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가로쉬는 허공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더 이상의 출혈이 없도록 응급 처치한 후 이 검귀를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한데 폭포 위에서 하나둘 뛰어내려야 할 기사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가로쉬는 주위가 수상할 만큼 고요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근처에 있다.
‘기사들은 전부 죽었나?’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고민은 짧았다. 그는 일단 검귀를 뭍 위로 올린 후 소매를 찢었다. 어깨의 출혈을 막아야 했다.
의복에 가려져 있던 하얀 피부가 드러나자, 가로쉬는 두 번째 혼란을 맞이했다.
이건 검을 휘두르는 자의 손이 아니다.
여자치고 근육은 탄탄했고, 심지어 길도 잘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검을 휘두를 수 없다.
‘이 검귀 대체 뭐지?’
애써 무시했던 의구심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댐 무너지듯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금고에서 기어 나온 위험 인자를 처리할 마음이었다.
그는 검성으로부터 중요 기밀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후발대로부터 보고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보고 근방에서 놈이 빠져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 보자. 우리 가로쉬의 빗장뼈 위에는 점이 하나 있다는 것? 안 어울리게도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 아니면 우유를 마시면 한동안 복통으로 고생한다는 것? 이 정도면 꽤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제는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 궁금해졌을 거야. 맞지?”
맞다. 전부 옳다. 빠짐없는 사실이었다.
‘어이가 없군.’
그래서 더욱 이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놀랍게도 ‘궁금하다’는 감정을 인지하기 무섭게,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욕구가 소란스레 삐걱거리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잊어버린 과거를 찾고 싶은 욕구가.
‘빌어먹을 여자. 그간 억지로 참아 왔는데.’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이라는 이름의 새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 악물고 억지로 무시해 왔는데.
가로쉬는 찢어 낸 소매로 검귀의 왼쪽 어깨를 단단히 동여맸다. 이어서 나머지 소매도 찢으려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낯선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웬 키 큰 남자가 검귀 맞은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파란 머리.
그리고 놀랍게도, 잠옷 차림.
‘이자가 검귀가 말한 그 파란 머리의 남자인가.’
일단 외관만으로 반쯤 미쳐 보이는 걸 봐선 확실했다.
하지만 가로쉬는 낯선 이의 파격적인 머리색보다도, 머리칼 아래에 자리한 호화로운 이목구비에 더 놀랐다.
살면서 눈앞의 얼굴처럼 소름 돋게 아름답고 우울한 구조는 처음 봤다. 같은 남자를 보고 얼탔다는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였다.
잠옷 차림 같은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분홍색 실내화조차.
“앉아.”
뭐야, 이 또라이는.
오늘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 많이 생긴다.
남자의 ‘명령’에 거부하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게 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
가로쉬는 마법에 저항하기 위해 근성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웬만한 마법은 근성으로 풀고는 했는데, 이 남자의 마법은 풀리지 않는다.
“하아.”
씨X. 별 개같은 일만 연달아 일어나는군.
무력해지는 기분은 익숙지 않다.
그래서 불쾌했다. 심지어 파란 머리의 마법사는 그다지 관심 없는 눈길로 그의 낯짝을 꾸역꾸역 뜯어보고 있었다. 두 배로 불쾌해졌다.
“닮았나? 아니, 그다지…… 연상되지는 않는데.”
검귀와 미친 마법사. 적당한 조합이다.
반쯤 포기한 채 편히 자리한 가로쉬는 남자의 왼손에 덜렁덜렁 매달린 물건을 발견했다.
디안 케트의 일기장.
그의 눈매가 얇게 좁혀졌다.
검성의 명령에 따라 직접 보고로 들어가 챙겨 온 물건이 이 남자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검귀의 목적도 이 일기장이었던 건가.’
마법사는 걸치고 있던 로브 형식의 외투를 길게 찢어 검귀의 오른쪽 어깨를 지혈했다. 무표정이 차가웠다.
놀랍게도 천을 동여매는 손짓 몇 번에 콸콸 새어 나오던 피가 금세 잦아들었다.
“너희는 누구냐.”
대답이 없다.
“그 물건이 목적이었던 건가? 다른 놈들은 전부 죽였나?”
역시 대답이 없다.
“씨X, 아무 대답이나 해 봐. 혼자선 잘도 지껄였으면서 질문에 대답은 못 해?”
마법사는 그제야 조금 납득하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음. 성격은 조금 닮았을지도.”
“너도 이 검귀와 아주 닮았어. 미친놈처럼 주절거리는 꼴이 아주 판박이야. 어?”
후. 마법사가 처음으로 웃었다.
“이제 보니 꽤 쓸 만한 인재였군.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마스터의 문턱에서 막히겠어. 평생.”
“사기꾼 점쟁이였냐?”
“검을 통제하고 검에 통제당하는 건 한 끗 차이야. 마스터는 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경지. 즉, 검과 하나가 되는 경지다. 사람들은 이 경지를 공명 혹은 동화라 부르지.”
마법사 주제에 검을 운운하다니. 고양이가 개뼈다귀를 운운하는 꼴이다.
“너는 이 검귀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가로쉬는 제 앞에 시체처럼 누운 검귀를 가볍게 턱짓했다.
“이봐, 마법사. 공명은 옳지 않아. 검사는 본능적으로 검의 목소리에 이끌린다. 거부하기 힘들어. 공명이 강하고, 오래 지속될수록 검사는 검의 지배권을 잃지. 검귀가 되는 거다.”
그리고 검의 지배권을 모두 잃게 됐을 때 겪는 현상이 완전 동화였다.
가로쉬는 진을 떠올렸다.
진은 검사가 어떻게 검귀가 되는지 보여 주는 훌륭한 표본이었다.
검성은 수차례 진에게 경고해 왔다.
검을 버리지 않는 한, 검귀의 말로는 언제나 똑같다고. 그러니 검을 버릴 생각이 없다면 검귀의 길을 걷지 말라고.
결국은 무시하고 집을 나가 버렸지만.
“네 세상은 검고 희기만 한가?”
픽 웃은 마법사가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렸다.
“힘은 균형이다.”
가지런한 손톱 끝에서 진주보다 살짝 큰 크기의 두 구체가 떠올랐다. 하나는 흰색 나머지 하나는 검은색이었다.
‘무언 마법.’
역시,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던 건가.
그의 솜털이 긴장으로 바짝 섰다.
“완벽하게 검은 것은 흰색을 품지 못한다. 또 티끌 없이 흰 것은 검은색을 품지 못해. 따라서 검은 것만 추구하는 자는 검은색만 찾고, 흰 것만 추구하는 자는 흰색만을 찾는다. 두 가지를 얻지 못하고 한 가지만 얻는데 어찌 완벽하다 할 수 있을까? 그건 완벽한 게 아니야. 위태로운 거지.”
검은 구와 흰 구가 겹쳤다. 하나로 합쳐진 구는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검은 것과 흰 것. 이 둘 모두를 추구했을 때 균형이 이루어진다. 힘도 똑같아. 검을 휘두르고, 검에게 휘둘려져야 하지.”
검을 통제하고, 검에게서 통제당하는 일.
“……어려운 말을 하는군.”
말뿐만이 아니다.
가로쉬는 그가 직면한 상황을 당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름 모를 사이비와 얼굴을 맞대고 뭔 짓거리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마법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습게도, 남자의 주장이 퍽 흥미롭게 들렸던 것이다.
힘과 균형. 당연한 논리다.
하지만 이제껏 그가 배워 온 검성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주장이기도 했다.
“말은 누구나 쉽게 해. 한마디로 검귀가 되어서 검에 잡아먹히지 말라는 뜻이잖아?”
“말은 누구나 쉽다고? 네가 검귀라 부른 이 여자도 그래 보이는가?”
“…….”
“이 여자는 네 말대로 검귀가 되었지만, 검에 잡아먹히지는 않았지. 검을 휘두르고 검에 휘둘렸으니. 어딜 가서 검을 완벽하게 안다 자부해도 그 누구도 반발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
“너는 네 검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 들어 봤나?”
“아니. 내 검은 공명하지 않아.”
“그렇다면 너는 네 검을 모르겠군.”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가로쉬는 인질처럼 꿇린 자신의 처지도 잊고, 허공에 둥둥 뜬 회색 구를 말없이 바라봤다.
마법사가 남긴 말들은 이상하게도 그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시간을 가늠하듯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법사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가도 좋아.”
경직되어 있던 육신이 마법처럼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가로쉬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찝찝했다.
이대로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법사를 후려치고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는다.
‘내가 언제 확신을 갖고 행동했다고.’
어찌 되었든 유물을 챙겨 가는 것이 그의 임무. 따라서 불가능하더라도 빼앗아야만 한다.
그리 마음먹은 가로쉬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급하지 않다면 이곳에 머물러 이 검귀를 지켜봐도 좋고.”
“……지켜보라고?”
“그래. 네 생에 몇 없을 흥미로운 구경을 할 기회일 테니까.”
구경이라니.
기실 마법사는 처음부터 계속 검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주제에 검을 아느니 모르느니 훈수를 둔 게 신기했다.
‘검귀를 지켜보라는 뜻인가.’
가로쉬는 엉덩이를 들썩이다 말고 남자 건너편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래.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라면 조금 늦장을 부리다 죽어도 괜찮겠지.
마법사가 그러했듯, 그 역시 검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