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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195)

79화

단출한 여행 가방을 챙길 동안 루의 저택에서 산적 하녀와 하인들이 넘어왔다.

하녀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걸 봐선, 면접에서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모양이었다.

“갈게요.”

“잘 다녀와요, 데이지 양 그리고 진 군. 문제없이, 사건 없이, 안전하게, 살아서, 루 씨와 함께 조용히 귀가하길 바랄게요. 언제 돌아온다고 했죠?”

“열흘 후.”

“좋아요. 그때 보죠.”

짐 가방을 챙기고 나서는 길에 진이 작게 속삭였다.

“선배, 왕복에만 90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압니다만. 나흘 안에 루 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찾아야지. 그래야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공작가 방문일이 얼마 안 남았거든.”

아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녀의 삶이여.

나는 쿵쾅거리며 들어온 산적 하녀에게 당부했다.

“웨더우즈를 잘 부탁해, 산적.”

“물론이요, 하녀 보스!”

듬직하게 가슴을 두드린 산적 하녀가 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이며 경고했다.

“거기 집사? 당신에게도 지지 않을 거요.”

쾅. 문이 거세게 닫히고, 진은 정신이 반쯤 나간 눈으로 내게 해명을 구했다. 많이 놀랐구나.

“너를 라이벌로 생각하나 봐.”

“어째서……?”

“비슷한 처지라 그런가.”

우리는 그대로 미드윈트리 대형 비행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드문드문한 비행장에 하차하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무장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등 뒤로 붙어 왔다. 안데르트였다.

‘우리 비행장이…… 비행장 D였지?’

그래도 한 번 왔다고 낯설지는 않네.

비행장 C를 지나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먼 곳으로 휴양이라도 떠나듯, 멋들어진 검은색 선글라스를 걸친 금발의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든 것이다.

“데이지 양! 오랜만이군요! 하하하, 잘 지냈습니까? 낯빛이 더 좋아졌네요. 웨더우즈 자작 부부는 잘 지내고요?”

원체 쾌활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언제 봐도 어색하지 않은 남자였다.

“둘 다 건강해. 주인님은 너무 바쁘셔서 내가 대신 움직이게 되었어. 호의를 베풀어 줘서 고맙다고 전해 달래. 당분간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데이지 양. 이쪽은 동행분인 것 같은…… 흠. 제 눈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선글라스를 코 밑으로 스윽 내린 예거시가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양이 아니신지?”

“맞아, 내 직장 동료야. 진? 이쪽은 우리를 북대륙연합교국까지 안내해 줄 예거시 파뉼라 씨.”

“직장 동료……?”

“잘 부탁드립니다, 파뉼라 씨. 전에 뵀었는데 기억하고 계셔서 기쁩니다. 웨더우즈 가문의 집사, 진입니다.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집사……?”

한차례 깊은 혼란에 빠져 있던 예거시는 예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신문사 차남이라 그런지 현실 자각이 빠르다.

하긴, 세상에는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자가 웨더우즈 집사로 전직했다는 소식보다 더 놀라운 소식투성일 테니까.

작게 헛기침한 그는 이번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흠흠. 그런데 전에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예기치 못한 동행인이 생겨서 말입니다.”

이미 전해 들은 사항이라 놀라울 것 없었다.

아니, 오히려 궁금증만 가중됐다. 대체 누구기에 계속 밑밥을 까는 것일까?

이어서 등장한 인물은, 밑밥을 열 번 깔아도 이해될 인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데이지 파거 양. 그리고 진 군. 귀족회에서 한 번 뵈었던 것 같은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드셰로 콘타나 자작입니다.”

드셰로.

라파엘로의 오랜 보좌관이자 나의 동료였던 남자.

꿈인가? 싶었던 것도 잠시. 나는 드셰로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챘다.

‘라파엘로가 보냈구나!’

이 간자 드셰로 같으니라고.

나는 눈을 얇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감정을 숨기는 데 고수인 드셰로는 언제나처럼 피곤해 보이기만 했다.

“이번 일정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드셰로와 악수를 나눴다.

작게 헛기침한 예거시가 내 귀에 살짝 속삭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작 부인 대리로 데이지 양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라파엘로 공작님의 귀까지 들어간 모양입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이 소식을 알린 적 없는데 말입니다. 하하…….”

드셰로가 훤히 들린다는 눈으로, 항시 달고 사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로 공작님은 세상에 모르는 이야기가 없으시지요.”

“그래서 지금 날 감시하려고 왔다는 거. 예요? 자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상명하복에 작위는 의미 없습니다, 파거 양.”

“그렇기는 해. 요.”

이렇게 보니 조금 안쓰럽긴 했다.

자작씩이나 되어서 아직도 몸으로 구르다니.

‘그만큼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단 뜻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몸을 사릴 거라 예상했다면 착각이다.

나, 하녀 데이지. 정체를 안 들키는 선에서 나만의 길을 간다.

그런 김에 양손에 끌고 온 두 짐짝을 드셰로에게 소개했다.

“자작님이 잘 부탁드린대, 얘들아.”

아까부터 의심스러운 눈으로 안데르트를 살피던 드셰로가 드물게 놀란 눈으로 탄식을 뱉었다.

“가로쉬 군? 가로쉬 군 맞습니까?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겁니까?”

“두 사람에게 다시 소개할게요. 이쪽은 내 직장 동료, 집사. 이쪽은 내 동생, 싸가지.”

내 소개가 부끄러웠는지 안데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개소리니까 무시하시죠. 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드셰로 자작님. 조용히 지낼 테니 알은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거 양, 가로쉬 군과 의남매라도 맺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냥 남매.”

안데르트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안 맺었습니다.”

그래, 안 맺기는 했지. 진짜 남매니까.

나는 드셰로에게 악수를 요청하며 어서 비행선에나 오르자고 눈치를 줬다.

“잘 부탁해요, 자작님. 앞으로 데이지라고 불러 주세요. 이제 탈까요?”

그리고 어물쩍 올라온 손을 대차게 흔들고 비행선으로 향했다.

‘파티 구성원 다섯 명. 안정적인 숫자야.’

옛날 생각이 나서 마음이 놓이네.

오늘처럼 비행선이 이륙하기 제격인 날. 나를 두고 토낀 루는 뭘 하고 있을까?

* * *

이곳은 북대륙연합교국의 어딘가.

남자, 베르단드는 조금 더 빠르게 걷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아스트로사 왕국에서 이곳, 로궤의 성역이자 본교인 칼레파까지 한걸음에 날아온 그였다.

그사이 태양이 한 번 지고 떴지만 베르단드는 한순간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소식의 ‘주범’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정말, 언제나처럼!

“칼레파.”

성역 외곽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베르단드의 얼굴을 알아보기 무섭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베르단드에게는 그들의 인사에 답할 여유가 없었다. 느릿느릿하게 열리는 문틈으로 몸을 욱여넣고선 반쯤 뛰듯이 걸었다.

“칼레파.”

“칼레파.”

성역 외곽의 거주를 허락받은 예테들이 그와 마주하기 무섭게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베르단드가 가는 길마다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듯 점잖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로 인해 또 다른 길이 생겼다.

돔 형태의 지붕이 군데군데 솟은 회백색 성역. 그 틈 사이로 혈관처럼 퍼져 있는 강물. 남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 잎과 땅을 구르는 모래알…….

회백색과 푸른빛의 조화가 성역 외곽의 평화를 알리고 있었다.

소식의 ‘주범’이 귀환했는데 이토록 조용하다니?

‘또 언질도 없이 벽을 넘어 들어오신 거군.’

이제는 익숙해서 혀가 바짝 마르지도 않는다.

외곽을 통과한 후 사방을 둘러싼 봉우리 중 가장 낮은 봉우리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바람이 감도는 동굴 안쪽으로 발을 딛자 하늘로 향하는 기나긴 덩굴이 나타난다.

베르단드는 두꺼운 덩굴 안쪽에 난 계단을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을 지나서 봉우리 위로 올라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계단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덩굴이 나선으로 솟은 계단은 단 한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했다.

멀리서 보면 구름에 가려진 거대한 나무처럼 보일 이곳.

신의 땅.

이 땅에 다시없을 성역, 칼레파.

계단 끝에 도달한 베르단드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그의 방문을 허하듯,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낙원 너머 백의를 걸친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우르드.”

베르단드는 가벼운 걸음으로 남자, 우르드에게 다가갔다.

반가움을 숨기지 않은 알은체였건만 안경 너머 번뜩이는 우르드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로드 칼레파께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꾸역꾸역 기어들어 왔군.”

면박을 주고선 아무렇지 않게 앞서 걷는다. 베르단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신은 어찌 된 사람이 말을 해도 그따위로 해?”

“평소엔 밖을 싸도느라 성역을 돌보지도 않는 네놈에게 곱게 나갈 말은 없다.”

“성역을 돌보는 건 당신의 역할이야.”

“네놈의 의무이기도 하지.”

우르드의 말이 옳다.

실제 로궤의 지도자인 세 명의 칼레파는 성역, 칼레파를 관리하는 의무를 가진다. 다만 나머지 둘이 밖으로 나돈 지 오래라 우르드 홀로 그 역할을 감내하고 있었다.

“……스쿨드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나?”

로궤의 세 칼리파.

서기장 우르드.

지휘관 베르단드.

인도자 스쿨드.

그리고 그들 셋을 굽어살피는 위대한 반신, 로드 칼레파.

그중에서도 스쿨드가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기 위해 남대륙으로 떠난 지 어언 4년이 흘렀다. 지금쯤 두어 개 이상은 회수했다는 말이 들려와야 하는데 아직도 조용한 게 이상했다.

“네가 아는 그대로다.”

오늘도 조용하단 뜻이었다.

“그래, 그건 됐고. 로드 칼레파께선 갑자기 무슨 일로 귀환하신 거지? 수년은 못 뵐 거라 장담했는데.”

“어린애처럼 들뜨지 마라. 우리가 그분의 뜻을 감히 내다본 적이 있던가? 궁금하면 입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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