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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95)

4화

식재료를 사서 저택으로 돌아오자 하녀장이 나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늦었군요.”

“초행.”

오늘 저녁은 야채 스튜였다.

내가 감자 껍질을 깎는 동안 하녀장은 당근과 양파를 손질하고 스튜의 간을 맞추었다.

식탁에 앉아 따뜻한 김이 폴폴 나는 스튜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는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 따뜻한 음식을 얼마 만에 맛보는 거지? 심지어 식기도 있잖아.’

그런데 우리만 먹어?

“참고로 주인님께서는 식사를 알아서 챙겨 드시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네.

나는 스튜를 한 술 떠서 맛을 음미하고 삼켰다.

거지처럼 살던 나도 깜짝 놀랄 만큼 놀라운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맛없어.”

“맛없어?”

“요.”

“그런 감상은 속으로만 하세요. 나는 원래 요리에 소질이 없으니까.”

우리는 말없이 접시를 비웠다. 참고로 내가 비우는 접시는 세 접시째였는데, 하녀장은 쉬지 않고 식사하는 노예의 모습을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지만, 데이지 양 같은 하녀는 처음 보네요. 자랑은 아니나 웨더우즈 저택을 오고 간 하녀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대체로 단기에 그만두거나, 도망쳤죠.”

왜 도망쳤는지 알 것 같은데. 대답하기 미묘해 스푼만 계속 움직였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나요?”

어쩌다 하게 됐냐고?

군인들의 도움으로 퀸 섬을 탈출한 내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먹고살 돈이 없다는 것.

고향이자 집인 퀸 섬은 오래전에 불탔고, 10년 동안 사용하던 남동생의 신분도 잃은 나는 돈을 구할 곳이 요원했다.

연고도 없고 기술도 없는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공장은 소개장이 없으면 취직할 수 없으며 농장은 비수기가 있어 1년 내내 일할 곳이 못 된다. 가게 종업원은 숙박을 제공받지 못하므로, 숙식과 돈을 함께 구할 방법은 하녀가 되는 길뿐이었다.

구태여 안경 면접관에게 ‘악독한 고용주를 원한다’고 대답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 곳에서라도 일해야만 하는 처지였으므로.

‘하녀라.’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내게 주어진 시간은 3년에 불과했고, 그 수명을 늘리려면 이 미드윈트리라는 도시에서 찾아야 할 ‘물건’이 있었으니까.

돈을 모아 호사를 누릴 생각도 없었기에 먹고살 만한 돈,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를 쳐다보는 하녀장의 눈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모두들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지 않겠어요?”

집도 없고 돈도 없어서, 라고 답하려던 생각을 고치고 곱게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빈털터리란 사실을 티 내면 더 노예처럼 굴려질지도 몰라.’

그냥 사연 넘치는 사람인 척하자. 불쌍해서 일을 덜 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다음 날.

하녀장의 명에 따라 개처럼 저택을 청소했다.

“데이지 양은 힘과 체력이 참 좋네요. 오늘은 2층 천장의 먼지를 닦을 거예요. 그거 알아요? 너무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으면 천장에도 먼지가 쌓인다는 거.”

저녁 식사 후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새로운 해가 떠 있었다. 실화야? 전쟁터에서 굴렀을 때 이후로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다다음 날.

오늘은 개가 아닌 소처럼 일했다.

“내일 오전에는 새로운 고용인이 도착할 겁니다. 오늘보다 일정이 더 고될 테니 1시간 정도 일찍 마무리할 예정이에요. 일단 각 방의 벽난로부터 청소하죠.”

사흘쯤 되니 하녀 일이 제법 익숙해졌다.

이제 슬슬 미드윈트리에 온 ‘목적’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하녀장과 시장 상인들에게 ‘그 물건’과 관련된 정보를 캐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흠. 디안 케트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그 유산을 말하는 건가요? 실존하기야 하겠지요. 어느 대귀족의 보물 창고에 고이 모셔져 있지 않겠어요?”

“디안 케트의 유산? 아아, 그렇지. 이 도시에 그런 물건이 숨겨져 있다고는 하는데…… 그래 봤자 소문 아닌가? 어린아이들 말고는 아무도 안 믿는다고, 아가씨.”

<디안 케트의 유산>

그렇다. 나는 디안 케트가 남긴 다섯 개의 유물 중 하나인 ‘눈알’을 찾아 이곳, 미드윈트리에 정착했다.

죽은 이도 살린다는 위대한 치료술사였던 디안 케트.

그는 자신의 힘을 각 유산에 나누어 봉인했는데, 그의 유산 다섯 개를 모두 모으면 어떠한 불치병도 완치된다는 신화 아닌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치료가 깨진 영혼까지 치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디안 케트는 대마법사 메피스토와 더불어 반신이라 불린 존재였다. 필시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찾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는 일과 하녀 일을 병행하며 고된 날을 보냈다.

고단한 하루가 저물어 가는 자정.

현실과 수면의 경계를 헤매던 정신이 돌연 날카롭게 일어섰다.

‘한 명.’

누군가 침실에 숨어들어 왔다.

걸음, 호흡, 타이밍. 여러모로 훌륭한 잠입 솜씨였다. 선수 쳐서 위협할까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은 대체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위기감을 느끼면 자결한다. 아주 못된 습관이었다.

그러니 허점을 노리지 않으면 침입자의 정체를 밝혀내기 어려울 것이다.

“일어나라, 하녀.”

곧 턱 아래로 선뜩한 한기의 날붙이가 닿았다.

“소리 지르면 이대로 목을 그을 것이다. 입 닥친 채로 들어. 살고 싶으면 명령에 따라라.”

태연히 눈을 떴을 땐 냉철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너는 첩자다. 웨더우즈 자작의 동향을 감시해서 정기적으로 보고해라.”

“왜?”

“입 닥치라는 말 못 들었나? 이건 요구가 아닌 명령이다. 살고 싶으면 명령에 따라라.”

내 물음에 침입자는 얼핏 당황한 듯 보였다.

“왜?”

“잠이 덜 깼나 보군.”이라고 중얼거리는 침입자의 머리에 딱밤을 날려 주었다.

소담한 딱밤에 반쯤 혼절한 침입자가 비틀거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침입자의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숨겨져 있던 알약을 꺼냈다.

어금니 자리에 보란 듯이 끼워 맞춰진 알약, 일명 <자비로운 한 입>.

암살 정보 길드에서 애용하는 자결용 알약이었다.

“왜?”

제법 빠르게 정신 차린 침입자의 입 안에 이불을 쑤셔 넣었다.

나는 바닥에 남자를 깔아뭉개고 전신 곳곳에 숨겨 놓은 암기를 빼앗아 내던졌다.

“왜?”

바늘처럼 긴 칼날, 단단한 단검, 효용 미상의 가루약, 나뭇잎 수리검…….

그리고 마침내 소매에 숨겨 둔 비상시 <자비로운 한 입>까지 내던졌을 때, 침입자의 눈에서 투지가 완전히 사그라졌다.

이제 그에게 자결할 수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답할 준비.”

절망감에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뜬 침입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입 안에서 이불을 빼내자 거친 호흡이 이어졌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입술을 뗐다.

“평범한 하녀가 아니군. 너는 대체 누구지?”

“대답.”

“……나는 길드에 들어온 의뢰를 맡았을 뿐. 누가 의뢰를 맡겼는지, 어째서 웨더우즈 자작을 감시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모른다.”

“나는 몇 번째지?”

“전해 듣기로 최소 세 번째다.”

그 말은 즉, 최소 세 명의 하녀가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협박당했다는 뜻이었다.

목표는 단 하나. 웨더우즈 자작을 감시하기 위해서.

“이전의 하녀들은?”

“…….”

“대답.”

“나도 모른다. 내 역할은 하녀에게 복종의 맹세를 받아 내는 것이다.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

암살자가 자신의 오른쪽 귀에 달린 압정 모양의 작은 귀걸이를 들이밀었다.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봐서, 이 귀걸이는 마도구가 분명해 보였다.

‘맹세를 받아 내는 마도구겠지.’

맹세란 영혼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약속이다.

어긴 자는 영혼이 파괴되면서 죽음에 이르므로, 오래전에 사용이 금지된 금기 마법이기도 했다.

‘그런 끔찍한 맹세를 한낱 평범한 하녀에게 걸려 했다니. 심지어 세 번을 넘게?’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비록 하루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웨더우즈 저택은 일이 조금 고될 뿐, 하녀들이 연달아 도망치거나 그만둘 만큼 끔찍한 일자리는 아니었다.

모실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배정된 침실은 넓고 깔끔했으며, 하루 일과도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라는 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따라서 하녀들은 도망친 게 아니라 사라졌을 확률이 더 높았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하지만 정작 이 저택에는 웨더우즈 자작이 없어.’

전쟁터에서 10년을 굴러 온 내게 인기척을 감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확신컨대 웨더우즈 자작은 저택을 비우고 있었다. 그것도 꽤 장기간 동안.

‘세 번 넘게 암살자를 보냈다면, 의뢰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없을 거야.’

주인 없는 저택.

그런 저택을 꾸준히 감시하는 의뢰자.

이 저택은 여러모로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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