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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02화 (102/195)

102화

가로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내 말없이 서 있던 은발의 검사가 인기척을 냈기 때문이다.

은발의 검사는 잠시간 벽 쪽을 바라보다가 가로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하얀 뺨 위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가로쉬는 은발의 검사를 상대로 하찮은 상흔 그 이상의 상처를 낼 수 없었다.

상대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보다 비등하거나 살짝 낮은 수준의 검사.

아스트로사 왕성에서 만난 칼레파의 수준을 떠올리면 이 남자 역시 3인의 칼레파 중 한 명인 듯했다.

호흡을 정리한 가로쉬는 몇십 분 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쓸 만한 놈이군. 로궤에 입교할 생각은 없나?”

대답 대신 침을 뱉자,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낸 남자가 전혀 개의치 않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꽤 거친 거부야. 그래도 너라면 내 염원을 이루어 줄 열쇠가 될 것 같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날 찾아와라.”

개나 소나 저를 찾아오라고 난리다.

어찌 됐든 가로쉬는 남자와 검을 맞대는 과정에서 적잖은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시야가 흐릿해지고 몸이 무너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공격이 멈추었다.

이후 아무런 대화 없이 30분 가까이가 흘렀다. 덕분에 가로쉬는 마를 활용해 시급한 내출혈을 막을 수 있었다.

“그분이 곧 널 만나러 오실 거다. 예를 잘 차리도록.”

쥐 죽은 듯 조용하더니 수십 분 만에 뱉은 소리가 저거다. 행동만 봐서는 그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가로쉬는 멀어지는 등을 노려봤다. 얄미운 뒤통수에 검을 꽂고 싶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뜰 즈음.

태양처럼 찬란한 금빛의 눈동자가 코앞에 나타났다.

파란 머리의 미친 마법사였다.

“……흠. 그럴 녀석이 아닌데, 아주 곤죽을 만들어 놨군. 성질을 건드렸나?”

작게 욕설을 내뱉은 가로쉬가 통증을 참으며 띄엄띄엄 답했다.

“후. 허연 얼굴에…… 침을 좀 뱉었지.”

“침? 하여간 재미있는 부분을 닮았다니까.”

누구와? 같은 반문은 잇지 못했다.

그 앞에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던 마법사가 몸을 일으키자, 복부에서 느껴졌던 극심한 통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누가 무어라 알려 준 것도 아닌데, 가로쉬는 이 미친 마법사의 힘이라고 확신했다.

“……마법인가?”

“대가로 네 수명을 반년 정도 당겨썼지.”

뭐?

“씨X, 그딴 기괴한 마법은 허락받고 써!”

“그래서.”

그의 불만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마법사가 비소 섞인 싸늘한 시선으로 물었다.

“데이지의 뒤를 졸졸 따라서 성역에까지 발을 들이민 건. 내 필요성을 느껴서겠지?”

대답 대신 호흡을 골랐다.

필요성.

그래, 가로쉬가 멀고 먼 북대륙까지 올라와 로궤의 성역에 숨어든 이유는 오직 하나.

이 미친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껏해야 열흘쯤 전 되는 날의 일을 떠올렸다. 데이지라는 이름의 미친 검귀가, 두 번째 벽을 막 넘으려던 날의 밤.

두 번째 벽을 넘을 수 있는 고수는 드물다. 더군다나 벽을 넘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건 처음이라, 가로쉬는 숨을 죽인 채 집중하고 있었다.

한데 검귀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벽을 넘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영혼과 육체가 한 단계 더 견고해짐을 뜻한다.

특히 육체의 경우 피부, 골격 등 모든 면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로 진화할 수 있었다.

“욱.”

그럼에도 검귀는 피를 토했다.

그건 육체의 재구성을 위한 과정이 아니었다. 검거나, 더러운 기운이 풍기지 않았다. 한여름의 과실처럼 붉디붉은 혈액 그 자체였다.

‘내상.’

가로쉬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검귀의 육체는 진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때. 허공에서 펴진 커다란 가운이 검귀의 전신을 덮었다. 마치 가로쉬의 시야에서 보호하려는 것처럼.

가운을 내려놓은 미친 마법사는 하의만 덜렁 걸친 채로 가로쉬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이한 불쾌감에 미간이 일그러질 때쯤.

“이제 보니 네 머릿속에 못이 박혀 있군.”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의 뇌리로 번개가 내리꽂혔다.

“큭.”

가로쉬는 반사적으로 검을 쥐려 했다. 하지만 몸은 독에 전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올라오는 토기를 버티지 못하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검귀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검고 더러운 피가 흙을 적셨다. 치이익. 혈액에 닿은 풀이 타들어 갔다.

“한 가지 묻지. 기억을 조작당한 적 있나?”

“……조작?”

“일부 기억이 특정 마법에 의해 봉인된 상태다. 네 동의를 받고 주입된 마법인지 묻고 있는 거다.”

기억의 봉인? 그 무슨 개소리를…….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는 욕설을 입 안으로 삼켰다. 과거의 한순간이 어렴풋하게 떠오른 것이다.

4년 전. 펜 로타 제국을 비롯한 주요 연합국이 종전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시기.

가로쉬는 군인들과 엇비슷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주된 증상은 악몽이었다.

매일같이 그를 괴롭히는 꿈.

장소도, 시기도, 정체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용은 언제나 똑같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이 그의 얼굴을 태웠고 발아래에서 차오르는 물이 그의 호흡을 틀어막았다.

정신이 흐릿해져 갈 때쯤. 새까만 심해 너머에서 항상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다려 줘…….]

[……내가 찾으러 갈 테니, 기다려…….]

악몽이 선사하는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수면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성이 그에게 한 가지 치료법을 제안했다.

“위험한 치료법은 아니다. 마도 전쟁 후유증을 겪는 군인들을 위해 개발된 마법이지. 개조된 정신 트랩을 통해 장애를 일으키는 기억을 선별하고, 해당 기억을 소거하거나 봉인시키는 방식이다. 아마 네 악몽을 저지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거다.”

별다른 기대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효과는 탁월했다. 그날 이후 더는 악몽을 꾸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마법을 못이라고 표현한 건가?’

탐색하는 행동만으로 마법을 통찰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짚이는 부분이 있나 본데.”

“…….”

“네 머리에 박힌 못은 두 개다. 한 개는 방금 내가 부서뜨렸고, 나머지 한 개는 아직 네 머리에 남아 있지.”

두 개?

신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발언이었다.

검성이 그에게 건 정신 마법은 한 가지였다. 그러니 못도 한 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두 개가 맞는다면?

“남은 것도 부수고 싶다면 로궤로 찾아와라.”

“너 같은 미친 새끼의 뭘 믿고?”

“믿는 건 자유. 널 위해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건 아니거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친 마법사는 미친 검귀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그날 저녁.

가로쉬는 지난 4년간 잊고 있던 악몽에 다시 시달리기 시작했다.

유성에 타오르는 얼굴, 빠르게 차오르는 물. 그리고 어둠 너머에서 환영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허억, 헉.”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난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 미친 마법사가 못을 뺀 여파인가.’

그렇다면 하나 남았다던 못은?

그 못은 어떤 역할을 하는 못인 거지?

‘……검성이 내게 덫을 놓았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의되지 않은 마법이 뇌리에 심어져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검성에 의해서.

“젠장.”

일이 귀찮아졌다.

검성이 그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

사람을 의심하는 건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상대가 그의 스승이자 은인인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이라면 더욱이.

오전 내내 심사숙고하던 가로쉬는 정오가 넘자마자 검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지난밤에 겪은 사건을 대강 일축해 알렸다.

단 하나. ‘못’에 관한 언급은 배제한 채.

“시간을 달라?”

“예.”

“갑작스럽군. 임무를 보란 듯이 실패한 것도 놀라운데, 열흘을 떠나 있겠다고?”

“예.”

“지난밤 계획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였는지 알고 있었겠지?”

“예.”

“그만큼 중하기에 네게 맡긴 임무란 것도 알고 있었을 거다, 가로쉬.”

“죄송합니다.”

검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가로쉬를 뜯어 살폈다. 무언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검성이 내뱉은 건 느지막한 한숨이 전부였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거냐.”

“각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몰래 나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영악한 놈. 너다운 대답이로구나.”

“…….”

“그리고 너답지 않은 행동이야. ……좋다, 가로쉬. 네가 요구한 대로 열흘의 시간을 주겠다. 그러나 계획에 없던 일정인 만큼 그에 준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건 돌아와서 알려 주지. 떠나려면 지금 당장 떠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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