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진은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루가 없으니 증명해 보일 수도 없었다. 나중에 검이라도 맞대 줘야겠다.
나는 루의 책상에서 적당한 만년필을 집어 답신을 준비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존재가 다시금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넌 왜 온 거야?”
불만 가득한 표정의 안데르트가 소파에 눕듯이 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그걸 이제야…….”
한 차례 이마를 짚은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경계심이 깃든 어조로 물었다.
“너. 나를 알지?”
이게 미쳤나.
“너? 내가 네 친구야? 누나라고 불러.”
“미쳤냐?”
“미친 건 너지, 이 배은망덕한 자식. 기억을 되찾으면 버드나무 숲에서의 일을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며 쪽팔려 할 놈. 네 기억에 대한 조언을 받으려고 찾아온 모양인데 꿈 깨. 주제 파악 못 하고 친구 먹으려는 자식에게 말해 줄 이야기는 없으니까.”
와. 진이 짧게 감탄했다.
“선배님이 그렇게 길게 말씀하시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안데르트의 시선에 혼란이 가중됐다. 내가 너무 세게 나와서 놀라기라도 한 반응이다.
그는 나의 튼튼하고 멀끔한 양쪽 어깨를 한 번 쳐다보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누구야?”
“누나.”
“누구냐고.”
“누나.”
“씨X. 전생에 원수라도 졌나. 웬 개또라이한테 걸려서는…….”
신경질적으로 챙 모자를 집어 던진 안데르트가 나를 비난했다.
“내가 널 왜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지 설명이라도 해!”
“내가 왜 너의 누나일까? 일단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아. 네 엄마보다 잘 알고 네 아빠보다 잘 알고 네 친구들보다 잘 알지. 나보다 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나는 서랍에서 찾은 편지지를 조금 변형된 남성 필체로 채워 가기 시작하며 뒷말을 이었다.
“얼마나 잘 아냐면, 너도 모르는 네 신체의 비밀까지 알 정도지. 뭔지 궁금해?”
짜증이 극에 달한 안데르트는 거리낌 없이 긍정했다.
“뭔데?”
“여기서 말해도 돼?”
“말해.”
“정말?”
“어.”
“진짜 말한다.”
“어.”
“진짜로?”
안데르트는 살짝 불안해진 얼굴로 악을 질렀다.
“지랄 그만하고 그냥 말하라고!”
“너는.”
“…….”
“짝궁둥이야.”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데르트는 굳은 채로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당연하지. 허를 찔렸을 테니까!
“이제 믿을 수 있겠어? 나는 너보다 연상이고, 노예보다 못했던 네가 주인님으로 모셨던 분이다. 누나가 싫으면 주인님이라고 불러. 안 그러면 과거고 뭐고 귀띔해 줄 일 없을 줄 알아.”
안데르트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짝궁둥이 때문에 살벌해진 건지, 내가 으름장을 놓아서 살벌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내 입으로 직접 친누나라고 밝히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왜냐고?
억울하니까.
‘난 14년을 개고생만 하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정작 그 원흉인 놈은 멀쩡히 살아서 호의호식을 하고 있었어?’
물론, 어느 정도는 내 스스로가 판 무덤임을 인정한다.
그래도 아니꼬운 건 아니꼬운 거잖아?
나는 안데르트가 잊은 과거를 쉽게 들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너는 고생 좀 해 봐야 해……. 붕어 똥처럼 나를 계속 쫓아다니거라. 얌전하게 굴면 떡밥 던지듯 하나둘씩 던져 줄 테니까.
한참 눈썹을 씰룩거리던 안데르트가 방을 나갔다.
쾅!
닫힌 문을 바라보던 진이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진짜인가 보군요. 조금도 흥미롭지 않은 정보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안.
나는 작성 완료한 서신을 봉투에 곱게 넣은 후, 펍 조직원에게 요청해 곧장 예거시에게로 보냈다.
부디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길 바라면서.
* * *
이튿날 밤.
예거시에게 보낸 조직원이 돌아왔다.
그의 답은 ‘무조건 좋다’였다.
마침 아스트로사 왕국행 비행선이 모레 아침 이곳, 미드윈트리 고속 비행정 역을 경유해 가므로 역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다만 예거시는 자기 쪽에서 예기치 못한 동행인이 추가됐다며, 우리 쪽 동행인 또한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맞출 것을 추천했다.
가능한 내 심리 안정과 신분 보장에 도움을 줄 인물로.
‘심리 안정과 신분 보장이라.’
국경 때문에 그런 건가?
마침 오늘 하녀장이 귀족회 소속 웨더우즈 자작의 권력을 휘둘러 ‘데이지 파거’의 신분증명서를 구해 온 참이다.
예거시의 배려는 고맙지만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자리가 남는 건 다행이야. 눈치 보지 않고 진을 데려갈 수 있겠어.’
요점은 세 자리까지 가능하다는 건데.
“안데르트. 너도 로궤로 따라와.”
그가 체스 판을 노려보며 차게 대꾸했다.
“내가 왜?”
이 거머리 녀석의 하루는 아주 일차적이다.
일과를 마치고 루의 저택으로 돌아오면(요즘 나는 내 방이 아니라 루의 저택에서 새벽을 보낸다) “어이. 나는 해산물을 좋아할까, 싫어할까?”부터 “검귀. 나는 불면증이 있을까, 없을까?”까지 별 같잖은 질문을 퍼붓다가 제 할 일을 하러 떠난다.
미드윈트리 곳곳을 쑤시고 다니는 걸로 봐선 내 정보를 모으고 다니는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이미 이 동네는 내 수중에 떨어져 있다.
조직원들이 상인들에게도 미리 경고해 둬서 내 이야기가 쓸데없이 새어 나갈 일은 없단 소리다.
“로궤, 안 가 봤잖아.”
“내가 갔는지 안 갔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안데르트 특징 하나. 정곡을 찔리면 까분다.
안데르트 특징 둘. 위 사실을 지적하면 길길이 날뛴다.
날뛰는 안데르트를 저지하기 귀찮았으므로 그의 구미가 당길 만한 이야기를 제시했다.
“어쩌면 널 죽인 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될지도 몰라.”
체스 말을 손으로 굴리고 있던 녀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내가 죽었었다고?”
“그래.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어서 놀랐지만. 아마 그 여파로 기억을 잃었겠지. 확실해.”
“날 죽인 게 누구지?”
“대마법사 메피스토.”
그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상상도 못 했던 이름이 나와서 놀란 얼굴이다.
“휴가 내고 따라와. 후계자여도 휴가 같은 거 있지?”
“…….”
대답 없이 고심에 빠진 안데르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하녀복을 다리기 시작하면서, 웨더우즈로 돌아오기 전날 말리콥스에게 건넸던 질문을 상기했다.
“할아버지. 로궤에서는 혹시 귀한 물건을 심장이라고 불러?”
“심장?”
“응.”
“로궤에서 심장이라 불리는 물건은 따로 있네. 물론 귀한 물건이기도 하지. 바로 이 물건이야.”
“맞아, 진주! 내가 물어본 게 바로 그 진주야.”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듯하군. 이건 진주가 아니라 심장 결정석이라네. 정확히는 로궤 대대로 내려오는 처리 방식으로 심장을 결정화한 것이지.”
“결정화한다고?”
“우리 로궤는 가족이나 스승, 가까운 친우가 죽으면 심장을 결정화해서 보관하곤 한다네. 그래야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 완벽하게 승화된다고 믿기 때문이지.”
그 말을 듣고 불현듯 깨달았다.
루가 퀸 섬에서 찾고 있던 심장.
혹시 그 심장이, 메피스토가 퀸 섬을 불태운 원인이지 않을까?
‘메피스토의 군대는 로궤에서 내려온 변절자들이라고 했지. 그러니 그들의 수장인 메피스토도 로궤 출신일 확률이 높아.’
드넓은 땅 중에서 하필, 퀸 섬만 콕 집어 공격한 메피스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을 찾기 위해 재가 된 퀸 섬을 방문한 루.
이 모든 게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연관성이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여유롭게 일지를 작성하고 있던 진이 내게 물었다.
“꼭 저 녀석을 데려가야만 합니까, 선배?”
“응.”
“그렇다면 따로 휴가를 요청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이틀간 죽치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장기 휴가를 요청했다는 방증이니까요.”
정말? 이미 휴가까지 냈다고? 날 만나러 오기 위해서?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겠지.’
간절한 안데르트라.
두 번째 짐꾼으로 쓰기 제격이겠다.
“……안데르트. 너 루 씨한테 일기장 빼앗겨서 쪽팔렸어?”
안데르트의 초록빛 안광이 번뜩였다.
“누가 뭐를 해?”
노려보기는.
“자괴감 들 필요 없어. 살면서 루 씨 같은 대단한 마법사를 만나는 거, 절대 쉽지 않거든.”
그 부분만은 안데르트도 대거리하지 않았다.
“루 씨는 로궤 소속의 마법사야. 너도 알지 모르겠지만, 로궤는 벽을 넘은 자들로 이루어진 무인 집단이래. 강자와 마주할 기회라면 돈을 주고라도 잡는 게 검사 아닌가? 네게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진도 마찬가지겠지만.”
“…….”
“그러니까 이왕이면 날 따라와. 휴가 낸 뽕 제대로 뽑게 해 줄 테니까.”
안데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체스 판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끝끝내 거절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아스트로사 왕국으로 떠나는 날 당일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