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 익숙지 않은 간극이 내게 적잖은 거리감을 심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후 등을 돌렸다.
하나 모퉁이를 돌아 라파엘로의 시선에서 벗어난 직후. 겹겹이 쌓인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다행히 무너진 두 무릎은 땅에 닿지 못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내 몸을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쉬이. 괜찮아, 몸에 힘을 풀고 느리게 호흡해. 할 수 있지?”
그는 내가 마음 놓고 머리를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목 뒤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면서 천천히 호흡을 이었다.
맹세의 여파로 몸 상태가 최악에 다다른 상태였다.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기조차 버거웠다.
“……아주 귀여운 선물을 받았는걸.”
비릿한 조소가 들려오기 무섭게, 양쪽 발 전반을 압박하고 있던 감촉이 사라졌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허공으로 붕 떠오른 라파엘로의 타이와 손수건이 루의 손아귀 안으로 구겨지며 들어가고 있었다.
“루.”
“알아, 데이지. 돌려줘야 할 물건이겠지. 걱정할 것 없어. 모리안 세레니예가 널 대신해서 주인에게 돌려보낼 테니. 아주 깨끗하게 세탁해서 말이지.”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루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분간 네 건강을 해칠 행동은 자제해. 내가 이런 꼴로 나서면 네가 곤란해질 거 아니야?”
“……응, 고마워.”
나는 그의 푸른 머리칼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사실을 자각했다.
‘본래 모습이 아닌 모리안의 모습으로 움직였던 게…… 날 곤란케 하지 않기 위해서였구나.’
단순히 루의 변태적인 흥미 때문이라 여겼는데. 괜히 미안해져서 더 얌전히 안겨 있는 채 그에게 말했다.
“펜 로타 황실이 소생 실험을 하고 있대. 꽤 오래됐나 봐.”
루의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건…… 그래, 그런 거였나. 꽤 놀랍군.”
“심장 결정석을 이용하는 걸까?”
“아마도. 대충 가늠이 가. 메피스토의 심장을 손에 넣었을 확률이 높겠어.”
……어?
메피스토의 심장? 마도 전쟁의 그 메피스토?
너무나도 놀라운 가설이었지만, 지쳐서 놀랄 기운이 없다. 나 참, 놀랄 기운이 없다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네.
“심장이라면, 설마 심장 결정석으로 만든 건가?”
“똑똑한 우리 데이지. 실험에 활용되는 심장은 결정석 형태일 수밖에 없어. 로궤의 기술이 유출됐을 거야. 오래된 기술이니 슬슬 외부에 퍼질 때도 됐지.”
루가 보이는 특유의 위기감 없는 화법 때문일까? 유출된 로궤의 기술이 뭐든 그리 시급한 상황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침실에 도착한 후, 루는 날 의자에 앉히고 머리핀을 하나하나 뽑아 주기 시작했다.
“네 추측이 옳았어. 라파엘로가 디안 케트의 새장을 소유하고 있던데. 그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건네받을 예정이야.”
“협력이라면 그 소생 실험과 관련된 일이겠군.”
“응. 내 옛 친구가…… 연관되어 있거든.”
“옛 친구?”
“나타샤 황녀.”
“아, 그래. 기억나는군.”
세심한 루. 내 탈의를 돕는 순간만큼은 모리안의 모습으로 바꾸어 준다.
게다가 느릿느릿 이어지는 내 이야기에 성심성의껏 반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계속 내 옆을 지킬 거라는 듯이…….
나는 루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편히 누웠다. 머리를 베개에 기대니 평소 잘 오지도 않던 졸음이 쏟아졌다.
“정리할 일이 많아, 루. 내일 웨더우즈로 돌아가자. 사냥제도 준비해야 하고…….”
그의 손을 당겨 콧등을 비비자 기분 좋은 웃음이 들려왔다.
“서두를 필요 없어, 자작님. 시간은 충분해. 이제 눈을 감고 편히 쉬어.”
나는 뺨을 쓸어내리는 루의 온기를 느끼며 편안히 잠들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라파엘로에게 귀가 의사를 밝혔다.
“안 됩니다.”
그리고 바로 거절당했다.
“어째서?”
“안데르트의 누이는 곧 저의 누이기도 하다던 말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당신의 쓰러지는 몸을 제 손으로 직접 받은 게 무려 두 번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해가 뜨자마자 돌려보낼 수 있을 거라 여기십니까?”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머문다고 나아질 병도 아니야.”
“적어도 미드윈트리로 가는 길바닥에서 쓰러지지는 않겠죠. 누이가 본인 건강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제나일 성에 머무는 동안은 내 제안에 따라 줬으면 싶군요.”
“그러니까 머물지 않겠…….”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당분간 편히 쉬면서 사냥제까지 머무는 경우도 고려해 보시길. 점심 전에 의사가 찾아갈 테니 알아 두십시오.”
라파엘로는 말 그대로 저 할 말만 남기고는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이건 명령, 그러니까 강요나 다름없었다. 기실 그리 낯선 모습도 아니었다.
‘예전에도 가끔씩 제멋대로 굴긴 했어.’
내가 한쪽 팔을 덜렁거린 채 돌아왔을 때랑, 완전 동화 상태에서 막 빠져나온 후랑, 검성과 단둘이서 검귀 무리에 뛰어든 후랑…….
질책할 마음은 없다. 걱정에서 비롯된 강요인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라니까.’
라파엘로뿐만 아니라, 나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몰래 나간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아주 바쁜 몸이다.
내 목숨도 챙겨야 하고, 가문도 챙겨야 하고, 나타샤도 따로 확인해야 하고, 하여간 몸이 다섯 개여도 부족할 판이었다.
“진, 침실로 돌아가자마자 짐을 챙겨. 조용히 빠져나갈 거야.”
“예? 하지만 루, 아니, 모리안 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그쪽은 걱정하지 마. 오히려 좋아할걸.”
루는 이 성을 조금 꺼려 하는 느낌이거든. 아마 알아서 뒤따라올 것이다.
제나일 기사단과의 수련에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는지, 짐을 챙긴 후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는 진의 행동이 아주아주 기민하다.
한데 순조롭게 제나일 성을 벗어나려던 와중, 본성 뒤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가 있었으니.
리웨인.
나를 발견한 그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첫날에 보인 시건방진 태도와 달리 아주 얌전한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리웨인은 결사대의 멤버가 아니었지.’
의외다. 참전파, 수혜파, 제나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거기에 날 직접 심문하기까지 한 이가 결사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니.
“리웨인 경, 잠시 이리로.”
멈칫한 그는 이내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요구에 따랐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예,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내가 안데르트 파거라고 생각해?”
리웨인은 등을 더 곧게 편 채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작님. 허락해 주신다면 그날의 경거망동한 행동을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됐어. 곤란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야. 그런 식으로 추궁한 이유가 뭘까 궁금했거든. 게다가 준비된 것도 아닌, 즉흥적인 질문이었다니까.”
물론 라파엘로가 대강의 연유는 알려 주었다. 마 기운 감지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었나……. 하지만 완벽하게 납득하기는 어려운 감이 있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리웨인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한낱 신입 기사였던 시절, 먼발치에서 안데르트 파거 님을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6년 전쯤의 일로 기억합니다. 당시 저는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 소속이었고, 공작 각하의 임시 전령 신분으로 전장을 오고 갔습니다.”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 소속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제나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두 집단의 인사가 뒤섞이는 일은 아예 없다시피 한 것으로 아는데.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진급이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의 감지 능력은 후천적인 시술로 생긴 능력입니다. 마도 전쟁의 임시 전령으로 활동했던 것도 시술을 마친 직후였지요.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았던 제게, 전장을 누비는 영웅들이 풍겨 내는 기운은 몹시 강렬하고 또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술.
두루뭉술한 표현이었지만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생체 마법 시술 시험체였구나.’
한데 마도 전쟁 시기에 시술했다고?
‘뭔가 이상한데. 당시 나는 그런 시험에 대해 보고받은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어.’
그 말인즉 국가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의 시술이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당당히 밝히는 걸 봐선 불법이 아니었을 테고, 다른 누구도 아닌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 소속이 시험체가 됐다는 건.
‘검성이…… 주도한 건가.’
검성과 생체 마법 시술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시술이란 건 기본적으로 부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검사로서의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태도를 1순위로 따지는 검성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기사단원에게 직접 시술을 감행했다는 건…… 검성에 대해 나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안데르트 파거 님의 기운이 제 머릿속에 유독 강렬히 남아 있습니다. 제가 느꼈던 기운들 중 가장 오묘하고 복합적인 기운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제껏 두 명 이상이 동일한 기운을 지닌 경우는 본 적 없는 터라…… 대책 없이 오인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오해한 이유는 충분히 그럴싸하다.
‘아무리 그래도 부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주제에 그런 실수를 벌인다고?’
뭐야, 이 자식. 너 낙하산이냐? 의심스러운 눈으로 쏘아보는데 웬일로 진이 나서서 리웨인을 두둔했다.
“아무래도 리웨인 경이 자작님의…… 아니, 안데르트 파거 님의 큰 팬이었나 봅니다. 저 같은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는 꽤 흔한 부류죠.”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