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야심한 새벽.
누군가 인적이 드문 성문을 훌쩍 뛰어올랐다.
“누구…….”
놀란 보초가 소리치기도 전에 성문을 오른 자의 손에 그대로 쓰러졌다.
가볍게 보초를 제압한 남자가, 그제야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금발이 인상적인 남자는 몹시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래서, 이단 행위를 한 변절자는 어디 있으려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발랄한 어조와는 달리 무미건조한 눈이 성벽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저택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도 프란체스코가 제국에 당도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에게 이단의 죄를 묻기 위해서.
* * *
때 아닌 손님을 맞은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의 저택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침입자다!”
“잡아!”
“저자를 들이지 마라!”
날렵한 몸뚱이가 기사들을 타고 날 듯 후작가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저택을 방어해야 하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어렸다.
상대의 움직임은 빠르고 간결하며, 그 형식을 알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었다.
듣기 좋은 매끄러운 목소리가 기사들의 위에서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당신들을 상대할 때가 아니라서.”
제아무리 신의 사도라 하더라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인원의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후작의 사병들은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랐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더 많은 이들이 몰려올 터.
그 전에 ‘목표‘를 찾아야만 했다.
남자는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기사들의 공격을 흘려내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프란체스코,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살생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신을 위한 신실한 재판에 찬물을 끼얹는 짓이에요.”
“당신이 날뛰면 성국의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한 번쯤은 나를 봐서라도 인내해 주세요.”
신의 위엄을 세우는 일에 성국의 체면이나 입장 따위가 대수랴.
그러나 교황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심판도 전에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성스러운 재판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거슬리는 것들이 있어도 재판이 끝난 후에.’
그는 자신을 제압하려 모여드는 기사들을 짜증스레 바라보다 검을 집어넣었다.
프란체스코의 맨주먹에 ‘성인’에게만 주어진다는 경이로운 신성의 빛이 서렸다.
* * *
귀족들이 감탄을 마지않던 아름다운 정원에 검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눈 깜짝할 새에 기사단 1개 대대를 격퇴한 남자는 지친 기색 없이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렀다.
목표를 찾아 헤매는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막 웅장한 저택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서 온 작자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 나온 데인의 으르렁거림에 프란체스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데인은 그를 모를지 몰라도, 그는 이미 데인을 알고 있었다.
‘하이클레어의 피를 물려받은 어린 용인가.’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소년이 뿜어내는 살기가 제법 매서웠다.
미숙한 구석이 없지 않긴 해도 확실히 좋은 인재였다.
이대로 잘 성장한다면 괜찮은 ‘검’이 될 수 있을 만큼.
프란체스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썩 내키지 않는군.’
제국의 황제가 종종 보이는 신에 대한 불경은 그가 가진 알량한 권세를 믿기 때문이고, 그 힘은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에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클레어 후작가가 후대에도 건재할 수 있으리라는 높은 가능성을 시사하는 어린 잠룡은 그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다.
‘눈엣가시 같은 후작과 그 아들들을 모조리 다 쓸어버리는 것은 어려워도 이 아이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인가를 가늠하듯 살피는 프란체스코의 시선에 데인은 더 기다리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이런.”
저를 향한 선공이 들어온 순간 몽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가볍게 검을 흘린 프란체스코가 내지른 일격이 데인의 몸에 닿기 직전, 묵직한 힘을 가진 바람이 그의 몸을 가볍게 밀어냈다.
보통 인간이라면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질 만큼 강력한 힘이었지만, 몇 번 비틀거리던 프란체스코는 이내 그 자리에 섰다.
“무례가 지나치십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 몽크를 어리둥절하게 보던 데인은 이내 저를 향해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테아!”
“손님이 오셨으면 할아버님을 불러야지, 다짜고짜 검을 내밀면 어떻게 해?”
드레스 자락을 거머쥐고서 사뿐사뿐 미끄러지듯 다가온 소녀가 외사촌을 향해 핀잔을 건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새끼가 먼저 문을 지키던 기사들을…….”
“데인.”
“…….”
“저택에 계신 숙모님과 할머님을 안심시켜 드려야지.”
다정함이 깃든 도로테아의 말에 데인이 입을 다물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이미 침입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게다가 이자…….’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검을 겨눈 순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며 올라간 입꼬리와 폭사하듯 내뿜어진 살기.
순간 뒷목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아직까지 생생히 남아 있었다.
‘나를 죽이려 했고, 죽일 수 있는 작자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미남자가 천천히 잿빛 망토를 벗어 던졌다.
“……!”
새하얀 사제복 아래 선명하게 찍혀 있는 신의 인장.
경악하는 데인과 달리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서 가 봐. 어른들께 알려 드려야지. 머나먼 성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프란체스코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도로테아의 어깨 위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리는 심통이 잔뜩 난 듯 볼을 부풀린 채, 제가 기껏 가꾸어 놓은 정원을 피로 물들인 사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데인이 이를 악문 채 홱, 몸을 돌렸다.
자존심이 꽤 상한 듯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저택을 비운 이들에게 낯선 ‘손님’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아는 눈치였다.
“자아…….”
사촌을 달래 보내고 난 도로테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낯선 분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프란체스코는 불쾌감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가 들여다본 것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짙은 심연이었다.
*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저택을 지키던 인원의 절반을 단번에 쓸어버린 기세와는 달리, 막상 도로테아를 마주한 침입자는 난동을 부리는 대신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켰다.
“이야기가 길어질 예정이라면 차를 내어 올까요?”
도로테아가 다시금 물었다.
사근사근한 말투와는 다르게 건조하기 짝이 없는 눈을 마주하고 있던 프란체스코가 이윽고 입을 뗐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네가 하이클레어의 핏줄이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구심을 가득 담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웃었다.
눈앞의 남자는 이제껏 그녀가 만나온 성직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신의 대리자니, 뭐니 거창한 수식어들을 가득 붙이는 이들조차, 모시는 신에게서 받았다는 약간의 ‘신력’을 갖추고 있을 뿐 보통의 인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자는 틀림없이 제대로 된 ‘신을 모시는’ 자였다.
“네, 제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죠. 손님께서는 뭔가 다른 사람이기를 기대하셨던 건가요?”
그녀의 눈에서 낯선 이방인의 파편을 포착하고서 혼란에 잠겼던 프란체스코가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별것 아니라니 다행이로군요. 혹여 손님께 불쾌한 인상이라도 주었던 것일까 염려했는데.”
“글쎄요.”
그것은 불쾌감과는 달랐다.
한없이 낯설고 이질적인,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을 다시 떠올려 보려던 프란체스코가 다시금 소녀를 바라봤다.
사방이 신음하는 기사들로 가득한 정원에 내려앉은 짙은 피비린내.
웬만한 영애들은 질식하거나 쓰러져야 마땅한 풍경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분히 서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저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혼란에서 벗어난 듯한 프란체스코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건지게 되었군요.”
“그래요?”
“영애는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불길한 인간입니다.”
소녀를 향한 신의 대리자는 단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당신은 신의 이름 아래 반드시 처결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겠지요.”
몽크의 선언에도 도로테아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서재의 책들에서 배운 지식을 떠올렸다.
교황의 통제조차 받지 않는 신의 대리자, 사도.
오로지 신만이 그를 강제할 수 있으며, 신의 뜻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광신도.
궁금했다.
신에게서 힘을 부여받는다는 광전사의 눈에는 그녀가 어떻게 보일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
경계심이 잔뜩 서린 눈을 마주하던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윤택이 자르르한 분홍빛 구두를 신은 두 발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달 벤이 선물해 준 구두였다.
하나뿐인 딸에게 선물해 주려고, 익숙하지도 않은 여성 구두를 찾아 상점들을 헤매고 다녔을 아버지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그래, 이건 내 삶이 아니었지.
첫 시작은 몹시 드문 우연이었다.
그녀의 혼이 육신을 잃고, 이 육신이 자신의 혼을 잃고.
갈 곳을 잃었던 그녀가 이 세계에 안착하게 되어 녹아들기까지의 모든 일들이.
우연에서 시작된 ‘운명’은 이미 수레바퀴를 돌아 멀리까지 왔다.
적어도 이 육신의 숨이 멎을 때까지 이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이제 와서 순순히 목숨을 내어 놓으라니.’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긴장감이 서려 있던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도로테아는 제 앞을 가로막은 넓은 등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등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담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정하고 상냥한 아버지의 목소리.
“그 누구도 내 딸을 내게서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 설령 신 그 자체라 하더라도.”
벤의 나직한 말에 프란체스코의 미간이 좁아졌다.
죽음 그 자체의 심연을 담은 불길한 존재를 ‘딸’이라 칭하는 남자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신의 힘을 가진 자신과 겨룬다면 채 일 합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만큼.
하긴, 신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늘 그랬지.
어리석고, 무모하며, 신의 존재를 가소로이 여기는 불경한 자들.
“겁이 없군요. 나는 신의 대리자로서, 이단 행위를 저지른 자 뿐만 아니라 심판 집행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도 과실을 물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저 딸을 지키고자 하는 아비일 뿐입니다. 아이의 죄를 묻고자 한다면 먼저 저를 납득시켜야 할 겁니다.”
프란체스코의 눈에 연민의 빛이 스쳤다.
어리석은 자 같으니.
등 뒤에 있는 그것을 정말 자신의 ‘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건가.
그 불길한 존재는 벤을 방패 삼아 뒤에 선 채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긴장감이 감도는 대치 상황에서 프란체스코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오늘 당장 이단 심문을 진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단 심판이란 신의 이름을 대리하여 신벌을 내리려는 성스러운 절차이자, 어리석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지 않게끔 교훈을 내리는 행위.
구색과 위엄을 갖추어 모두에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신을 배반하는 변절자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조만간 다시 뵙지요.”
한 걸음 물러난 프란체스코는 품을 뒤적거린 끝에 작은 나무 신상을 꺼내어 엉망이 된 정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저택의 담 위로 훌쩍 뛰어넘어 이내 모습을 감췄다.
도로테아는 멀리서 검을 붕붕 휘두르며 달려오는 에이든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그가 남기고 간 작은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신이라.’
다시 신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손때 묻은 나무 조각상을 거머쥔 그녀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신을 들여다보았다.
보아하니 이곳의 신과 마주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낯선 이계의 ‘신’은 과연 그녀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것을 누군가 홱, 낚아챘다.
“이걸 뭐하러 가지고 있어. 더럽게.”
신의 대리자가 두고 간 ‘신상’을 거침없는 말로 모독한 데인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 내팽개쳤다.
“가자.”
소년은 무뚝뚝한 어조로 불과 몇 분 전, 신의 대리자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사촌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그러게 왜 혼자 그 새끼를 상대하고 난리야. 아버지나 숙부가 올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됐지.”
혹여 제 무식한 힘에 다치기라도 할까, 손목을 쥔 손은 우악스러워 보여도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도로테아는 변명 한마디, 대꾸 한마디 없이 얌전히 데인의 손길에 따라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로 느릿하게 향했다.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는 벤의 눈에는 심란함이 가득했다.
채 말라붙지 않은 핏방울이, 바람을 타고 그의 뺨으로 톡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