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 새장은 사냥제가 끝나고 이틀 후 당신에게 넘기겠습니다. 당장 넘기지 않는 건 내 나름의 보증이라 여기십시오.”
“이해해.”
“그날, 유산 중 다른 하나가 어디 있는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이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후한데?
“그리고 나 또한, 누이에게 한 가지 더 요구해야겠습니다.”
요구라. 얌체 같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도 대가 없는 호의는 아니었어.’
이제는 차라리 이쪽이 낫다.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라파엘로는 나를 본성 계단 위로 이끌었다. 어제 심문(이라 쓰고 깽판이라 읽는)하던 그 방으로 안내하나 싶었는데, 도착한 곳은 라파엘로의 집무실이 분명해 보이는 장소였다.
“<베리드 렛>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단체입니다. 황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단 사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이며, 조금이라도 깊게 파헤치려던 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지요.”
“…….”
“그들은 소생 연구에 다른 불편한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오직 ‘죄 없이 희생된 이들을 되살리는 것’만이 목표라 말합니다만. 글쎄요, 그토록 당당했다면 쥐새끼들처럼 땅 밑에 숨어서 연구를 진행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라파엘로는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책장을 지나쳐, 가장 왼쪽 책장 앞에 멈춰 섰다. 나란히 꽂힌 책들 중 <신념의 이해>를 앞으로 당기자 책장 안쪽의 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덜컥.
간결한 기계음과 함께 책장을 벽 안쪽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갔다. 이어서 숨겨진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라파엘로와 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 이건 내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느끼는 긴장이었다.
라파엘로는 나를 어디로 안내하려는 것일까?
“그거 아십니까? 아슈네이케 황제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황실에서는 쉬쉬하고 있습니다만, 길게 봐 봤자 5년 남짓으로 예상하고 있다더군요.”
5년의 수명.
새까만 통로에 발을 딛자, 책장 역시 서서히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이제 사방은 어둠으로 잠식됐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렴풋이.”
소생 연구의 또 다른 목적에 황제의 소생도 있다는 거겠지.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기도 했고, 끝없이 이어진 통로를 말없이 걸어가기도 했다. 어느 순간 지척에서 문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얇게 열린 문틈 사이로 차분한 등불의 빛이 쏟아졌다.
열린 문 너머에 그들이 있었다.
로즈벨 백작, 칼펜위버 후작, 라그휘르텐 백작. 그리고 어색하리만치 멋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몹시 익숙한 낯의 청년 귀족들. 이들은 모두…….
‘마도 전쟁에서 함께 싸워 온 전우들.’
그들 전면에 선 라파엘로가 나를 돌아봤다.
“웨더우즈 자작. 우리는 황실에 대응하는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나는 라파엘로가 말한 ‘결사대’를 말없이 응시했다.
“이 모임의 취지는 간단합니다. 마도 전쟁 전사자의 시신을 보호하고 목숨 바쳐 지켜 낸 펜 로타 제국을 수호할 것.”
그들의 눈에서는 결연한 의지나, 신념이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이 모임의 단합에 의심을 자아내기는커녕 정반대의 인상을 심었다.
이들에게 있어 결사대의 존재 의의는 대단치 않다.
오직 당연할 뿐.
당연하기에 단단하며 견고하다. 그것이야말로 이 결사대를 응집시키는 진정한 뿌리였다.
“먼저 떠난 당신의 형제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뜻에 동참해 주길 바랍니다, 웨더우즈 자작.”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내 입장에서는 그저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이런 식으로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겠다 이건가. 헛된 생각을 품지 못하게, 완전한 한편으로.
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나타샤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디안 케트의 유산을 전부 모아, 완전한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들과 한배를 탈 수 있었다.
로즈벨 백작에 내게 요구했다.
“웨더우즈 자작, 피의 맹세를.”
피의 맹세. 그래, 결사대의 필수 요소이기는 하지.
‘뭐, 하면 할 수야 있는데.’
조금 불안하다. 이미 두 번의 맹세를 거치면서 피를 토하고 기절하지 않았던가? 만약 이번에도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루의 큰 걱정을 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맹세를 거부하면 라파엘로의 신뢰가 추락할 테고…… 디안 케트의 새장을 줬다 빼앗으려 할 수도 있어.
‘……음. 어쩔 수 없지.’
근성으로 버틴다.
이전 맹세의 흔적이 남지 않아, 비교적 깔끔한 한쪽 손목을 내밀었다. 나름 꾸준히 수련했는데도 볼품없이 얇은 꼴이 눈에 거슬렸다.
황금빛 영험한 기운이 실내를 휘감았다.
“여기, 제나일에 모인 12인이 피의 맹세를 나누려 한다.”
불안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럴 때는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나, 데이지 웨더우즈…… 욱.”
그러나 나약해진 몸은 강인한 정신을 따라가기 어려운 법.
입을 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헛구역질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런.”
“웨더우즈 자작!”
이미 각혈을 한 번 한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곧장 몸을 일으킨 노장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게로 달려왔다.
“이보십시오, 자작. 괜찮습니까? 정신이 들어요?”
“자네는 손대지 말게. 무식하게 힘만 세서 자작이 다칠까 두렵군.”
“허어. 지금 리웨인 경을 벽에 처박았던 여자가 다칠까 두렵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끄럽네. 세냐르 경 있나? 여성인 자네가 자작을 부축해 주게.”
“예.”
물에 잠긴 듯 먹먹한 소리들이 이어졌다.
‘후.’
좋아, 버텼다. 각혈하거나 기절하지 않았어. 역시 답은 근성인가?
그러나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지켰어도 몸 상태는 지켜지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심히 어지러웠던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맹세는 나중으로 미뤄도 될까요? 제가 오늘따라 몸이 좀 안 좋아서.”
“됐어, 거기까지만 말하고 당장 침실로 돌아가시게. 세냐르 경? 웨더우즈 자작을 침실로…….”
로즈벨 백작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덕분에 나는 극심한 어지럼을 느끼며 이마를 부여잡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했군요.”
작은 속삭임에 뒤이어, 시야가 어두워졌다.
내 몸은 습하고 어두운 공간을 아주 오랫동안 유영했다.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날 안아 든 라파엘로의 날카로운 턱선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안도감보다는 미약한 자괴감이 들었다.
라파엘로와 함께 있으면 이중적인 감정이 든다.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한없이 나약해진 나 자신을 향한 쓰라림, 수치심…….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보호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기껍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한때는 나란히 섰던 우리니까.
“내려 줘, 라파엘로. 여기서부터는 걸어갈게.”
“안 됩니다.”
“어차피 같은 층이야. 저 귀퉁이에서 돌아가면 되잖아.”
“그 몸으로는 무리입니다.”
무리라고? 나도 안다. 알면서도 내 발로 직접 걸어가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라파엘로에게 더는 쇠약한 인상을 심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루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어. 내 인생 책임질 거 아니면 내려놔.”
라파엘로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선 걸 보면 이번 경고는 제대로 먹혀들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 짧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짧은 휴식을 취한 덕분에, 라파엘로의 품에서 벗어나 직접 일어설 기력이 돌아왔다.
‘……구두만 없다면 걷기도 쉬울 것 같은데.’
아, 이 빌어먹을 구두. 멀쩡한 척 좀 하려는데 방해만 된다니까.
짧은 한숨과 함께 힐긋 라파엘로를 올려다보며 부탁했다.
“못 본 척해 줘.”
그리고 곧장 몸을 숙여 양쪽 구두를 벗었다. 양손으로 구두를 쥔 후,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라파엘로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할게.”
“누이, 잠시.”
특별할 것 없는 부름이었다.
라파엘로는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착용하고 있던 타이를 풀어내, 내 왼쪽 발을 휘감았다.
당황해 발을 빼려 했으나 라파엘로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바닥이 가려지도록 대충 매듭을 묶어 낸 그는 재킷 안쪽에서 새것으로 보이는 흰 손수건을 꺼냈다. 내 오른쪽 발을 휘감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할 동안 라파엘로가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돌려주십시오.”
당부하는 그의 얼굴은 내가 아는, 나의 오랜 파트너가 아닌, 내가 턱을 들고 올려다봐야 하는 남자.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