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가로쉬는 타깃에 보낸 인원이 전원 행방불명된 점, 그리고 주민의 증언 및 내부 정보를 통해 검귀의 정체가 웨더우즈 가문의 데이지 파거라 결론지었다.
그는 곧장 미드윈트리로 넘어갔다.
검성이 뒤를 밟을 걸 예상해 신분증을 사용하지 않았고, 열차 짐칸에 숨어드는 고생까지 감수했다.
다만 미드윈트리에 도착해 웨더우즈 가문을 수소문하는 과정은 조금 번거로웠다.
“뭐? 웨더우즈 가문이 어디냐고?”
“스읍. 눈빛이 정상이 아닌데. 이 자식 암살자 아니야?”
“뭘 걱정하나 이 양반아. 데이지 양의 당부를 벌써 잊었어? 위험해 보이면 주저 말고 곱게 알려 주라 했잖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흠. 그랬지. 이보쇼, 외지인. 데이지 파거는 웨더우즈 가문의 하녀요. 도끼 들고 날아다니는 괴물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이건 경고야.”
암살자? 시장 상인들 하는 짓거리가 더 암살자 못지않다.
그러나 검귀의 또라이 같은 성정을 되새겨 보면 상인들이 전달한 정보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로쉬는 미친 검귀를 만났다.
“개자식. 너 때문에 내가 그 텅 빈 섬에서 조개처럼 구르고…… 목숨까지 걸고!”
하녀라는 우스운 짓거리에 열심인 검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여자를 만난 날부터 더는 악몽을 꾸지 않는 자신.
그래, 가로쉬가 미친 마법사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최근 아주 번거로운 의구심에 빠져 있었다.
제 머리에 남은 마지막 못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만약, 해답이 있다면.
* * *
“데이지 파거는 누구지?”
미친 마법사는 동요 없는 시선으로 가로쉬를 응시했다.
“그 여자가 내 과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남자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보름달이 뜬 밤하늘 아래, 구름처럼 새하얀 비행정 한 채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할 것 있나. 조금 무모하고 귀여울 뿐인데.”
미친 새끼인가? 물론 미친 새끼가 맞기는 하지만.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그런 의문을 지니게 됐는지 궁금한걸.”
가로쉬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이 마법사와 시시덕거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검귀가 원체 입을 열지 않으니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안데르트 파거라고 생각했다.”
“…….”
“두 번째 못의 존재 의의가 당시의 기억을 완벽히 봉인하는 데 있다고 여겼지. 나이대도 얼추 맞아떨어지더군. 마도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 중 더러 날 그와 착각한 이도 있었고. ……무엇보다 데이지 파거가 나를 안데르트라고 불렀으니까.”
“그럴싸해. 한데 말하는 투를 봐선 결국 판단을 무르게 됐나 본데. 연유라도 있나?”
“느낌.”
말하고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가로쉬는 우습게도, 적어도 이번만큼은 자신의 감을 신뢰하고 있었다.
“데이지 파거를 보면 불쾌해.”
가로쉬는 새하얗게 부상하는 폭포 틈새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연둣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의 존재가 이토록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라 당혹스러울 정도지. 처음에는 죽일까? 싶었는데. 검에 손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다음으로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강렬했던 발검의 순간을.
“자세를 교정하기 전의 나와 비슷한 습관을 지니고 있더군.”
검귀의 실력은 분명히 가로쉬를 웃돌았다.
그러나 자잘한 습관과, 습관에서 파생된 움직임 모두가 익숙했다는 점이 그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비교적 덜 고역스럽게 검귀와 검을 맞댈 수 있었던 것이다.
“교정?”
“별거 없어. 검성의 검술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몇 가지 사소한 습관들을 버려야 했지. 검을 잡을 때 손의 위치나 발검 자세…… 그런데 내가 왜 이딴 사소한 부분까지 네게 말해야 되는 거냐?”
가로쉬는 성역으로 올라오는 길에 검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몇 마디 오고 가지 않은 짧은 담화였으나, 한 가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악몽은 퀸 섬 사태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내 과거는 퀸 섬에 있어.’
또한 그 과거는 검귀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검성이 그의 머리에 박아 둔 두 번째 못이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에 관한 것이라면?
못을 제거하는 순간. 잃어버린 과거가 돌아온다면?
미친 마법사는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비웃음이 짙게 밴 입매로 물었다.
“내가 너의 마지막 못을 빼 주면 너는 무엇으로 그 빚을 갚을 거지?”
가로쉬는 지지 않고 이죽거렸다.
“너 같은 마법사에게 내 힘이 필요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데.”
미친 마법사는 그의 반박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흠. 방금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어. 못을 뺀 자리에 내 못을 넣어 두도록 하지.”
“뭐?”
순간, 태풍처럼 몰려오는 현기증에 가로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머리에 무거운 자물쇠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찰나에 머물다 사라졌다.
“이건 기억 따위와 아무런 관계 없는 일회성 못이다. 잊고 살아도 충분해.”
가로쉬는 어지럼을 몰아내기 위해 한 차례 머리를 털며 물었다.
“네놈의…… 목적이 뭐냐.”
“적어도 네 불행 같은 건 아니야.”
그리 말하는 미친 마법사의 눈에 금빛 안광이 번뜩였다.
“안심해도 좋아, 이 못으로 인해 너는 나에게…… 두 번 빚진 셈이 될 테니.”
뇌리에 굉음이 스쳐 지나가면서 익숙한 토기가 몰려왔다.
‘젠장.’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한 가로쉬는 이명에 둘러싸인 채 힘없이 쓰러졌다.
* * *
이곳은 펜 로타 제국의 아름다운 도시, 미드윈트리.
번화가를 지나 자리한 고즈넉한 저택. 한가한 휴일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그 저택에서, 지금 나는.
“데이지 양, 이제 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나요?”
갇혀 있었다.
“시급한 사안입니다. 이 정도면 꽤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하는데요.”
“……5분 전에 물어봐 놓고선 시간을 뭘 줘?”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짐 가방이 잠긴 문 근처에 내동댕이쳐진 게 보였다.
내가 갇힌 이 공간은 웨더우즈 룸이다.
1층 도서실 옆에 자리한 이 방은 내가 웨더우즈에 자리 잡은 이래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디안 케트의 유물이 보관된 장소인가 싶어, 열쇠를 찾느라 고군분투했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그 열쇠가 말리콥스 할아범에게 있었을 줄이야.’
열쇠의 주인이 누구였든, 웨더우즈 룸에는 큰 특이점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아무것도 없다는 점.
그랬다. 가문의 비보와 유산이 즐비할 거라 여겼던 방은 그저 텅 비어 있었다.
우리가 앉은 이 테이블과 의자조차 부엌에서 끌어온 가구들이었으니 말 다 했지.
그래서 더 수상했다.
‘텅 빈 방을 그렇게 꼭꼭 잠가 놓고 있었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닥을 살폈다. 설마 여기서 말 잘못하면 불이 뿜어져 나온다거나 하지 않겠지…….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한 사안이 아닙니다. 당신이 자리를 비웠던 지난 열흘간 여러 방향으로 고심했고, 당신이 웨더우즈 가문의 후계를 잇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 판단했습니다.”
아까부터 쉬지 않고 답을 재촉하는 하녀장을 바라봤다.
하녀장이 깐깐한 성격이기는 하나, 이 정도로 조바심을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데이지 파거 양. 웨더우즈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되어 웨더우즈 가문을 이끌어 주었으면 합니다.”
뭐,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하녀로 살던 사람한테 대뜸 귀족이 되라니.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야지.’
게다가 제안받은 당사자는 나인데 왜 본인이 더 급하냐고.
“그래서 그 고심이란 게 뭔데?”
“가문의 존속.”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녀장은 언제나 웨더우즈 가문을 우선시했으므로 놀랍지 않았다.
“납득하는 데 전혀 도움 안 되는 답이네. 난 웨더우즈 가문의 하녀일 뿐, 이 집안의 핏줄이 아니야.”
“당신이 이 집안의 핏줄이냐 아니냐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전 주인님이 남긴 웨더우즈라는 가문을 계속 지키고 싶을 뿐이니까.”
“그럼 본인이 이으면 될 일이잖아. 왜 나냐고?”
“데이지 양은 강하고 튼튼하니까요.”
“루와 진도 강하고 튼튼해.”
“그 두 사람은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신뢰하고? 그게 더 이상한 일인 거 알지?”
“그만, 그만!”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상황을 관전하던 말리콥스가 중재에 나섰다.
“진정하게. 이거 참. 둘 다 자기 할 말만 하니 대화의 진전이 없군! 하녀장, 자네답지 않게 왜 이리 감정적으로 구는 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