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95)

80화

신경질적인 놈.

투덜거리며 우르드의 뒤를 따랐다. 백색 창공성으로 들어간 그들은 일곱 개의 문을 넘어 중앙 제단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대리석 길을 따르면 그 끝에 무너진 벽과 천장이 드러나고, 돌 제단 앞 땅에 널브러지듯 편히 앉은 청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로드 칼레파였다.

베르단드와 우르드는 마른침을 삼키고 열다섯 걸음 앞에 멈춰 서서 무릎을 꿇었다.

“칼레파, 칼레파, 칼레…….”

“둘 다 아직 휘인가?”

경건하게 숙인 고개 아래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잠시간 마주쳤다.

“…….”

“…….”

길어지는 침묵 끝에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궤의 명맥을 계속 잇고 싶다면 하루빨리 네 번째 벽을 넘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

“…….”

“혼쭐날 준비가 된 걸 봐선 아직 멀었군. 로궤의 칼레파들은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걸까.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저희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은 온 천지 로드 칼레파뿐이십니다.”

용기 내서 한 마디를 쥐어짜자 우르드가 그를 노려봤다.

어디서 시건방지게 로드 칼레파의 잔소리에 말대답하느냐는 눈초리였다.

저만치 거리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불만이면 자리 반납하고 세계 여행이나 떠나. 이런 정원에 곱게 처박혀서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더 훌륭한 효과를 볼 테니까. 스쿨드처럼 말이지.”

“……스쿨드는 디안 케트 님의 유물을 찾으러 내려간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 명목이기는 했지. 지금 그 일은 내가 도맡고 있지만.”

디안 케트의 유물을 로드 칼레파가 대신 찾고 있다고?

얼마나 놀랐던지, 베르단드와 우르드 둘 다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로드 칼레파께서 말입니까? 어째서…… 제가 당장 놈의 멱살을 잡아끌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어. 그런 일로 찾아온 게 아니다, 우르드. 둘 다 이리 와 봐.”

둘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로드 칼레파에게 다가갔다.

수년 만에 돌아온 칼레파는 변함없이 번쩍번쩍 빛이 나는 생김새였다.

천장 틈새에서 떨어진 오색 태양빛에 그의 머리칼이 바다보다 더 푸르게 일렁이는 듯했다.

로드 칼레파는 변함없이 강하고, 정정하다.

그 사실이 두 남자의 심리 안정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마음 깊이 안도하고 있을 때 로드 칼레파가 우르드에게 물었다.

“성역에 심장 결정석이 몇 개 남았지?”

“119개입니다.”

“그중 죄인의 심장을 하나 가져와라.”

“예.”

문을 나선 우르드는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가 로드 칼레파에게 넘긴 심장 결정석은 아주 흔한 진줏빛의 동그란 결정석이었다.

“여기, 신도 펠의 심장입니다. 세 번째 벽을 넘는 도중 이성을 잃고 동기 신도 셋을 살해한 후 자폭했습니다. 혈육이 없어 성역에서 심장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로드 칼레파는 ‘어째서 신도 펠을 싫어하지?’ 따위의 잡스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지금부터 두 칼레파는 내 영혼의 변화를 면밀히 들여다보도록.”

단지 짧은 한마디와 함께 심장을 덥석 집어, 입 안에 털어 넣을 뿐이었다.

우르드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로드 칼레파?”

“음. 조금 쓴데.”

거기에 한술 더 떠 맛까지 음미한다.

“어때. 변화가 있었나?”

베르단드는 고민했다.

‘로드 칼레파께서 긴 삶에 잠시 미치셨나?’

그러나 눈앞의 상황에 정신이 팔린 그와 달리 우르드는 로드 칼레파의 명령을 확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침착한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뗐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혹시, 타인의 심장을 섭식하면 영혼의 균형이 깨지는 것인지요?”

“일단 그럴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

“로드 칼레파께서 심장을 섭식하신 후, 아주 미약하게 영혼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작은 흔들림이었고, 이제는 그조차도 없습니다.”

베르단드는 놀라고 말았다.

심장 결정석은 순수한 애정의 뜻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다.

특수한 이득을 위해 제작되지 않으며, 죽은 가족이나 친구의 의지를 잇고 산 자의 영혼을 건강하게 돌봐 달라는 소망을 담아 몸에 지니게 된다.

따라서 죄인의 심장은 결정석으로 제작되지 않았다. 다만 신도 펠처럼 의도치 않은 살인을 행한 경우에만 예외로 인정받았다.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물건인데. 누구도 입 안에 삼킬 생각을 하지 못했지. 한데 설마 영혼에 영향을 끼칠 줄이야.’

로드 칼레파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을 봐선 이미 알고 있던 사안인 듯했다.

우르드가 뒷말을 덧붙였다.

“영혼이 더 흐릿해졌습니다. 더 강한 심장을 섭식하면 일시적으로 영혼의 형태가 무너질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쓸 만했던 죄인의 심장을 가져와 봐.”

우르드는 이번에 전직 휘였던 신도의 심장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베르단드 역시 로드 칼레파가 심장을 삼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조금 더 길고 거칠게 흔들렸습니다. 잠시나마 흐릿해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럼 내가 너희의 심장을 섭식하면 어찌될 것 같으냐.”

더욱 뛰어난 휘의 심장을 삼키면 어떻게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영혼이 극도로 요동치면서 육체에 타격을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타격이라고 해 봤자 각혈쯤에서 끝나지 않을까요?”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 볼까. 예테가 칼레파의 심장을 섭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지?”

베르단드와 우르드는 확고한 어투로 고개를 저었다.

“죽을 겁니다. 꽤 처참하게요.”

“육체와 영혼 모두 무참히 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진한 녀석들. 반대로는 생각조차 않는 거냐?”

반대? 우르드와 베르단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영혼과 육체의 소멸. 그 반대라면…….

‘……설마.’

베르단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반문했다.

“지금 심장 결정석을 이용해서 죽은 자를 소생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로드 칼레파는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칼레파의 무언은 곧 긍정인 법.

‘꽤 그럴싸한 가설이야. 영혼의 형태가 바뀐다는 건 무너진 영혼을 재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이 정도면 세기의 획기적인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베르단드는 오늘 실험의 결과를 마냥 흥미롭게 여길 수만 없었다.

‘이런 실험은…….’

로드 칼레파답지도, 로궤답지도 않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겁을 집어먹었군.”

낮게 울리는 음성을, 베르단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엄하신 로드 칼레파께서 저희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심을 압니다. 나이를 먹으니 겁만 늘어나더군요. 뵙기 부끄럽습니다.”

로궤의 모든 신도는 로드 칼레파 앞에서 선을 지키고, 부모와 스승만큼이나 공경한다.

그는 강함으로 세계를 주무르려 하지 않는다.

단지 유일의 강자로서 그 자리에 존재했다. 신이 그러하듯 신도들을 굽어살피고 올바른 길로 이끌려 한다.

로궤는 곧 로드 칼레파다. 적어도 현세대에서는 그러했다.

“나라고 다르지 않아. 그래서 고민이지.”

우르드가 의문 어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고민이라고 하시면……?”

“이렇게까지 해서 살려야 하나.”

베르단드와 우르드의 눈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혔다.

‘살려?’

‘누구를?’

금시초문이다. 지난 4년간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저 귀중한 입술에서 사람을 살리느냐 마느냐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궁금하다.’

늙으면 오지랖만 넓어진다더니. 멀쩡했던 입술이 간질간질 씰룩씰룩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떠냐고?”

흐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한 침음 끝에, 간결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귀여워.”

……귀여워?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로드 칼레파는 분명 ‘귀엽다’고 말씀하셨다.

우르드의 저 넋 나간 표정을 보면 제대로 들은 게 분명했다.

“……혹시 외부에서 자식을 보신 겁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저 입에서 저 말이 나올 리가.

로드 칼레파의 연세가 180세에 가까우니 심정의 변화가 생겼을…….

“자식?”

인자하신 로드 칼레파께서 처음으로 살벌한 미소를 지으셨다.

“죽고 싶냐?”

“헉.”

고결한 혀에서 죽고 싶으냐는 말을 나오게 하다니!

눈치껏 바닥에 이마를 박고 엎드리자, 우르드가 한껏 이죽거리며 그를 비난했다.

“한심한 놈. 로드 칼레파께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해? 그대로 코 박고 죽어라.”

본인도 혹시나 싶었던 주제에.

베르단드는 억울함을 삼키고 이마 박기에 온 정신을 다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