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우웁.”
창백한 얼굴의 파비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메슥거림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떼자, 시뻘건 피로 얼룩진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뒤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모양입니다.”
홱 돌아선 파비안이 더듬더듬 말했다.
“여, 여긴 제 방이에요.”
“압니다. 귀족들이란 정말이지 지겹도록 다른 이들과 붙어 있지 못해 안달이더군요.”
프란체스코는 겁에 잔뜩 질린 파비안을 내려다보며 새하얀 장갑을 벗었다.
여자의 턱에서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피가 뚝뚝 흘렀다.
“뭐, 실례라면 사과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단둘이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밀랍 인형처럼 창백한 파비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프란체스코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그녀에게 새하얀 손수건을 건넸다.
“닦아 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야 크게 상관없지만, 영애는 스스로의 치부를 내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니.”
그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렇지 않던가.
파비안은 감기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입안 가득 비린한 맛이 감돌아 속이 역했지만, 그렇다고 사도 앞에서 속을 게워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도께서는 무슨 연유로 이 늦은 시각 제 침실을 찾으셨나요?”
힘없는 물음에 프란체스코는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훑었다.
“별것 아닙니다. 영애의 상태를 좀 확인해 보려 했을 뿐.”
다리를 꼬고 손에 깍지를 낀 채 비스듬히 그녀를 바라본 그가 빙긋 웃었다.
“생각보다 덜 망가진 모양이군요. 이 정도라면 재판에서도 큰 문제없이 증언할 수 있겠습니다.”
“…….”
재판을 언급하는 사도의 말에 파비안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판을 진행하실 거라고요?”
“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프란체스코의 태도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파비안은 제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날, 저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을 떠올렸다.
옷 아래에 꼭꼭 가렸음에도 꿰뚫어 보듯 정확히 그곳을 향하던 그의 시선도.
“제 상태를……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녀의 몸에 새겨진 이단의 증거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와는 일말의 관계조차 없다는 사실까지도.
속삭이는 듯 조그마한 그녀의 목소리에 프란체스코가 빙긋 웃었다.
“알지요. 누구보다 잘. 영애에게서는 지독하게도 썩은 내가 납니다. 굳이 성배 앞까지 가지 않아도 일개 신관조차 마주한 순간 눈치챌 겁니다.”
파비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귀족들이란 것들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데나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불경한 짓을 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것 같았나.
“그럼, 그럼 어찌 재판을 강행하시려고요?”
“그럼 영애께서는 어찌 성국을 끌어들이셨습니까?”
파비안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프란체스코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물었다.
“신성한 재판에서 거짓을 말했다가 성배에 의해 조작된 증언임이 드러나면 영애는 물론 백작조차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터인데. 그뿐이겠습니까? 이번 재판에 조금이라도 발을 얹은 이들 모두가 위험해지겠지요.”
파비안의 눈동자가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맹렬히 흔들렸다.
“그건,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죽을 계획이었겠지요?”
스스로 신성한 재판을 받겠다며 사도를 불러들인 그녀가 재판 전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가장 큰 용의자로 부각될 테고, 재판 직전에 중요 증인이 죽었으니 성국도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그 과정에서 하이클레어 후작가에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것이 계획이었으리라.
숨을 흡, 하고 들이쉰 파비안을 보던 프란체스코가 빙긋 웃었다.
“이래서 내가 영애를 만나고자 한 겁니다.”
“네?”
“그 쓸데없는 계획을 멈추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고작해야 그 정도 계획으로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완벽하게’ 잡기에는 부족했다.
소꿉놀이도 아니고, 고작 평판에 타격을 입히거나 입지를 좁히는 것으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온전한 재판 없이는 그에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처형할 권한도 주어지지 않을 터.
신의 이름을 빌려 검을 뽑으려면, 도로테아는 한 치의 의심 없는 이단의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파비안을 자극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파멸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완전히 망가져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조차 없이, 비참하고 끔찍하게 손가락질당하다 종국에는 영영 잊히기를.”
듣고 있던 파비안이 꿀꺽, 침을 삼켰다.
프란체스코의 말은 입안의 사탕처럼 달콤했다.
“온 국민이 다 듣도록 소리 높여 증언하십시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이단을 저질렀다고. 당신에게 끔직한 저주를 퍼부었다고. 신을 기만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성배 앞에서 거짓 증언을 했다가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텐데요. 게다가 말씀하셨듯이 신성력을 가진 신관이라면 제 상태를 모를 리가…….”
그녀는 눈앞의 사도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 찰랑이는 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체스코가 입을 열었다.
“신관의 눈과 귀는 제가 가려 드리지요. 그리고……. 재판에서 쓰이게 될 성배는 당신의 증언에 동의할 겁니다.”
“……!”
제 귀를 의심한 파비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신성한 재판을 거짓으로 진행하시겠다고요?”
“더 위대한 신의 제국을 위해섭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주 작은 규칙 위반 정도는 그리 대단한 문제도 아닙니다.”
“위대한…… 신의 제국이라고요?”
“요 몇 년간 제국은 지나칠 정도로 신관들의 입지와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황제는 성하의 점잖은 타이름에도 미꾸라지처럼 제 의무를 모른 척 떠넘겼지요.”
“의무, 라니요?”
“신께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는, 인간으로서 가장 신성한 의무를 말입니다.”
제국의 황실은 오랫동안 성국의 영향력과 간섭을 최소화하길 원했다.
종교 재판소와 헌법 재판소를 분리하고, 신전의 주도로 이루어지던 ‘자선 사업’을 귀족들이 직접 주최하도록 장려했다.
무엇보다 제국의 황실이 굳건하게 중앙 집권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준 것은, 그들을 단단히 받치고 있던 군사력이었다.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건재함과 7황자의 뛰어난 활약까지.
비록 최근 몇 번의 큰 사건들로 일반 대중의 여론이 흔들리기는 했어도 여전히 제국은 건재했다.
최소한 황실의 인기는 신전의 그것보다 높았으니.
‘그것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신성한 재판에서의 위증을 허용하겠다고?’
파비안은 아연한 얼굴로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광신도’를 바라보았다.
“제국을 마땅히 신께 봉헌해야 할 황제가 그런 개수작들을 부리고 있으니, 우매한 제국의 신민들조차 신께 점차 불경한 마음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프란체스코의 보랏빛 눈동자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가 드러났다.
“사사건건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 드는 제국의 썩어 빠진 벌레들에게 알려 주어야지요. 신을 기만한 자의 결말을.”
활짝 웃는 프란체스코와 마주한 파비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을 끌어들인 걸까.’
덜덜 떨리는 손끝을 드레스 자락 사이에 숨긴 그녀는 조금씩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생각해 봐, 파비안 벨로크.
어차피 너는 이 끔찍한 저주에 하루하루 삼켜지고 있잖아.
다른 사람이나 제국이 어찌 되건, 그 탓에 네 가문이 어찌 되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너는 그때쯤이면 아마…….
프란체스코는, 탁한 눈을 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파비안의 귓속에 달콤한 말을 흘려 넣었다.
“나는 나의 목적을, 영애는 영애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겁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수많은 이들 앞에서 무너져 내리겠지요. 다시 일어날 불씨조차 없도록.”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제 몸에 새겨진 이 저주는 어떻게 되나요?”
“무엇이 말입니까?”
신의 사도가 환한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파비안이 숨을 참으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 나갔다.
“사도님께서는 제가 경건한 순교자라 되리라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제가 가진 저주가…….”
“신의 성배 앞에서 위증을 하겠다 선택한 것은 영애이지요. 게다가 영애에게 새겨진 이단의 표식은 제가 새기라 강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프란체스코가 어깨를 으쓱했다.
파비안은 음울한 눈으로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제가 원한 바가 아니었어요. 그들이 제게 강제로…….”
그 순간, 파비안은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서 바닥을 굴렀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온몸을 비트는 파비안을 바라보던 프란체스코가 상냥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저런, 많이 괴로운 모양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붉어진 눈시울로 사도를 바라보는 파비안의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미소 지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이 모두 끝난 뒤에, 당신을 그토록 곤란하게 만든 이단의 무리 또한 제 손으로 찾아내어 처벌할 생각이니까요.”
“…….”
“지금은 신성한 재판에서 당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무리 짓는 것만 생각하세요.”
상냥한 목소리로 격려하는 사도를 멍하니 보던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결코 무결하지 않았다.
거슬리는 것들을 달고 파티에 와서 그녀를 모욕하지만 않았더라면 모든 것은…….
프란체스코가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떠난 후, 홀로 남겨진 파비안은 제 목에 새겨져 있는 검은 백합의 봉우리를 더듬더듬 매만졌다.
불타는 듯한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앞으로 그녀가 치러야 할 신성 모독의 대가를 떠올린 파비안이 입술을 짓씹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를 원망하지 마.
내 영혼은 어차피 구제받지 못할 거야.
나 홀로 이 끔찍한 지옥에서 숨이 멎기를 기다리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잖아.
중얼거리던 파비안이 테이블 위로 고개를 묻었다.
가녀린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도로테아는 제국의 중앙 신전에 방문해 있었다.
그녀와도 인연이 깊은 대신관은 몹시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성국의 사도께서 재판이 있기도 전에 후작가에 들러 영애께 위협을 가했다는 일은 이미 들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서신으로 꽤 큰 유감을 표명하셨으니, 아마 그분도 성국으로 돌아가시면 징계를 받게 될 겁니다.”
“지금은 대신관님조차 그분의 행보를 제지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평소 온화하고 여유로웠던 대신관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드러났다.
미안함을 담은 미소가 서린 얼굴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의 사도들은 몹시 특수한 위치를 지닙니다. 개개인이 지닌 무력도 대단하지만, 신성한 의무를 다하도록 신께 선택받은 이들이라는 것이 크지요.”
태어날 때부터 신의 상흔을 타고나는, 신이 부여한 힘을 가진 전사라.
흥미롭긴 했지만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제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 부당하거나 불공정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는 겁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입을 뗐다.
“대신관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저를 아껴 주셨음을 아는데 곤란하게 해 드릴 수는 없죠.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말해 보십시오.”
“파비안 영애가 실종되던 날, 저와 함께 박람회를 찾은 아이들을 재판 전까지 이곳에 두면 어떨까 해서요.”
“으음…….”
“당분간은 그 아이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는데, 극장은 아무래도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다 보니 혹여 문제가 생길까 저어되네요.”
그녀의 부탁에 대신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해 드릴 수 있지요. 사도께서도 오히려 그걸 기꺼워하실 겁니다.”
“감사해요.”
짤막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신관이 입을 뗐다.
“영애, 기왕 오신 김에 신께 기도를 올리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인자한 미소를 띤 대신관의 권유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어린 시절에야 워낙 영애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또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성정에 신전에 나와 공개 예배를 함께하는 것이 어려웠음을 이해합니다.”
“……,“
“또 영애의 숙모님인 다이애나 부인에게 영애의 신실함을 들은 바도 있지요. 새벽녘이 되면 저택 곳곳에 물을 떠 놓고 기도를 올리는 영애를 자주 목격한다고요.”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건 딱히 이곳 신에게 올리는 기도가 아니긴 하지만.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늘 막힘없이 답을 건네곤 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동안 대신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무거운 입을 뗐다.
“재판이 끝난 후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신전 복도를 울렸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나면 신께 기도를 올리러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두드려 보아야 할 문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다.
왠지 아주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세요.”
언제나 그렇듯 대신관은 강요하는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뜻에 따라 주었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도로테아는 메인 예배당으로 향하는 통로 옆면에 채워진 아름다운 벽화를 보았다.
신에게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는 13사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본 13번째 사도, 성 프란체스코는 놀랍게도 아주 평범한 중년의 남자였다.
“제1대 프란체스코 경이십니다.”
문득 처음으로 그녀가 ‘신’을 받아들였던 날이 떠올랐다.
온몸이 비틀리고 저를 내리누르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신은 성스러운 계시를 하는 대신 악다구니를 쓰며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 어디에도 경건하고 우아한 선택의 과정은 없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지요.”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가 뒤에서 따라붙었다.
그제야 그녀는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신’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