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마지막 벽을 넘어 반신의 경지에 이르면, 영혼은 신으로 재탄생될 준비를 시작해. 조금 더 고등 차원의 자아가 꽃피어 나면서 인간의 자아와 신의 자아로 나뉘게 되는 거지.”
자아가 나뉜다고?
어, 그건 확실히 고등 차원의 문제 같네. 전혀 이해를 못 하겠어.
“쉽게 좀 말해 봐. 이중인격이 된다는 거야?”
“흠. 두 자아의 균형을 잃게 된다면야 그리 느껴질 수도 있겠군.”
또 균형이다.
“상상이 잘 안 돼. 그 자아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는 건데?”
“신격의 힘을 사용하면 신의 자아가 강대해지고, 감정과 본능에 휘둘리면 인간의 자아가 강대해지지. 둘 사이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면 지금처럼 대륙에 머물며 반신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야.”
한 마디로 이성과 감성의 대립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한쪽이라도 압도적으로 우세해지면?”
“인간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신이 되어 먼 우주로 떠나거나.”
“…….”
“성역이 아무 이유 없이 성역으로 추앙받는 게 아니야. 이곳에 고인 오랜 땅의 기운은 자아를 안정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거든. 그래서 3년에 한 번씩 굳이 돌아와 머무른 거지. 답이 됐나?”
신이 되어 먼 우주로 떠나거나.
다른 어떤 말보다도, 그 한마디가 내 귓가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나는 조금 불안해진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안정적인 상태가 맞는 거지?”
“그래. 지금의 나는 지극히 균형 있는 ‘반신’에 가까워. 인간의 욕망에 한없이 가깝지 않고, 완전한 신의 경지와도 한없이 멀지 않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200년 가까이 살아온 삶의 경험 때문도, 모두가 경악할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자아의 균형을 훌륭하게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지나치게 열정적이지도, 무관심하지도 않다. 간절히 바라는 것도 없으며 큰 행복과 큰 슬픔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게 바로, 루가 반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균형’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3년에 한 번씩 성역에 돌아왔다는 건…… 분명 한쪽 자아가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비대해졌다는 뜻일 텐데.’
과연 어떤 자아가 그를 잡아먹으려 했을까?
“네게는 아주 잘된 일이야.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나’는 몹시도…… 욕망에 솔직하거든.”
노래하듯 읊은 루가 내 등 뒤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빙글빙글 돌렸다.
“지금의 내 꼴도 종종 이해되지 않을 만큼 머저리처럼 느껴지는데. 인간에 가까워진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음. 흥미가 일기는 해도 겪고 싶지는 않군. 약하고 추한 건 별로라.”
약하고 추한 것.
‘나를 말하는 걸까.’
거침없는 표현이었으나 충분히 납득됐다. 그는 신이라 불리는 유일한 인간이었으니까.
‘신.’
100년 전의 유성을 끌어올 정도로 위대한 존재.
만약, 루가 시간을 우롱할 정도로 대단하다면. 그렇다면…….
“루.”
“응.”
“당신은 나를 살리는 것도 가능해?”
루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말리콥스에게 들었어. 영혼이 깨진 상태로는 이 이상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남은 수명 동안 서서히 육신이 무너져 갈 거라고 했지. 당신의 힘으로 나를…….”
“안 고쳐.”
심장이 따끔해질 정도로 단호한 부정이었다.
얼마나 단호한지, 민망하거나 서운한 감정은 일말도 들지 않았다. 루는 뒷골이 서늘해질 만큼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죽은 자를 살리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소진하면 멀리 떠나야만 하지. 그리고 돌아오지 못할 거야. 평생. 영원히. 내가 왜 그래야 할까? 누구를 위해서?”
“…….”
“단지 너를 위해서?”
그답지 않게 다소 격양된 반응이었다.
단지 호기심이 들었을 뿐,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나 보다…… 싶었지만.
“가엾은 데이지. 그건 포기해. 네가 늙어 죽는 모습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으니까.”
뭐?
루는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14년을 지켰는데, 남은 생을 나 없이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 한마디로 확신했다.
루는 내게 집착한다.
다만 루의 집착은 사랑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사랑? 애정? 과연 루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는 있을까?
‘애초 신이 느끼는 바를 인간의 말로 정의하려는 게 이상한 걸 수도.’
그러니까 루의 집착은 책임감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칼레파는 그저 데이지 양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 것에 불과하네.]
‘어떻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어.’
양가감정이 들었다.
루는 끝까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다는 허무함. 그럼에도 그가 나와의 인연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안도감.
“한시라도 빨리 디안 케트의 남은 유산을 찾아. 그 녀석이 남긴 물건이라면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디안 케트도 정말 반신이었구나.”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루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끼이익.
석벽에 긴 균열이 생기더니, 곧 거대한 틈이 생겼다. 틈 안쪽의 어둠에서 두 개의 물체가 날아왔다.
하나는 황실의 보고에서 훔쳐 왔던 디안 케트의 일기장. 그리고 하나는 낡은 인장이었다.
‘저게 유산 중 하나라는 인장?’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탐내지 마. 이건 성역에 보관해 둘 거니까.”
“뭐? 어째서?”
“그럼? 웨더우즈에 숨겨 둘 생각이었나? 그곳이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만…….”
쨍그랑.
갑작스러운 소음이었다. 나는 제단에서 내려서서 소음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화병 조형물이 바닥에 떨어진 채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한데 별일 아니라 여기기에는 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다나한의 신호.”
“다나한이 누군데?”
“내 집의 집사.”
아, 집사 암살자의 본명이 다나한이었어? 진짜 안 어울리는 이름이네.
“웨더우즈에 중한 문제가 생길 경우 신호를 보내라고 알려 뒀지. 너는 먼저 미드윈트리로 돌아가, 데이지. 나는 가로쉬를 포함해 이곳의 일을 마무리하고 쫓아갈 테니.”
그가 안데르트를 돌봐 준다면 안심할 수 있다.
“일이라면 어떤 일?”
마법으로 화병을 원상 복구한 루가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비밀.”
그놈의 비밀은 진짜.
“우르드, 미드윈트리로 이동할 비행정을 준비해라.”
허공을 향해 작게 읊은 루는 다시 내 손을 잡고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성역 내부를 벗어나 에델바이스가 만발한 정원에 도착했을 때, 그 한가운데는 전에 없던 중형 비행정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백색 비행정에 올라탔다.
“그…….”
돌아올 거지? 아니면 돌아올 거야? 가쁘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돌아와.”
마치 키스하듯 길게 눈을 맞춘 루가 내 귀에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봐서.”
하여간 마지막까지…….
비행정이 떠올랐다. 나는 창 너머로 멀어지는 성역, 칼레파를 말없이 응시했다.
루는 내게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언제 돌아올까? 내일? 보름 후? 반년 후? 일 년 후?
‘……뭐, 루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나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오묘한 공허함을 뒤로한 채, 창가에서 몸을 올렸다.
미드윈트리에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고작 반나절 조금 넘게 걸렸는지, 비행장에서 나와 웨더우즈 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낮이었다.
‘조용한 걸 봐선 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네.’
집사 암살자가 급한 사안이 발생했다고 신호를 보낸 만큼, 어떤 일인지부터 확인해야겠다. 일단 짐 좀 정리하고.
분명 그런 마음가짐으로 귀가했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데이지 양.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으면 합니다.”
나를 발견한 하녀장이 이곳으로 이주한 말리콥스를 끌고 나온 후에도.
분명 머릿속은 짐을 정리할 생각으로 가득했었는데.
“당신이 떠난 후 말리콥스 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웨더우즈 가문의 존속에 관해서였죠.”
분명 그랬는데…….
“별로 안 궁금한데 일단 짐부터 놓고 나오면 안 될까?”
“우리는 웨더우즈 가문이 전에 없던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위험한 시기를 이겨 내고 이끌어 갈 리더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죠.”
“그거 굉장히 안타까운 이야기네. 일단 짐부터 놓고 나와서 들으면 안 될까?”
“그러니, 데이지 파거 양? 당신이 웨더우즈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되어 주세요.”
“…….”
“그리고 웨더우즈 가문을 이끌어 주었으면 합니다.”
“…….”
“…….”
“…….”
“……데이지 양? 내 말 듣고 있나요?”
듣고 있냐고? 당연히 듣고 있다.
그런데 하녀장.
“혹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