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95)

66화

-죽이고.

내 동생은…….

-베어 버려.

…….

검을 쥔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손은 요동치지 않는다.

조용하다.

그럼에도 나는 제어하기 힘든 떨림을 느꼈다. 머리는 이성을 되찾았지만 몸은 검귀의 본능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검과 동화되고 말 터였다.

‘……너무 오랜만에 검을 들었어. 예전만큼 통제되지 않아.’

검귀.

검을 휘두르는 자가 아닌 검에 휘둘리는 자.

-죽여.

검귀가 장시간 검과의 동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완전 동화’ 상태에 빠진다.

사람의 이성을 상실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저 베기만 하는, 잔혹한 검의 짐승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완전 동화에 빠진 검귀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다.

사냥 대상으로 지정돼 몰이 당하고, 죽는다. 다른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신일체를 통해 ‘나’를 깨달은 것으로는 검귀의 본능을 완벽하게 억누를 수 없는 걸까?’

-베어 버려라.

시끄러운 이명이 뇌리를 감싼다. 검귀의 본능이 재차 내 이성을…….

콰아앙!

그때, 나와 같은 흑색의 검기가 뺨을 스치고 폭포로 날아갔다.

쿠구우웅……. 폭포 뒤편의 바위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이, 여자. 넋 빼지 말고 정신 차려.”

남자, 아니, 안데르트가 심히 떫은 기색으로 검을 겨누었다.

“도와줄 테니 거기서 빠져나와. 너 같은 게 완전 동화되면 아주 귀찮아지니까 정신 단단히 붙들라고. 웨스트윈트리를 학살하고 싶을 만큼 미친 검귀는 아니잖아?”

-죽여.

더 큰 통증이 필요해.

나는 어깨의 검상 틈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그렇기야 하지.”

전에 없던 인기척들이 무더기로 다가온 것 역시 그즈음이었다.

이제 막 도착한 세 명의 기사가 폭포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봤다.

“가로쉬 님!”

안데르트는 금방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기사들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늦장 부린 쓰레기들은 내려오지 말고 저리 꺼져.”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만이고 꺼져. 괜히 휘말려서 죽기 싫으면.”

싸늘한 명령에 기사들이 얌전히 물러섰다.

“하. 이젠 별짓을 다…… 씨발, 귀찮아졌네. 완전 동화에 빠지려는 검귀를 어떤 식으로 빼내더라?”

“일단 동화 현상을 멈추기 위해 아무 말이나 시켜야지.”

안데르트는 친절히 답을 내어 준 날 차갑게 노려봤다.

“이 팔자 좋은 미친 검귀가. 그래, 말을 시키라고? 원하는 대로 실컷 시켜 주마. 너 방금 나를 안데르트라고 불렀지? 나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 너는 지금 사람을 착각하고 있어.”

-베어 버려.

“착각?”

“그래, 착각이다. 종종 날 ‘그 남자’로 오인하는 놈들이 있지. 영웅 안데르트 파거로. 눈알이 삔 것도 아니고. 착각을 해도 죽은 놈과 착각해?”

-죽여.

얘 봐라. 안데르트를 안데르트로 오인했다고 화내네.

풉.

“푸핫……! 아, 아야야.”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입이 꽉 다물렸다.

아, 마음껏 웃고 싶은데 웃지 못하는 몸이라니. 어깨를 뚫린 검사의 삶이 이토록 처참하다.

“아, 아.”

나는 어깨에 박아 넣은 손가락을 뺀 채 두 발을 동동 굴렀다.

안데르트가 그런 나를 머리에 꽃을 단 미친년 보듯 바라봤다.

너무 아파서 머리가 더 맑아졌어.

아파야만 이성을 유지하는 검귀의 삶이 이토록 고역스럽다.

“후우. 착각? 그게 아니지. 가로쉬라는 이름이야말로 네 착각이야. 널 가로쉬로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널 오인하고 있는 거라고. 너는 가로쉬가 아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는 안데르트가 아닌 ‘가로쉬’를 마주했다.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가장 유력한 차기 후계자. 검의 천재라 불려도 손색없는 진 버클리그레이튼과 비교해도, 월등한 재능을 지닌 청년.

그리고 아마, 검성의 명령을 받아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훔쳤을 인물.

나는 다시 가로쉬가 아닌 ‘안데르트’를 바라봤다.

안데르트 파거.

스물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고향인 퀸 섬을 지키기 위해서 제국군에 입대한 소년. 1년 만에 전사했으나 섬 자체가 불에 타 시체도 찾지 못한 소년.

그리고 내 하나뿐인 가족.

내가 지키지 못한 가족.

‘한데 죽지 않고 살아 있던 거야.’

하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어떠랴?

죽은 동생이 살아 돌아왔는데, 기억 따위가 대수일까.

기억은 쥐어패면 돌아온다. 남동생은 원래 그렇다.

“너.”

안데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죽일 듯 쏘아봤다.

하나도 안 무섭다, 가족도 기억 못 하는 이 패륜아 자식아.

“나를 아는군.”

“그럼. 아주 잘 알아. 네 본명은 가로쉬가 아니야. 아마 검성이 준 이름이겠지? 최악이네. 산지기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름이야. 검성이 원래 그런 쪽 센스는 구려.”

“…….”

“내가 너를 얼마나 잘 알까? 생각나는 것부터 말해 볼까? 어디 보자. 우리 가로쉬의 빗장뼈 위에는 점이 하나 있다는 것? 안 어울리게도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 아니면 우유를 마시면 한동안 복통으로 고생한다는 것? 이 정도면 꽤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제는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 궁금해졌을 거야. 맞지?”

안데르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저 얼굴도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

“궁금하지?”

아닌 척 냉랭한 표정을 짓지만, 가족인 나는 안다. 궁금해서 똥줄 탈 지경이라는 걸.

“궁금하면.”

습한 한기가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안데르트의 양쪽 귀가 활짝 열린 게 느껴진다.

그는 지금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괴롭히고 싶다.’

저 궁금하지 않은 척 새침 떼는 낯짝을 보자 아주 열렬히 괴롭히고 싶어진다. 사라졌던 누나로서의 가족애가 꿈틀거린다!

“60초 후에 공개.”

“……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구멍에서 무언가 역류했다.

“우윽.”

피였다.

분수처럼 터진 피는 내 가슴을 전부 적시고도 모자라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뇌와 심장이 조여진다. 몸의 중심축이 무너지면서 사지의 힘이 빠졌다.

-죽여.

이런.

‘대화가 잘 이어지기에 완전 동화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착오였다.

‘검귀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건가?’

너무 길어서 대화 따위로 동화를 막을 수 없었다. 머리로 열기가 몰리기 시작한다.

이명과 소음이 세상을 둘러쌌다.

-죽이고 베어 버려.

어쩔 수 없다.

입가를 닦아 낸 나는 검을 빼어 든 채 긴장한 낯을 한 안데르트에게 당부했다.

“방금 그 말은 취소야. 다시 말할게. 궁금, 궁금……하면, 내가 쓰러질 때 머리부터…… 받아.”

“이봐.”

안데르트의 반문은 들리지 않았다.

들려오기 전에 내가 쥔 검이 나머지 오른쪽 어깨도 꿰뚫은 까닭이다.

어지럽다. 피가 구멍 뚫린 듯 새어 나갔으니 당연했다.

출혈을 겪은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과다 출혈은 완전 동화를 막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사실상 죽을 확률이 더 높아서 선택할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검귀가 되어 안데르트를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다음이, 가장 중요해. 이 근방……에서 헤매고 있을 파란 머리의 남자를 데려와.”

“…….”

“안데르트.”

항시 냉정하던 안데르트의 눈에 옅은 혼란이 피어올랐다.

“너는.”

떠나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시야가 닫혔다. 나는 마지막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 * *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가로쉬는 짧은 의문에 휩싸였다.

왜 그의 다리는 멋대로 움직이는가?

기실 가로쉬는 눈앞에서 정신 나간 소리만 쉼 없이 지껄이던 검귀의 요구에 따를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이고 몸은 몸이다.

정신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쓰러진 검귀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차갑다.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데.’

상태가 심히 좋지 않다.

양쪽 어깨에 구멍이 뚫린 건 둘째 치고, 각혈한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자결인가?’

종종 그런 검귀가 있기는 하다. 완전 동화되기 직전에 죽음을 택하는 자들.

가로쉬도 딱 한 번 보았다.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그 검귀는 전쟁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자였다.

실전 모의 훈련 중 완전 동화 상태에 빠진 그는 이성을 완전히 잃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이 검귀는 의문스러우리만치 검에 능숙하다. 그런 자가 목도, 심장 부근도 아닌 어깨를 뚫었다는 건 일단 죽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 근방……에서 헤매고 있을 파란 머리의 남자를 데려와.”

그것으로 모자라 뒤처리까지 맡기다니.

마른 뺨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날 머저리로 봐도 유분수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