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149화 (149/242)
  • 149화

    파비안 벨로크의 생환은 황도에 한바탕 파란을 가져왔다.

    그녀의 실종으로 이득을 보려 했던 이들은 뜻밖의 생환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작은 기가 막힌 듯 벌떡 일어나 노기를 뿜어냈다.

    “도대체, 왜 하필 그 자리에!”

    사건에 가장 관심이 많을 어린 영애들의 이목이 잔뜩 쏠려 있는 데다가, 사교계의 수많은 명사들을 모은 자리였다.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황도의 모든 이들이 파비안의 생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출 수도 없고, 하필이면 도로테아를 조사하겠다며 황제를 압박해 명을 받은 직후라 꼴만 우습게 된 셈이었다.

    “뭐가 어찌 된 게요!”

    공작의 매서운 추궁에 백작이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가 도대체 왜 그 상황에서 거길 들어온 건지…….”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기껏 내키지 않아 하시는 폐하까지 끌어들여 일을 키웠는데 이제 와서 실종된 영애가 제 발로 돌아오다니!”

    후작 가문을 견제하기는커녕 엉뚱한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그를 믿고 자신의 살롱을 ‘무대’로 만들어 준 귀부인으로서는 뺨을 얻어맞은 격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온 공작이 백작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 아이는 뭐라고 하오?”

    “그것이…….”

    벨로크 백작이 말을 흐렸다.

    그늘진 얼굴을 한 그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마치 유령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넋을 놓은 채 돌아온 딸아이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기억이 나질 않아요, 아버지.”

    어쩌다가 실종이 되었는지, 실종된 기간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추궁을 하려 치면 울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겉만 멀쩡한 뿐이지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을.’

    어렵사리 돌아온 딸을 볼 때면 마음이 영 탐탁지 않았다.

    이미 며칠간의 실종이 널리 알려졌으니 평판에는 금이 가 버렸다.

    고이 잘 빚어냈던 물건의 값어치가 떨어졌으니, 차라리 없는 셈치고 거한 배상을 뜯어내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었을 텐데.

    혀를 차는 백작의 눈에 아비로서 딸에게 보내야 할 애틋한 정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역정을 내는 공작 옆에 선 클라디아 부인 또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덕분에 제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어요. 그 자리에는 꼬박 반년을 기다려 겨우 모실 수 있었던 클라비 경과 닐슨 부인도 있었다고요.”

    불퉁한 말에 공작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부인에게로 향했다.

    “저택의 문지기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영애 하날 막지 못하고 뭘 한 게요! 하다못해 그 많은 목격자들만 없었더라도 일을 수습하는 것이 한결 수월했을 텐데!”

    “다들 갑작스레 잠이 몰려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었다는군요.”

    자존심이 상한 듯 말한 클라디아 부인이 덧붙였다.

    “이미 신관과 마법사를 불러 확인했어요. 정령의 힘을 사용한 흔적은 없었어요.”

    “갈수록 가관이군.”

    설령 도로테아가 정령을 부린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번 일에는 분명 그녀가 엮여 있었다.

    그들이 짜 놓은 판 위에서 가장 위기에 내몰렸다 싶을 무렵 ‘파비안의 등장’이 모든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으니까.

    “그대의 딸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고?”

    “예.”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괜한 손해만 봤다.

    들들 볶이다 마지못해 ‘수사를 진행하라.’라고 명한 황제의 꼴마저 우습게 만들었다.

    자연히 공작의 발언권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황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 공국으로의 독립을 도모하려는 공작에게는 치명타였다.

    이대로 물러섰다가는 또 다른 기회를 잡기가 요원해진다.

    지난 몇 년간 돌아가는 판도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 가며 겨우 잡은 기회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판을 키우지.”

    공작의 말에 죄인처럼 수그리고 있던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확신이 사라진 자리에 자리 잡은 미약한 불안감이 그의 속을 천천히 태우고 있었지만, 이미 들여 놓은 발을 빼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날 선 눈과 마주한 백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파비안 벨로크를 불러오게. 자네의 그 잘난 딸 말이야.”

    *   *   *

    그리고 비슷한 시각, 떠들썩했던 파비안의 실종과는 달리 그 누구도 모르게 사라졌다 조용히 돌아온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4황자 전하께서는 갈수록 철없이 구시는군.”

    “…….”

    “네게 아주 푹 빠지신 나머지 경중을 몰라.”

    남편을 헐뜯는 오빠의 말에 플로렌스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 끝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여동생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보던 케빈이 홱 고개를 돌려 본인에게 온 서신을 뜯었다.

    말없이 내용을 모두 훑은 그가 고급스런 인장이 박힌 서신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바닥에 집어 던졌다.

    절벽 끝으로 몰아세워진 상황에서도 ‘품위’를 지켜야 한다며 애쓰는 꼴이라니. 저들의 넘쳐 나는 허영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이쪽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4황자의 바보짓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

    담담한 말에 플로렌스가 고개를 들었다.

    “하이클레어의 계집이 저들의 체면을 봐주지도 않고 몰아세운 덕에 오히려 일이 쉽게 되었어.”

    어떻게 해야 신중한 공작이 칼을 빼들게끔 만들까, 고민이 많았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풀릴 줄이야.

    마치 누군가 그의 일을 돕고 있는 듯 그가 원하는 대로 술술 풀려나가고 있었다.

    “저들의 자존심상, 칼을 뽑아 들었으니 손해만 보고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일 테지.”

    케빈 던컨의 서늘한 얼굴에 옅은 비웃음이 서렸다.

    날 때부터 대접받고 자란 이들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에 서툴렀다.

    오랜 내공으로 노련한 공작조차도 한낱 후작 영애에게 휘둘려 뺨을 맞은 것만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불안함이 잔뜩 깃든 플로렌스의 부름에도 케빈은 창밖 저 먼 곳을 응시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 굶주린 그의 눈은 알 수 없는 허상을 찾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한참 후에야 제 여동생에게로 흘끗 시선을 준 그가 픽, 하고 웃었다.

    “파비안 벨로크라면 걱정할 것 없다. 비록 운 나쁘게 일을 들키긴 했지만, 그 계집의 입이 열릴 일은 없을 게야.”

    자신만만한 케빈의 말을 듣는 플로렌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구체적인 말이 없어도 그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해 두었는지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 그런 케빈조차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파비안 벨로크가 ‘창고’를 발견했던 날, 그곳에 숨어 있었던 조그만 여자아이들.

    도로테아의 손을 잡고서 들뜬 얼굴로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견고하고 단단한 댐이 무너지는 것은 아주 사소한, 신경조차 쓰지 않은 작은 사고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케빈이 의아한 얼굴로 아직도 미동 없이 그의 앞에 서 있는 플로렌스를 향해 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꾹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아니오, 오라버니.”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그녀가 그와 마주한 채 또박또박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끝끝내 숨긴 그 사소한 사실 하나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무너뜨릴 날카로운 창이 되어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   *   *

    실종되었다 돌아온 파비안 벨로크로 인해 황도에서는 여러 추측성 소문들이 나돌았다.

    “실은 파비안 영애에게 오랜 정인이 있었다는군요. 두 사람이서 함께 도주하려고 했다가 도중에 남자에게 버림받아 돌아왔다는 거예요!”

    “박람회장에서 몹쓸 이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들었는데요.”

    “영애가 실은 그날 박람회장에서 창피를 당하고 저택에 칩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백작도 창피한 나머지 딸이 실종되었다고 말하고 다니다 일이 커진 거죠.”

    그 어느 추측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파비안 벨로크의 실종이 영애의 자작극이라면, 그녀는 어떻게 박람회장의 그 수많은 눈을 피해 빠져나갔으며, 어떻게 다시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돌아와 살롱에 나타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많은 귀족들이 궁금함에 밤잠을 설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벨로크 백작저를 방문하거나 파비안을 초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평판이 망가진 영애와 가까이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튀기 마련이니까.

    귀족들의 ‘사교’란 이토록 냉정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해도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일은 없겠군요.”

    황도의 그 어떤 사교 모임에서도 그녀를 일원으로 취급할 리 없었다.

    “참 예쁜 영애였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과거의 영광으로 묻히는가 했던 한때의 아름다운 사교계의 꽃은, 제 이름으로 떠들썩한 황도가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놀라 까무러칠 방식으로.

    바로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자신을 납치했던 이단의 주구로서 성국에 정식 고발한 것이다.

    그녀의 고발을 받은 성국은 황제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심판관을 파견하겠노라는 다소 일방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거절했다가는 이단 행위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황제를 파문(破門)하겠다는 입장을 덧붙여서.

    가장 민감한 순간, 골치 아픈 꼬투리를 잡힌 황제는 경악스런 상황을 만들어 낸 파비안을 불러 아낌없는 분노를 퍼부었다.

    “영애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건가!”

    “…….”

    “신의 사자를, 사도를 제국 안으로 불러들여 이단 심판을 하겠다고?”

    교황의 대리자. 성국의 수호자. 자비 없는 이단 심판관.

    유일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데에 적법을 논할 필요조차 없는, 자유로운 자.

    “그자가 제국으로 들어오는 것도 문제지만, 제국에서 이단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야!”

    설령 이단으로 의심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당연하게 제국의 법에 먼저 호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국은 늘 주변 국가들의 국정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이단 심판관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란 말일세!”

    노여움이 가득한 호통에 파비안은 도리어 고개를 바짝 들었다.

    이미 손가락질이라면 받을 만큼 받았다.

    가까스로 지옥에서 살아 돌아와 아비의 눈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처음에는 경악이었다가, 그다음에는 경멸과 혐오, 그 뒤에는 살아 돌아온 자신에게 보내는 분노가 가득한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아비에게 그녀는 이미 ‘필요 없는’ 인물이었으며, 그나마 값지게 쓰려 했던 그녀의 죽음마저도 값어치가 사라진 이상, 그녀의 존재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때는 아버지의 자랑이었던 그녀가.

    온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녀가.

    아버지의 손에 공작 앞으로 끌려가 앞으로 어찌 일을 책임질 생각이냐고 추궁 받은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만큼은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도로테아 영애였어요. 그녀가…… 이단 행위를 하고 있었어요.”

    그 순간 저를 향하던 부친의 얼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내비친 한 줄기의 빛에 매달리는 그 환한 얼굴에 그녀의 입은 막힘없이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불길한 물건을 지니고 있음을 들켰기 때문에 저를 납치했던 거예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파비안은 모든 것을 잃었다.

    설령 제 몸에 새겨진 ‘낙인’이 사라진다고 해도 귀족인 그녀에게 ‘미래’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파비안 벨로크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저를 손가락질합니다, 폐하.”

    “…….”

    “제국의 귀족으로서, 이번 일이 오로지 저의 치부로 그칠 것이라면 그 또한 운명처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고귀한 신분이 갖추어야 할 사회적 책무)의 진정한 의미를 위해서라도.”

    “말은 잘하는군.”

    제 명예를 위해 성국을 끌어들여 놓은 주제에.

    극단적이고 강경한 사도의 특성상, ‘이단’의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까지 제국을 들쑤셔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는 황제의 권위도, 귀족의 부나 권력도 소용없었다.

    황제가 날카롭게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영애는 잘못된 선택을 한 거요. 하이클레어 후작가를 무너뜨리자고 제국의 주춧돌을…….”

    “신성한 재판을 받겠습니다.”

    “……!”

    “진실의 성배 아래, 제 혼을 걸고서 증명하겠습니다.”

    이를 악문 채 꺼낸 파비안의 말에 황제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뒷짐을 진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리고 고개를 젓길 반복했다.

    ‘신성한 재판’이라는 것은 성국에서 오로지 13사도와 교황만이 쓸 수 있는 성물을 통해 받는 영혼의 재판이었다.

    재판에서 거짓된 증언을 하는 경우, 생명의 빛을 잃고 신의 저주를 받게 되는 끔찍한 대가가 뒤따랐다.

    ‘그걸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신의 저주란 영혼의 타락을 뜻한다.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까지 지옥에 떨어지겠다는 맹세였다.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파비안 벨로크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단 한 순간도 하이클레어 가문의 결백을 의심한 적 없던 황제의 눈에 한 줄기의 의심이 스쳤다.

    *   *   *

    알현을 마치고 궁을 나오는 파비안은 실성한 듯 웃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생이 제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데, 죽고 나서 떨어지게 될 지옥이 뭐가 어쨌단 말인가.

    그 지옥으로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언제나 고고한 척하는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녀처럼 군중들의 소문 속에서 엉망으로 물어뜯기고 갈기갈기 찢겨 나가, 종내에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끔 만들 수만 있다면.

    설령 혼이 불타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