

세레니예 백작은 수십 년간 단절된 북대륙연합교국과 제국의 교류를 다시금 이어 줄 귀객이었다.

그런 그가 실망한 빛을 내비치자,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시종장의 눈이 미약하게 동요했다.

“죄송합니다, 세레니예 백작님. 응급 치료가 끝나면 곧장 침실로 모셔다드릴…….”

“아니,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세. 나는 영웅의 대우를 말하는 거야. 이 사냥 대회를 구한 영웅의 대우.”

세레니예 백작은 한껏 흥분한 귀족들을 상대로 느긋하게, 또 이상하리만치 손쉽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했다.

“처음 사냥제 진행 방식을 전해 들었을 때 여러모로 대단한 기획이라 생각했었네.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않기 위해, 황실에서 직접 마귀를 사냥하는 대회를 추진하다니? 뜻이 깊고 대단하다 여겼지. 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된 청년들의 목숨이 그 값을 받는구나 여겼어. 한데 지금 이 모습은 뭔가?”

어느 순간부터, 제각각으로 떠들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다친 자는 있네. 하지만 누구도 죽지 않았어. 하물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돌아온 자들이 웨더우즈 자작을 은인으로 받들고 있지 않나? 정작 본부로 돌아온 우리들의 은인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고 있지만 말이지.”

그의 말에 동조하는 일부 젊은 귀족들이 내게 동경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부담스럽다.

“영웅은 추앙받아 마땅해. 그 믿음이야말로 이 사냥제의 의의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 나라면 영웅 웨더우즈 자작의 요구대로, 사냥 점수쯤이야 100점이고 1,000점이고 올려 주겠네!”

루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는 애정이 짙게 밴 따스한 눈으로 내게 은근히 물었다.

“아니면…… 웨더우즈 자작. 나와 함께 북대륙으로 가는 게 어떤가? 북대륙연합은 영웅을 영웅답게 대접하지. 그대도 절대 아쉽지 않을 게야.”

그리고 나는 그 눈빛에 담긴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내 사냥 점수를 높여 주려는 배려구나!’

깨달음을 얻기 무섭게 시종장에게 물었다.

“저 갈까요?”

시종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마 그러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시종장에게 강요했다.

“안 갈 테니까 점수 올려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 대회 점수판이 바뀌었다.

『<1등> 1조 (사냥꾼 : 리웨인 웍호드, 보좌 : 데이지 웨더우즈) 5350점

<2등> 2조 (사냥꾼 : 라파엘로 제나일, 보좌 : 게른 로즈벨) 1450점

<3등> 4조 (사냥꾼 : 고트 로즈벨, 보좌 : 에밀리아 로즈벨) 1000점

<4등> 3조 (사냥꾼 :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보좌 : 케이트 에자넬) 92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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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비해 보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검성이 그랬어. 전시에도 정치 싸움은 있다고. 진짜 승자는 전부 거머쥐는 자라고.

재출현한 마귀와 함께, 나는 올해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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