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다시 리웨인을 쳐다보는데 표정이 조금 묘하다.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반응을 보니 확실하군요.”
“진 경…….”
“진 경이 아니라 웨더우즈 자작님의 보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리웨인 경.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시죠. 그리고 진정으로 안데르트 님을 존경한다면 자신의 실수를 명확히 인지하고 설명하십시오. 안데르트 님을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
뭐야, 리웨인. 왜 설득당한 얼굴을 하는 거야?
나는 검쟁이들의 대화가 더 이상한 길로 빠지기 전에 등을 돌리기로 했다.
“나 대신 라파엘로에게 작별 인사 좀 전해 줘, 리웨인 경. 네 누이는 일이 바빠서 웨더우즈로 돌아갔다고.”
리웨인이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작님, 그게 무슨 말씀…….”
“다음에 봐.”
우리는 성 근방을 배회하다가 몰래 탈출하는 것은 어렵단 사실을 깨닫고 정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나갔다.
다행히 경비를 포함한 그 누구도 우리를 붙잡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내가 1시간도 안 되어 그의 요구를 어길 거라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안일함을 발판 삼아, 우리는 올랑 루즈를 유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일반석에 엉덩이를 끼어 앉아 몇 시간을 버텨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평소라면 ‘귀빈석에 앉지 않는 건 재수 없고 깐깐한 웨더우즈 자작님답지 않습니다’라며 잔소리할 진도 융통성 있게 입을 닫았다.
* * *
“돌아오셨습니까, 자작님.”
“돌아오셨습니까.”
“음.”
나는 현관 앞에 일렬로 선 고용인들을 바라보며 기묘한 감상에 잠겼다.
‘이런 게 상류층 가문의 일상?’
귀족들은 원래 다 관심 종자인건가. 막사에서 진흙 신발이나 신고 다니던 나에게는 확실히 생소한 문화였다.
내게서 모자와 코트를 받아 든 하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나일 가문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해서 하녀장과 말리콥스 할아범에게 부탁할 사안들이 있어. 일과가 끝나면 내 방으로 와 줘.”
“예, 알겠습니다.”
웨더우즈 저택은 고작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많은 부분이 바뀐 상태였다.
저택 벽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넝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오랜 창틀과 문들이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윤기 흐르는 새 가구와, 어쩐지 좋은 향기가 나는 저택 내부.
휑하던 통로를 넉넉히 채운 작고 우아한 장식품.
다이닝 룸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은식기.
그리고 무엇보다…….
“올해 겨울에 사용할 커튼을 새로 주문하기로 했다. 역시 겨울 하면 붉은색이니, 부드러운 와인색 계열로 주문하도록.”
“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나한 집사님. 와인색은 노땅 티가 납니다. 주인님이 젊으신 만큼 내부 인테리어도 생기가 느껴지는 방향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차분한 진녹색이 어떠십니까?”
아주 중요한 토의를 하고 있군. 훌륭한 자세야.
하지만 이제 나는 하녀가 아닌 웨더우즈 자작이다. 저들의 담화에 쉽사리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자작’이니까.
해가 진 후.
조금 긴장한 얼굴의 하녀장과 사람 좋은 낯의 말리콥스가 내 방을 찾아왔다.
“부탁하실 일이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응, 조금 많아. 일단 나타샤 황녀의 근황, 그리고 펜 로타 황실에서 주도하는 소생 실험과 메피스토의 심장의 연관성, 아, <베리드 렛>이 황실 휘하 암약 길드라고 하니 이 부분도 알아봐야 하고…… 또 로궤에서 알아낸 황실 기밀 전반도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여. 황실에서 메피스토의 심장을 결정화한 것 같은데, 로궤에서 새어 나간 기술일 거야.”
“…….”
“마지막으로는 사냥제를 대비해 내가 유의해야 할 사안이나 정보를 요약해 알릴 것. 나는 당분간 제나일 측과 붙어서 움직일 거야. 디안 케트의 새장을 넘겨받는 대가로…….”
조금 멍한 얼굴로 집중하는 하녀장과 달리, 말리콥스는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내 이야기를 착실히 메모해 갔다.
“나타샤, 그 애가 소생과 같은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탄식하듯 뱉어진 말에 간단히 답했다.
“라파엘로의 입에서 직접 나온 정보이니 틀림없을 거야.”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사안은 내일 오전까지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주머니를 뒤적인 하녀장이 한눈에 봐도 고풍스러운 서신 세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가장 먼저 보인 서신의 발신인은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다.
“이건 뭐야?”
“자작님께서 귀가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웍호드 가문을 비롯해 작위를 소유한 귀족 가문 세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웍호드라면 리웨인의 가문이다.
“무슨 연락?”
“결혼 관련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며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결혼?”
잠깐.
결혼?
나는 서신을 차마 뜯지도 못한 채, 하녀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하녀장의 초록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결혼.
결혼이란 무엇인가?
서로 간의 영원한 사랑과 믿음을 맹세하는 것.
부모가 될 준비를 마쳤음을 세상에 공표하는 것.
정치적, 경제적 상생과 협력을 약속하는 것.
귀족 가문의 결혼은 보통 이 중 세 번째 결과를 얻는 데 의의를 둔다. 권력과 재산을 지키는 수단으로써 이용된다는 뜻이다.
“안 해.”
“어째서인가요?”
하녀장의 눈빛이 대번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내가 변명을 잇기도 전에 선수를 가로챘다.
“이제 자작님은 그레이 웨더우즈가 아닙니다. 데이지 웨더우즈로서 남은 일평생을 웨더우즈 가문의 수장이자, 웨더우즈 자작으로 살아갈 것을 약조하셨지요. 그리고 결혼은 수장의 의무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선호 여부로 선택하시면 안 됩니다.”
“아예 안 하겠다는 게 아니야. 시간을 조금 달라는 거지.”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자작님을 안 지 벌써 몇 달입니다. 자작님은 특유의 그 꿍하면서도 뭔가 앞뒤 꽉 막힌 표정을 지으실 때마다 절대 의사를 굽히지 않으시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결혼은 웨더우즈 가문의 수장이 지니는 의무로서…….”
아, 정말. 귓구멍 터지겠네.
나는 30분 전쯤 예고 없이 도착해, 하염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의사를 향해 말했다.
“의사.”
“예, 예?”
“이만 돌아가. 라파엘로에게 진료는 적당히 봤다고 전해.”
이 의사는 드셰로와 마찬가지로 라파엘로의 간자이다.
물론 드셰로와 같은 급으로 치기에는 내 건강을 염려하는 라파엘로의 선의와 강요가 더 중한 요점이었지만…… 진정한 연유가 무엇이든 내 입장에서는 간자나 다름없었다.
나를 탐색하는 저 눈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는 뜻이다.
의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용기 있게 대거리를 놨다.
“하지만 자작님. 아직 진료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제나일 공작 각하께서 반드시 자작님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전해. 그쪽도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의사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거야. 웨더우즈 자작은 싫은 티를 풀풀 풍기면서도 마지못해 진료에 임했다…… 정도로 전달하는 게 좋겠어.”
“아, 안 됩니다.”
“안 돼?”
스릉. 진이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검을 뽑자, 오전의 태양 빛이 검날에 반사되어 새하얀 빛을 뿜었다.
“그런 대답도 할 줄 알아?”
“…….”
“할 줄 아냐고.”
창백해진 의사는 제 품을 한참 더듬거리더니 내게 웬 종이 한 장을 달랑 던지며 소리쳤다.
“가, 각하께서 자작님께 이 서신을 전달하셨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아!”
또 뭔 서신인데?
부리나케 사라진 뒷모습을 응시하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서신을 뜯자 아주 친근한 필체가 나를 반긴다.
『누이가 이 서신을 읽고 있다는 말인즉 제가 보낸 의사에 축객령을 놨다는 의미겠지요.
당신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말로만 나를 형제로 대할 뿐, 내 걱정과 관심을 아주 귀찮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안데르트가 말하더군요. 형제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반목하며 갈등시키는 존재라고. 누이를 적대시하고 반목할 자신은 없으나 어느 정도의 갈등은 피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누이는 누이대로 하십시오. 저는 저대로 하겠습니다.
라파엘로 올림.』
믿기지 않을 만큼 속 좁고 쪼잔한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검진 좀 거부했다고 핀잔주는 거잖아.’
방식만 좀 더 정중할 뿐이지, 하는 짓은 예전과 똑같다. 아니, 걱정되면 마지막 디안 케트의 유산이 어디 있는지나 퍼뜩 알려 주라고.
“무어라 적혀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내 결혼 문제로 질타하던 하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충 답했다.
“그냥, 제 걱정하는 마음 알아달라고 칭얼거리는 내용이야.”
“칭얼이요? 많이 가까워지셨나 봅니다. 혹시 자작님이 모르는 사이 정체를…….”
“아니, 말한 적 없어. 그쪽도 날 안데르트의 누이로 알고 있고.”
하녀장은 더더욱 깊은 의문에 젖은 낯으로 되물었다.
“그 말씀은 통성명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제나일 공작이 올랑 루즈의 실력 있는 젊은 의사와 서신까지 몸소 보낸다는 뜻인가요? 이건 너무 과도한…… 관심이로군요.”
“안데르트의 누이는 자기 누이라며 치켜세우던데. 내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물론 그렇겠습니다만…… 조심히 행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교계는 보는 눈이 아주 많아서, 별것 아닌 일들도 크게 부풀려져 퍼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