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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04화 (104/195)

104화

“……죄송합니다.”

쯧쯧. 짧게 혀를 찬 말리콥스가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하녀장을 살폈다. 그러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데이지 양도 알겠지만, 웨더우즈의 전 가주는 디안 케트 님의 수제자 중 한 명이었다네.”

나는 힐긋 하녀장을 바라봤다.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고심했다고 했으니 말리콥스와 하녀장 사이의 대화는 이미 끝났을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야. 웨더우즈는 북대륙과 연이 깊지. 200년 역사 동안 아스트로사인을 안주인으로 맞이한 기록이 적지 않아. 아마 제국 내 귀족 중에서 가장 많을……거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두세 번째 순서로 많더군.”

말리콥스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전에 없던 의문이 생겼다.

혹시, 웨더우즈 가문은 로궤가 심은 스파이 가문이었던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기간이 맞지 않아.’

웨더우즈 가문의 역사는 200년인 반면, 로궤는 150년의 전 큰 내란을 통해 재정비되었으니까.

“로궤의 스파이 가문으로서 체면이 안 서는 통계 결과였지.”

음. 스파이가 맞았구나. 과연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인 법.

“시작은 성회교가 북대륙에 똬리를 틀면서였다네. 로궤 내에서 마약 유통 경로 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 황실과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국으로 스파이를 보냈고, 귀족회를 탐색하기 위한 타깃 중 하나가 웨더우즈 가문이었던 게야.”

말리콥스는 찻잔의 손잡이를 스윽스윽 문지르며 뒷말을 이었다.

“이후 마약 사태가 일단락되고, 북대륙은 교류의 문을 닫아 버렸어. 그날부터 웨더우즈는 완전히 로궤의 손아귀로 넘어가서 제국을 살피는 눈이 되었지. 그러니 스파이라 표현해도 무방할……거라고 여겼던 게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군.”

노인식 농담인가? 너무 열받는데?

잠깐 주먹을 흔들까 말까 심사숙고했지만, 노인 공경을 위해 포기하기로 했다.

“그만 장난치고 진실이나 말해, 할아범.”

흠흠. 짧은 헛기침 이후 말리콥스가 말했다.

“제국 내 몇몇 가문이 정치적 이유로 로궤에 삼켜진 건 맞는 말이라네. 하지만 웨더우즈 가문만은 달라. 다른 데 목적이 있지.”

“어디에?”

“전 가주에게 전해 듣기를, 디안 케트 님은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찾고 계셨다고 하는군. 아무래도 그 물건이 제국의 물건인 모양이야.”

디안 케트?

‘또 그 이름이야? 안 나오는 데가 없네.’

괜한 기분에, 스리슬쩍 왼쪽 가슴을 쓸었다.

이제 내 심장의 일부가 되어서 그런가. 이름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더 묘했다.

“물건이라는 건 일종의 보물 같은 거야?”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네. 웨더우즈는 대대로 디안 케트 님의 명령을 받아 그 물건을 찾아 헤매 왔어. 마도 전쟁이 일어나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웨더우즈 전 가주가 남긴 유일한 유품, 알.

그리고 디안 케트.

‘흠.’

이거, 굉장히 익숙한 조합인데.

“할아범. 이 집안에 계란 하나 숨겨 뒀잖아. 그 계란이 디안 케트가 찾는 물건과 관련된 거야?”

“……계란? 아, 디안 케트 님의 유산! 하하, 데이지 양. 둘의 연관성을 찾아낸 건가? 자네 보기보다 아주 똘똘하군그래?”

생긴 거랑 다르게 봐 줘서 아주 고오맙다. 하지만 내 심정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뭐야. 그럼…… 디안 케트의 유산은 치료와 전혀 상관없던 건가?’

단지 디안 케트가 염원하던 특정한 ‘물건’을 찾는 데 필요한 도구였던 것일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확신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찾는 물건이 뭔데?”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하녀장에게서 나왔다.

“모릅니다.”

장난해?

“하지만 실마리는 있죠. 듣자 하니 디안 케트 님의 유산이 총 다섯 점 존재한다지요? 저희는 일단 그 유산부터 모아 볼 생각입니다.”

“굳이?”

“데이지 양에게는 아니겠지만, 저에게는 의미가 큰 일입니다. 돌아가신 전 주인님의 가문과 유산을 지키는 것. 그게 바로 제가 웨더우즈 가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니까요.”

“그렇다네, 데이지 양. 자네도 웨스트윈트리에서의 디안 케트 님의 유산을 노리는 다른 자들을 확인하지 않았나? 우리도 방비를 세워야만 해.”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그들에게 전 주인님의 유산을 빼앗기고 말 겁니다.”

“승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우선 승계권 문제나, 파거 가문과 웨더우즈 가문의 인척 관계쯤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어. 이쪽에 150년간 활동해 온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자랑이다, 할아버지야.

“우리의 비밀을 아는 이 중, 믿고 맡길 만한 인재는 당신뿐이에요, 데이…….”

“좋아, 거기까지.”

단호한 제지에 하녀장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제 그들이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확실히 이해한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을 귀족 노예가 필요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궁극적으로는 디안 케트가 찾는 그 ‘물건’을 찾기 위해서.

“사정은 알아듣겠어. 그래도 시간은 필요해. 나도 나름의 개인사가 있는 사람이니까.”

개인사는 무슨.

‘이거 완전 개이득.’

고민? 필요 없다. 하녀? 미련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웨더우즈 자작으로 신분을 갈아탄다.

귀족회 소속의 귀족이라는 신분. 말리콥스라는 정보줄 겸 돈줄. 본진인 웨더우즈 가문의 보안을 책임져 줄 하녀장과 진.

그야말로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는 데 최적의 조합이지 않은가?

그래도 답은 내일 줄 거다. 원래 이런 건 애를 좀 태워야 하거든.

“내일까지 확답을 줘야 할 겁니다, 데이지 양. 모레에는 제나일 공작가로 떠나야 하니까요.”

창 너머, 벌써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본 하녀장이 내게 한참 늦은 안부를 물었다.

“루 씨와 진 씨가 안 보이는데. 둘은 다른 곳으로 떠난 건가요?”

“조금 늦게 돌아올 거야.”

“그렇다면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으로 변신해 제나일 공작가를 방문하기도 어렵겠어요. 우리의 제의를 잘 생각해 보세요.”

“싫은데?”

“싫으면 이제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하죠.”

난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몸으로 짐을 푼 후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또 하녀장의 요리 솜씨를 맛봐야 하는 건가? 루가 간절히 보고 싶었다.

다음 날 오후.

진이 하루 늦게 귀가했다.

그런데 상태가 영 말이 아니다. 고운 얼굴에는 붉은 잔상처가 선명했고 어쩐지 다리 한쪽도 절뚝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주제에 귀가하자마자 생전 안 부르던 허밍을 부르며 식기 정리에 나선다. 어디 하나 나사라도 빠진 애처럼.

“너 꼴이 왜 그래?”

“아, 선배님. 별것 아닙니다. 성한 몸으로는 도저히 칼레파에게 배움을 받을 수 없지 뭡니까? 살면서 그토록 압도적이게 강한 검사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과 제나일 공작님 그리고 선배님 외에는 처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진이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래서 나도 그냥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역시 선배님을 따라가길 잘한 것 같습니다. 제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뭐, 그 정도로 좋다면야.

“그런데 심사는 어떻게 되신 건가요?”

“탈락.”

“예? 선배님 같은 실력자가 어째서…….”

“행실 불량으로.”

“아.”

납득된다는 표정 짓지 마. 구라야.

나는 진을 통해 전달된 예거시의 편지(일이 잘 해결됐는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내용)를 확인한 후 다시 하녀로서의 일과를 시작했다.

잠시 떠났던 곳이 웨스트윈트리였든, 북대륙의 아스트로사였든. 다시 웨더우즈에 돌아온 나는 여전히 하녀(인데 웨더우즈 가주가 될 예정인)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고, 언제나처럼 함께하는 주변인이 있다. 일상이 선사하는 안온함은 내가 간직한 가장 큰 평화였다.

단 하나.

“데이지 양? 기한이 딱 하루 남았습니다. 내일은 결정을 내려야 할 거예요.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죠.”

“이봐, 하녀. 여유가 생길 때 찾아와라. 베리드 렛과 관련해 할 말이 있다.”

“선배님. 일전에 보여 주신 마귀다리미법을 수련 중인데,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형님! 저희 식당에서 이번에 새로운 메뉴를 개발했습니다. 딸기잼오이샌드위치인데 반응이 끝내주게 좋습니다! 나중에 와서 평가 좀 내려 주십시오!”

“아이고오, 데이지 양! 지난 열흘간 휴가를 다녀왔다면서? 잘했어, 잘했어. 거 낮에 한번 시장에 놀러 와. 감자 할머니랑 차 한잔하기로 혔어.”

빌어먹게 바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염병.’

왜 바쁜 거지?

나는 그저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잡스러운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이 생긴 거야?

결국 하루 만에 지쳤다.

온종일 검을 휘두르는 건 조금 힘들지만, 온종일 사람을 상대하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일이 있다면…….

‘내일 라파엘로를 상대하는 일.’

하아.

라파엘로를 떠올리면 막막하다. 그 옆에 드셰로라는 똑똑한 간자가 버티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그레이 웨더우즈로서 찾아가는 것보다는 내 본래 모습으로 만나는 게 훨씬 나을 거야.’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더, 굳이 더 있다면.

“만약 안데르트의 누이로 알려진다면 청혼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음.

잠시 머리를 굴린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하녀장과 말리콥스가 담화를 나누고 있는 웨더우즈 룸의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하녀장이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데이지 양?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여는 건 예의 없는…….”

“할게.”

“뭐를요?”

“웨더우즈 자작.”

둘의 눈이 커졌다. 나는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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