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95)

5화

그때, 상념을 가르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 다오.”

“…….”

“임무에 실패한 데다 자결까지 실패했으니, 나는 지금부터 도망자 신세다. 이대로 나를 보내 준다면 네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 너에 대해서도 입도 뻥긋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필요하다면 복종의 맹세도 하겠다.”

응, 필요 없어.

나는 암살자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기절시킨 후 고민했다. 이놈을 어쩌지.

‘죽일까?’

선뜻 실행에 옮기자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의뢰인은 암살자를 최소 세 번 이상 보내온 놈이었다. 이대로 암살자를 죽이면 다른 암살자가 찾아올 게 분명했다. 또 귀찮아지는 거지.

그러니까 이 녀석도 일단 붙잡아 두자.

방 안에 둘까 싶었지만 금방 포기했다. 만에 하나 하녀장에게 걸린다면 이 저택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요원했으므로 하녀장에게만은 잘 보여야 했다.

어디에 숨겨 둘까 고민하던 차.

창문 너머 앞집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2층의 비스듬히 열린 창문을.

“음.”

오늘 오후에 이사했으니, 새 집주인이 들어오는 데 최소 며칠은 걸리겠지.

나는 침입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창문을 통해 저택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앞 저택의 담장을 넘어, 벽을 타고 올라가, 2층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를 덮고 있는 흰 천을 당겨 침입자와 침대를 한 몸처럼 엮었다. 입까지 완벽하게 봉쇄한 후 창문을 닫고 침실로 돌아왔다.

“하아.”

이 저택에 마가 꼈나?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침대에 눕자 옅은 의문이 들었다.

의뢰인은 무슨 연유로 웨더우즈 자작을 감시하려는 걸까?

이튿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이 훌륭한 직장, 웨더우즈 저택에는 오전 9시에 짧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홀짝이는 멋진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맛(이 저세상에)있는 식사 후 짧은 여유를 즐길 휴식이 주어졌다.

창밖에 펼쳐진 뜻밖의 풍경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저거 설마.

“……이사?”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자, 신문 정독에 정신 팔려 있던 하녀장이 고개를 돌렸다.

“음? 아, 건너편의 에슐라 저택 말하는 건가요? 어제부로 에슐라 가문이 짐을 뺐으니 에슐라 저택이라 부르기도 뭐하네요. 한데 하루 만에 새 가족이 들어올 줄이야. 꽤 갑작스러운 매매였나 봐요.”

그렇다. 이사로 텅 비어 있어야 할 건너편 저택이 가구를 옮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것이다.

하루 만에 사람이 들어왔다고? 어제 짐이 빠졌는데? 이럴 수가.

“안일했다.”

“뭐라고요? 자꾸 혼자 중얼거리지 마세요, 데이지 양. 고용인에게는 좋은 습관이 아니에요.”

습관이고 자시고, 저 저택에는 자정에 감금해 둔 침입자가 묶여 있었다.

나는 찻물을 한입에 비운 후 침실로 뛰어갔다. 당장 쳐들어가 데려오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일단 상황을 살펴야 한다.

내 침실은 2층 구석에 자리하지만, 건너편 저택의 전경을 살피기에 적격이었다. 창문 앞에 착 달라붙어 건너편 저택을 살폈다.

시종들이 바쁘게 오고 가는 현관.

어디 가문의 어디 소정원과 달리 꽤 번듯하게 정리된 화단.

화단 한가운데 놓인 원형 테이블에서 차와 독서를 즐기고 있는 미지의 남성.

그자의 오묘한 푸른색 머리칼에 놀라기도 잠시, 곁에서 곱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침입자가 보였다.

‘뭐야, 쟤는 왜 저기에 있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푸른 머리칼의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자는 봄날의 쾌청한 하늘도, 웨더우즈 저택의 전경도 아닌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한 푸른색 머리칼만큼이나 이질적이고 화려한 금색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었다.

뾰족한 코끝과 깊게 들어간 눈매가 묘하게 우울하면서 고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 눈.

내 표정.

내 외관을 샅샅이 훑는 게 느껴질 만큼 뚜렷하고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피식 올라가는 남성의 입꼬리가 마치 하녀복을 걸친 내 모습을 조롱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불쾌감에 창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타인과의 첫 만남에서 불쾌함이라는, 이토록 특별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 몹시 오랜만의 일이란 사실을.

“……역시.”

이 저택에는 마가 꼈어.

한때였다지만, 검성이라 불린 자와 나름 대등하게 검을 맞댈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랐던 나다. 그런 내게 이토록 강렬하고 부정적인 존재감을 각인한다는 건…….

‘빌어먹게 수상한 자라는 뜻이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침입자의 신상 탈환은 포기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거야. 어제의 일은 싸악 잊어버리자.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돌아온 나는 찻잔에 새 홍차를 따랐다.

“데이지 양? 급하게 나가더니. 어디를 다녀왔나요?”

“소변.”

“그런 건 에둘러 표현하세요.”

좋아. 이대로 자연스럽게 웨더우즈 저택의 하녀처럼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의 초인종이 울렸다.

“……초인종? 고장 난 지 1년이 넘었을 텐데?”

의아한 얼굴로 일어선 하녀장이 현관으로 나갔다. 나는 웨더우즈 저택의 하녀로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뒤따랐다.

정문 너머, 압도적인 신장의 인영이 보였다. 실루엣만 확인했는데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확실하게 좋지 않았다.

“누구시죠? 공교롭게도 웨더우즈 자작님은 저택에 안 계십니다. 약속을 잡으신 후 다음에 다시 찾아와 주…….”

철컹. 철창이 열리자 눈부신 자태의 미모가 태양빛처럼 쏟아졌다.

단호하게 이어지던 하녀장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도시의 신사처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푸른 머리칼의 남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접니다.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정원사 겸 요리사.”

하녀장이 아닌 나를 바라보면서.

그게 나와 ‘루’의 첫 만남이었다.

수상해.

그냥 수상한 것도 아니다. 미치도록 수상하다.

전쟁터에서 구를 대로 구른 내 오감이 ‘루’라는 고상하고 독특한 이름을 지닌 이 남성을 향해서 아주 요란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옆으로 봐도 보통 인물이 아니니, 필시 조심하라고.

나는 본능이 보내는 경고에 깊이 동의하는 바였다.

일단 이 ‘루’는 외관부터 수상했다.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하녀장뿐만 아니라, 대여섯 걸음 멀찍이 서 있던 나 역시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입을 정도였다.

조금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만, 루는 쳐다보는 이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힐 정도로 지독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랬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닌 진실이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푸른 머리칼도 그 미모에 걸쳐지니 군더더기 없이 화려하게만 느껴졌다.

어둡고 세련된 선으로 조화를 이루는 이목구비는 또 어떻고? 태양에 반짝이는 바다처럼 금빛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는 어떻고? 그럼에도 어딘가 나른하며 가라앉아 보이는 시선은 어떻고?

이러다가 종일 찬미만 하게 될 것 같아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당신이…….”

“인력 사무소를 통해 구직하게 된 루입니다. 그쪽은 시녀장……일 리 없고,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하녀장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예. 요리사요. 요리사 겸 정원사.”

“미안합니다,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이해합니다. 나처럼 눈이 멀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이런 다 죽어 가는 저택의 요리사나 정원사 따위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다는 말씀이시겠죠.”

“…….”

“하지만 사실이니까 받아들이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녀장.”

우아하게 웃은 남성이 이내 나를 돌아봤다.

건너편의 에슐라 저택에서, 웨더우즈 저택 2층 창가에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처럼.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 여상하게.

“그리고 이쪽은?”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능적이면서도 철저히 경험에 의한 거부감이었다.

그래서 통성명을 요청한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답을 회피했다.

“하녀.”

“이름이 하녀인가요? 개성적인데.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하녀인 하녀 양.”

이 자식. 얼굴만큼 성격도 심상치 않다. 개차반일 확률이 농후해 보였다.

“하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하녀장이 내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마른세수를 하는 걸 보면, 보통 뻔뻔한 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제집 드나드는 양, 정문 안쪽으로 걸어오더니 개판이나 다름없는 소정원을 쭈욱 둘러봤다.

“흐음. 한 가지만 묻죠. 여기 정원은 혹시 쓰레기장이 콘셉트입니까?”

퍼뜩 정신 차린 하녀장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면 당신을 고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루 씨. 그러고 보니 짐이 보이지 않네요. 설마 당신도 옷가지 하나만 걸치고 맨몸으로 들어온 건가요?”

“아니요.”

“다행이네요. 시종복이 몇 벌 남아 있기는 한데, 루 씨의 신장이 워낙 커서 절대 맞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럼 우선 올라갈까요? 당신이 지낼 방부터 소개해 주겠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일하되 잠자리까지 해결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녀장.”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싱긋 웃은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서 철창 너머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오늘부로 저 집에 이사 왔거든요.”

그가 가리킨 장소는 통상 앞집이라 불리는 저택이었다.

“그러니까 출퇴근하겠습니다. 몇 시에 나오면 됩니까?”

하녀장은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어서 그녀는 믿기지 않는 투로 루에게 되물었다.

“에슐라 저택을 매입한 이가 당신이었나요? 그 정도로 부유한 자가 고용인을 자처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일하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대체로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묻지 않을 수 없겠네요.”

턱을 쓸던 루가 성의 없이 답했다.

“취미라고 해 두죠.”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