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95)

68화

쏴아아아아.

나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 있다.

높이 50m, 너비 600m의 이 대폭포는 해가 뜬 시간이면 사시사철 무지개를 띄울 만큼 웅장했다. 그 비현실적인 크기에 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던 곳은 분명 이 폭포의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절도 안 되는 소박한 폭포였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흠.

모르겠다.

일단 강물을 역으로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폭포 위에 도착하면 뭔가 알아낼지도 모른다.

강가를 따라서 열심히 올라가던 나는 예기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데이지 양? 잘 왔어요. 빨래 양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는데. 와서 도와줘요.]

하녀장이 강가에서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을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에 빠지기엔 빨랫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걸 쓰세요.]

하녀장이 내민 방망이는 루가 내게 빌려준 진주 검이었다. 이걸로 빨래를 치면 확실히 때가 아주 잘 빠지겠어.

나는 개같이 빨래했다.

노동은 100장의 빨랫감을 처리한 후에야 끝났다.

[자, 오늘 일당이에요.]

기쁜 마음으로 일당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죽여.

일당이 왜 루의 진주 검이야?

“……돈으로 줘.”

[봉급은 매달 나가고 있습니다. 이건 선물이에요.]

“필요 없어.”

[앞으로도 이 검으로 우리 웨더우즈를 지켜 주세요, 데이지 양.]

앞으로도 계속 웨더우즈의 집 지키는 개로 일하라는 건가.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검을 받아 들고 다시 강가를 따라 올라갔다.

빌어먹을 공명이 시시때때로 귓전을 쳤다.

-죽여!

“너는 지겹지도 않냐.”

-베어 버려. 찔러!

“너랑 떨어질 수 있어서 하녀 생활이 즐거웠던 건데. 그새 돌아와 버리고. 징한 녀석.”

이 지겨운 목소리가 내 검의 공명이었다니.

나는 이제껏 이 소리가 내가 정신 분열을 일으킬 때 들리는 환청인 줄 알았다.

‘심정이 여러모로 복잡해지네.’

죽이라거나 베라는 말밖에 못 하다니. 정말 검귀다운 공명이라 할 말이 없어질 정도야.

-죽여.

바위 위로 올라서자 지대가 조금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길게 자란 잡초 사이로 은발의 여인이 철퍼덕 주저앉은 모습이 보인다.

과거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동료, 나타샤였다.

날 돌아본 그녀가 밝은 미소를 띠며 외쳤다.

[안데르트? 그 모습은 무엇이지? 마법? 기밀 임무에 나선 건가?]

나타샤는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거대한 서적을 펼쳐 두고 있었다.

여자가 된 나를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건 게 아니야. 이게 원래 내 모습인 거지.”

[뭐?]

“나는 원래 여자야.”

밝히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나타샤는 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여자? 세상에. 놀라운걸, 안데르트.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계획 밖의 일인데……. 잠시 기다려 다오. 펜 로타 황실 법전을 살펴봐야겠으니. 분명히 너와 결혼할 꼼수가 있을 거다.]

“있어도 안 해.”

[어째서? ……아, 그런가. 아무래도 그 모습이라면 라파엘로 쪽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도 네 아이가 궁금하기는 해. 그렇다면 아이는 라파엘로와 낳고 결혼은 나와 하면 되겠군.]

“안 한다고.”

고개를 갸웃한 나타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또 우리를 떠날 건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떤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래서 내 진심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너희가 싫어서 떠나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나는 단지 두려웠어.”

[네가 여자라는 사실이?]

-죽여.

“그래. 그리고 내가 검귀라는 사실도. 언젠가 너희를 내 손으로 죽이게 될지 모르잖아.”

작게 웃은 나타샤가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얇은 여름 의복 안쪽, 빗장뼈 위로 긴 상흔이 보인다.

저 상흔은 내가 만든 상흔이었다. 검을 쥔 채 정신을 놓은 안데르트가, 친구 나타샤에게 남긴 한심함의 흔적.

“정신 차려, 안데르트! 전투는 끝났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진정하고 검을 놔. 나도, 라파엘로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여기 있어. 그러니 검에 먹히지 말거라, 제발.”

나타샤에게 저 상처를 남긴 이후.

나는 한동안 내 손으로 친구들을 죽여 버리는 끔찍한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자책하지 말고 결과를 봐. 그 검은 우리를 죽이지 않았어. 오히려 우리를 살리고 세상을 살렸지.]

“…….”

[이 상흔은 내 자랑이야. 후후. 펜 로타의 역대 황녀들 중 이런 영광스러운 상흔을 지닌 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영웅이 남긴 상흔이라니! 내가 죽은 후 피부만 박제해서 황성에 전시해도 좋을 테지.]

내 악몽이 너에게는 자랑이라니.

-베어 버려.

진심이냐고 묻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나타샤의 미소가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 이런. 수다 삼매경에 너무 깊이 빠졌군. 나는 다시 법전을 살펴보마.]

나는 멍하니 나타샤를 바라봤다.

나타샤는 정말 책, 그러니까, 펜 로타 법전을 읽는 데 푹 빠져 내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강가를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로네.’

기대와 달리 폭포 위는 한산했다.

대단한 광경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강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을 뿐.

아니, 아니다. 저 너머 한 사람이 보인다. 키 큰 남자가 강가에 앉아 낚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번에는 또 누구일까? 가까이 다가선 나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환호하듯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안데르트?”

내 동생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안데르트!”

안데르트.

안데르트!

심사숙고하는 얼굴로 낚시에 집중하던 안데르트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 젠장. 왜 그렇게 시끄럽게 뛰어와? 땅 울리잖아. 고기 다 도망가겠네.]

나는 감격스러운 기분에 잠겼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척 안데르트의 뒷머리를 매만졌다.

“너 언제 이렇게 키가 컸어?”

[원래 컸어, 네가 땅꼬마지.]

“나도 좀 크기는 했지?”

[딱히. 못생겨지기만 했는데.]

-죽여.

[뭐야, 이 목소리는.]

“너도 들려? 얘 입버릇이야.”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보여 주자, 안데르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검을 쏘아봤다.

[뭐 그런 재수 없는 검이 다 있어? 있던 운도 달아나겠네. 강에 던져 버려.]

“뭐? 안 돼. 내 검이 아니…….”

[돼.]

홱, 검을 빼앗아 버린 안데르트가 시원하게 팔을 휘둘렀다.

아름다운 호선이 너른 강 위로 무지개처럼 그려진다. 그 끝은 당연하게도 강에 빠지는 것이었다.

퐁당, 하고 빠지는 물소리가 들리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일었다.

뒤늦게야, 어릴 적의 안데르트가 얼마나 안하무인에 머저리어린애쓰레기떼쓰기 장인이었는지 떠오른 것이다!

“이…….”

안데르트의 뒷머리를 확 잡아당겼다.

“미친 자식이! 내 검 아니라고!”

[아! 씨X, 놔라. 손 놔. 놓으라고 했다.]

“주워 와. 주워 오면 놓는다.”

[놔야 주워 오든 말든 하지!]

그 순간, 물기를 뚝뚝 흘리며 다가온 인물이 있었으니.

[진정하세요, 두 분. 검은 제가 주워 왔습니다.]

-죽여.

강물에서 이제 막 올라온 진이 젖은 옷깃을 짜고 있었다.

쟤는 왜 또 여기 있어? 진이 말했다.

[검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전개라 되묻지 않기가 어렵다.

“뭔데?”

[제게 검을 가르쳐 주세요.]

이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요구.

아,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얘도 검귀였지.’

나는 진의 검을 바라봤다.

-내가 간다. 적이 누구든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다.

검귀임에도 불구하고, 호전적인 공명에서는 선명한 생기가 느껴졌다. 내 공명도 과거의 언젠가는 이렇게 생기 넘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어 버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꼴이 되었지만.

‘……이게 검귀의 말로인 건가?’

검에 휘둘리는 자들은, 결국 검의 목소리에 먹혀 자멸할 운명인 것일까.

내 왼쪽 어깨를 바라봤다.

안데르트의 검이 쑤셔 박힌 부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팔을 타고 흐르는 핏물이 바닥에 떨어져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내 어깨가 보여, 진? 검귀는 검에 능숙해질수록 육체가 혹사당해. 하지만 몸으로 막는 데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완전 동화가 되고 말지. 발버둥 치든 말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다.”

안데르트가 투덜거렸다.

[시끄럽고 지혈이나 해. 이 상처는 갑자기 어디서 생긴 거야?]

“네 생각은 뻔해. 검을 휘두르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겠지? 하지만 네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준 후에도 계속 상관없을 수 있을까?”

[지혈이나 하라고.]

[그래서 선배님께 배움을 청하는 겁니다.]

-죽여.

진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끝끝내는 선배님처럼 이겨 낼 수 있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지랄.]

우리의 시선이 안데르트에게로 모아졌다.

[이제는 별 같잖은 검귀까지 붙어서 염병 떠네. 내놔, 이딴 건 그냥 버려!]

안데르트가 빼앗은 검이 재차 긴 호선을 그리며 강물에 빠졌다.

풍덩. 검이 다소곳하게 빠지자, 진이 진심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버클리그레이튼 가문 제일의 미친개다우시군요.]

“안데르트. 너는 왜 자꾸 흥분하는 거야?”

내 물음에 안데르트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왜? 흥분하면 안 돼? 나 때문에 든 검이잖아. 내가 죽어서 쥔 검, 아니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너한테 검을 쓰라 마라 요구하지?]

정곡이 찔리면 혀가 굳어 버리는구나.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안데르트의 어투가 조금은 다정해졌다.

[누나.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검귀의 말. 그 말 고작 몇 마디로 갈대처럼 흔들릴 마음이면 버리는 게 나아. 아니, 버려.]

[머리에 피 마르면 죽습니다, 가로쉬 군.]

진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한 안데르트가 내 오른쪽 어깨를 틀어막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검 같은 건 버리라고. 검을 휘둘렀던 시간 따위 없던 일로 해. 너 좋다는 하녀로 그냥 살아.]

가만히 두 눈을 깜빡였다.

‘없던 일로 하라고?’

검을 휘두르고 살았던 시간도. 검귀였던 과거의 나도 전부 버리라고?

-베어 버려.

틀린 말은 아니다. 검의 공명은 날이 갈수록 사나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검에 완전히 먹혀, 완전 동화를 이룬 괴물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검은.

“제기랄, 이 손 놓지 못해? 기다려! 당장 멈춰, 안데르트! 네가 죽을 수는 없다! 너를 이딴 식으로 죽게 놔두지 않아!”

“네가 별을 따 오라면 따 오겠다. 나의 비이자 다가올 미래, 펜 로타 제국의 국부가 되어 다오. 내 일평생을 바쳐 너를 지키고 아끼겠다.”

……검귀로 살아온 그 시간들은.

“돼, 됐어……. 나를 놓고 가. 대, 대신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해 줘…….”

“안데르트 님! 잔을 더 높게 들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모두 나인데.

내게 있어 검은 쇠꼬챙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웨더우즈라는 새로운 삶을 보호할 방패이자 친구들을 지켜 온 무기.

그리고 내가 살아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증명해 주는 목소리.

-베어 버려.

그러니까 절대 버릴 수 없어.

나는 강물에 뛰어들었다.

[……누나? 잠깐, 미친, 어디 가!]

[선배님!]

차가운 수온에 양팔의 어깨가 쿡쿡 쑤셔 온다. 그 통증을 무시하고 더, 더 깊은 수심으로 내려갔다.

내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으로.

-죽여.

어둠 속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잔상이 보였다.

검이다.

저게 내 검이자, 내가 검귀로 살아온 시간이며,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과거였다.

-죽여.

점차 가까워지는 잔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무지 이 검을 버릴 수 없다. 버릴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견뎌 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죽…….

이 검의 공명은 곧 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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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영혼에 힘이 깃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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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