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피투성이의 데이지를 발견했을 때, 레냐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어, 어.”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는 루가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후에야 정신 차렸다.
이후 앞서 뛰어가 데이지 방의 침대를 정리했다. 데이지를 눕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루는 데이지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다. 레냐는 루의 뒤를 부랴부랴 뒤따라가서, 침대 위 데이지의 상처를 살폈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다.
피를 토했는지 가슴이 붉은색으로 흥건했다.
데이지의 어깨 양쪽은 천으로 질끈 묶인 상태였는데,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아 침구에까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안색은 심각하게 창백하고 호흡은 불규칙했으며 체온은 몹시 낮았다.
‘어쩌다 이런 상처가 생긴 거지? 검성의 기사들 때문인가?’
루는 눈에 보이는 침구를 대충 찢어서 지혈 붕대를 만드느라 바빠 보였다.
칼레파가 저런 자질구레한 일에 능숙하다는 게 놀라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카, 칼레파.”
깨끗한 물을 떠 온 레냐가 용기 내 물었다.
“카, 칼레파. 데이지 님의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건가요?”
루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마치 레냐의 존재를 잊은 듯한 태도였다.
그는 오로지 데이지의 상처를 처치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루의 표정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딱딱했는데, 바라보는 레냐가 덜컥 겁을 집어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레냐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하, 하지만 데이지 님은 저의 부탁으로 나가셨고…… 또, 원인을 알아야 제가 더 잘 도와드릴 수도 있으니까…….”
얼마 뒤. 루는 보는 사람의 기분이 묘해질 만큼, 극히 이질적이면서도 평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날카로운 검에 양쪽 어깨를 찔렸습니다.”
레냐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위대하신 칼레파께서 나 따위에게 말씀을 높이시다니!
짙은 당혹감에 젖어 있던 그녀의 정신은 루가 피에 젖은 천을 벗기기 무섭게 현실로 돌아왔다.
“거, 검이라니! 그럴 수가…….”
깨끗한 붕대를 챙겨 와 상처를 닦고 지혈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뭐지? 지혈했다가 다시 터진 흔적이 있네. 중간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정이 어찌 되었든 지금은 수혈이 시급해 보였다.
“레냐 양.”
“……예? 예? 부, 부르셨나요, 칼레파!”
“바늘과 실.”
바늘과 실?
멍하니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레냐는 황급히 자신의 방에서 재봉 상자와 소독약을 챙겨 왔다.
루는 능숙하게 바늘을 소독했다. 실에도 마법을 걸었던 것 같은데, 치료와 관련된 마법으로 추측됐다.
그가 데이지의 양쪽 어깨를 봉합할 동안 레냐는 데이지 몸 곳곳에 묻은 굳은 피와 먼지, 흙 그리고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봉합이 끝나 갈 즈음에는 창고에서 의료용 마도구를 하나 챙겨 왔다.
침대 옆에 앉아 마도구 상자를 열어 이것저것 물건을 빼내자, 루가 표정 없는 얼굴을 천천히 들어 레냐를 바라봤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져서 절로 입술이 움직여졌다.
“이, 이건 수혈 검진 도구예요. 환자의 혈액형과 마형을 진단할 수 있어요.”
수혈은 오직 혈액형과 마형이 동일한 사람들끼리만 가능하다.
바늘을 뽑아 데이지의 피를 검사하며, 레냐는 부디 자신의 혈액형과 마형이 같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결과는.
삐. 삐.
‘틀렸어. 형질이 완전히 달라.’
레냐는 절망하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주인님을 억지로 깨워서 검진을 부탁드려야 할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변 이웃에게라도? 시간이 꽤 지난 오전이니 부탁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 다짐한 레냐가 수혈 검진 도구를 들고 일어설 때였다.
침대가 작게 한 번 들썩였다.
‘……어?’
거리낌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간 루가 데이지 옆에 자리 잡고 침대맡에 등을 댔다.
그러고는 검진 바늘을 빼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손등을 찔렀다.
“칼레파!”
화들짝 놀란 레냐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어느 누가 감히 칼레파에게 피를 요구한단 말인가?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에 검진 결과가 나왔다.
삐. 삐.
완전 동일이었다.
“세상에. 혀, 혈액형과 마형 모두가 동일해요! 정말 운이 좋네요!”
루는 검진 결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꽤 질긴 운명인데.”
그는 레냐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이대로 수혈을 부탁합니다, 레냐 양.”
덕분에 레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레파의 육신에 ‘감히’ 바늘을 꽂아야만 했다.
심장이 덜커덩거리다 못해 펑 터져 버릴 것 같았으나 어찌저찌 성공할 수 있었다.
‘휴우.’
이것으로 큰 고비는 넘겼어. 레냐는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 내며 데이지와 루의 얼굴을 살짝 훔쳐봤다.
루는 말없이 데이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깊은 수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 순간만은 루가 칼레파 같은 위대한 인물이 아닌, 친우를 걱정하는 평범한 남자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데이지 옆에 있는 루는 그랬다.
‘이야기로 전해 들은 것과는 많이 다른 분 같아.’
푸른 머리에 금안.
레냐에게는 말리콥스에게서 오랫동안 받아 온 가르침이 하나 있었다.
“네 분의 칼레파, 그중에서도 푸른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지닌 분을 뵌다면 최고의 예를 차려라. 거짓말하지 말고, 직접 대화하지 말고, 눈을 마주치지 마라. 그분이 그곳에 계실 때는 그냥 그곳에 계시도록 놔두거라. 무언가 하려 하지 말거라.”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단다.
그것이 바로 푸른 머리의 칼레파란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칼레파라는 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괴물일 줄 알았는데.’
막상 마주한 푸른 머리의 칼레파는 상상과 전혀 달랐다.
일단, 칼레파 ‘루’는 잘 웃었다.
때로는 능글맞고 종종 장난스러웠으며 가끔은 다정했다. 작은 스킨십 정도는 거리낌이 없어 보였고 대화할 때는 조용히 눈을 마주치는 습관이 있었다.
적어도 데이지를 대할 때는.
레냐는 문득 궁금해졌다.
‘데이지 님과 칼레파는 무슨 관계일까?’
칼레파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귀가 까지도록 들어서 안다.
한데 데이지는 그런 칼레파를 허물없이 대하는 데다, 로궤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는데.
‘둘은 가족일까?’
아니면 친구?
혹은 연인?
둘 다 아니라면…….
“레냐 양.”
레냐는 머릿속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예, 예!”
“신도 말리콥스를 데려와 주겠습니까?”
레냐는 허겁지겁 침실을 뛰쳐나가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반대편 복도의 침실로 곧장 달려간 그녀는 주인님의 휴식이고 뭐고, 드러누운 말리콥스의 몸을 뒤흔들어 재빨리 깨워 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게냐, 레냐. 불이라도 났어?”
“카, 칼레파님이…… 시, 신도 말리콥스를 데려오라고……!”
“……신도? 신도 말리콥스라 말씀하셨느냐? 그냥 말리콥스가 아니라?”
“네, 네.”
비몽사몽 일어난 말리콥스는 레냐의 말을 듣자마자 뻗친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고, 장롱 깊숙한 곳에서 새하얀 의복과 초록색 띠를 꺼내 몸에 걸쳤다.
로궤 신도복.
‘주인님이 실제로 저 옷을 입은 모습은 처음 봐.’
침실을 벗어난 말리콥스는 레냐에게 현 상황을 짧게 전해 들었다.
그리고 루의 방 앞에 도착한 즉시 경건한 태도로 멈춰 섰다.
“신도 말리콥스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칼레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정확히 5초 후 말리콥스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침대 앞으로 다가간 그는 루 앞에 두 무릎을 가지런히 꿇은 채 외쳤다.
“칼레파, 칼레파, 칼레파.”
기도문처럼 기나긴 인사가 이어진 후. 루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신도 말리콥스. 심신일체를 몇 경지까지 이뤘지?”
“부끄럽게도 두 번째 경지가 마지막 경지였나이다.”
“예테로군. 괜찮다면 경험담을 들려줄 수 있겠나?”
“예. 첫 번째 경지를 넘은 후에는 영혼이 견고해지고 귀가 트였으며, 두 번째 경지를 넘고서는 육체가 견고해지고 눈이 트였습니다. 로궤식 변별볍에 의하면 두 경지를 넘으면서 제 수명은 총 28세 늘어났습니다.”
로궤는 신의 경지를 추구하는 집단.
모든 신도는 심신일체의 벽을 넘기 위해 일생을 수련에 매달린다.
따라서 로궤의 사제는 심신일체 경지에 따라 네 신분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경지를 넘은 자, 세뇨트.
두 번째 경지를 넘은 자, 예테.
세 번째 경지를 넘은 자, 휘.
마지막으로 반신의 경지에 이른 자, 칼레파.
한 세대에서 칼레파의 숫자는 셋에서 넷 사이로 유지된다.
그러나 반신은 도달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경지이기에, 칼레파의 자리 대부분은 가장 뛰어난 휘들이 대신해 왔다.
그리고 눈앞의 칼레파는.
말리콥스가 알기로, 고작 휘 ‘따위’가 아니었다.
얌전히 고개를 조아린 말리콥스의 머리 위로 루의 나른한 음성이 떨어졌다.
“예테 말리콥스…… 로궤의 또 다른 예테와 휘를 여럿 만나 봤겠지?”
“예.”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다. 두 번째 경지를 넘자마자 육체가 깨진 자를 본 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