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클레어 파인트는 파인트 가문에서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는 막내였다.
그녀의 위로 백작 부인이 된 큰언니와 사교계에서 평판 좋은 오빠가 둘이나 있었던 덕에, 늦게 태어난 막내에게는 가문의 이름을 빛내야 할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아낌없이 사랑받으며 자라왔다.
부족한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고, 괴로운 일도 없게.
웃음 가득했던 남작의 저택에 먹구름이 드리운 건 올해 초부터였다.
“차도가 없습니다. 신관께서 직접 나서서 기도를 드려도 보고, 훌륭한 의원이란 의원은 모두 다녀갔으나 하나같이 고개를 젓기만 하니…….”
“저런.”
파인트 남작가의 장녀이자 그녀의 큰언니인 블레인 백작 부인은 주체 못 할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차라리 무엇 때문인지 알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정녕 이상한 일이군요.”
곁에 앉아 있던 부인 중 한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던 클레어는 갑작스레 들끓어 오르는 열에 끙끙 앓았다.
까닭도 알 수 없는 열로 자그마치 이틀을 몸져누웠지만 어떤 의원도 손을 쓰지 못했다.
이대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겁을 먹고 있던 차에 다행히도 열은 시작되었을 때처럼 까닭도 모르게 씻은 듯 내려갔다.
한시름 놓은 것도 잠시였다.
멀쩡해진 줄로만 알았던 소녀는 밤이 되면 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뛰쳐나와 창틀 위에 올라서서는 달을 향해 짖어 댄 것이다.
개처럼.
마치 정말로 자신이 개라도 되는 양 복도를 네 발로 걸으며 목이 쉬도록 짖어 대는 딸을 본 남작 부부는 큰 충격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저주라고 생각할 수밖에…….”
흘끗 눈치를 보며 꺼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저주니, 이단이니 하는 말들은 함부로 꺼내기에는 위험한 단어들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머니께서 정말 몸져누우실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남작 부인께서도 힘겨우실 테지요.”
“어찌 좋은 분들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흐느끼는 백작 부인에게로 연민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메릴린 레어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마다 한마디씩 얹고 있던 부인과 영애들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 저는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초대해 주신 배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하지 못하게 된 점은 아쉽습니다만.”
“초대에 응하실 때부터 그리 말씀하셨으니 개의치 마셔요.”
눈물을 훔쳐 낸 백작 부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임의 호스트로서 객을 배웅하는 당연한 일이니까.
물론, 그녀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메릴린은 복잡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아직도 물기가 가시지 않은 백작 부인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윽고 정문에 다다른 부인이 두 손을 뻗어 메릴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늘 제 두서없는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별말씀을요. 모처럼의 즐거운 티 파티에 저를 초대해 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영광인걸요.”
애써 웃으며 말을 꺼냈지만 백작 부인은 다시금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무너졌다.
“영애께서는 아시겠지요, 제가 어찌 일면식도 없는 영애에게 무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초대장을 보냈는지.”
“…….”
“많은 나이에 아이를 출산하느라 힘을 쓴 어머니를 대신해 제가 그 아이를 길렀습니다. 처음 말을 하고 걷게 되는 것까지 지켜보아 온, 제 딸이나 다름없는 동생입니다.”
“부인.”
“갖은 방도를 다 써 보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신관께서도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하셨습니다. 저희에겐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합니다.”
절박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지체 높은 백작 부인이 체면조차도 내려놓고 한낱 남작 영애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어린 막내가 애틋했던가.
근육이 제대로 붙어 있을 리 없는 얇고 가느다란 손은 제법 거세게 메릴린의 손을 쥔 채, 답을 듣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을 태세였다.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가 아이를 보아 주길 원하시는군요.”
눈물로 그득한 백작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후작 영애께서는 영애의 말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들어줄 만큼 소중한 친우로 여긴다 들었습니다. 전생에 자매였다 해도 믿을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몹시도 애틋하시다고요.”
그놈의 영혼의 단짝 이야기는 지치지도 않는구나.
당사자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은 허튼 소리를 대체 누가 하고 다니는 거야.
“제 남동생이 데인 영식께 들었다 합니다. 본인의 사촌은 후작이신 할아버님조차 말릴 수가 없지만 단 한 사람, 영애의 말만큼은 듣는다고요.”
데인 하이클레어, 이 개자식이.
메릴린은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나날이 살이 붙어 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은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렸다.
“부탁드립니다, 영애.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후작 영애의 정령에게 아이를 한 번만 보이게 해 주시면…….”
실낱같은 희망을 얻고자 자존심조차 던져 버린 부인을 바라보던 메릴린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은 전해 보겠지만 영애께서 응하실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
울먹이며 건네는 감사 인사에 애써 웃어 보인 메릴린이 백작저를 빠져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밤마다 개처럼 짖는 영애라니.
메릴린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라면, 다른 이들은 손사래 칠 만한 기이한 사건에 도리어 흥미를 느낄 것이라는 것을.
다만 도로테아가 사건에 뛰어드는 순간, 메릴린 또한 그 일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지만 말을 전하지 않기에는…….’
백작 부인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그녀의 양심을 무겁게 짓눌렀다.
* * *
“어서 오세요, 아가씨!”
활기찬 인사와 함께 후작가의 하녀가 메릴린을 반겼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들려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치 빠른 하녀가 재빠르게 메릴린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아, 오늘 후원에서 귀부인들의 모임이 있어서요. 아가씨께서는 방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최근 들어 후작가를 드나드는 손님들이 잦아진 것은 아마도, 혼인 적령기를 맞이한 에드윈과 데인 때문이겠지.
평소라면 곧장 도로테아에게 갔을 테지만, 후원에 있는 이들은 모두 사교계에서 발 넓은 부인들일 것이 분명했다.
엄연히 저택의 ‘안주인’에게 인사조차 없이 갔다가는 말이 나오겠지.
“이제 와 그런 평판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울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메릴린은 착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귀족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영애이고 싶었다.
“어머나, 레어 남작가의 영애로군요.”
푸근한 인상의 여인이 부채를 살랑이며 아는 척을 해 보였다.
숨을 살짝 고른 메릴린이 적절한 거리에서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메릴린 레어입니다. 도로테아 영애의 초대를 받아 방문했다가, 우연히 부인들께서 모이셨다는 것을 알고 인사를 드리려고요.”
“아직 어린 영애가 생각이 깊기도 하지.”
누군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의 지위를 존중해 인사를 왔다는데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어서 와요, 영애. 테아는 영애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호스트로 가운데 앉아 있던 다이애나가 친근한 눈웃음을 보내왔다.
“이럴 게 아니라 차를 한잔 마시고 가는 것이 어떨까요?”
“아뇨, 전 아무래도 도로테아 영애와…….”
“오늘 마침 핀치 부인께서 새로 들인 파티쉐의 역작을 들고 왔답니다. 제철을 맞은 복숭아 파이의 향이 아주 좋아요.”
핀치 부인, 이라는 말에 메릴린이 멈칫했다.
혼인 적령기를 맞이한 영애나 그 보호자들이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특유의 친근한 인상과 쾌활한 성격으로 발이 넓은 그녀는, 사교계의 유망한 영애 영식들을 이어 주는 이름 높은 중매쟁이였다.
‘과연 하이클레어 후작가.’
청탁은 받지 않고 그저 내키는 일에만 나선다던 핀치 부인이 직접 발걸음을 하다니.
속으로나마 감탄을 건넨 메릴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배를 채우면 기다리고 있는 도로테아 영애가 서운해할 거예요. 오늘 그녀가 고안한 간식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거든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부인들이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의 식성이야 이미 황도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부채 사이로 흘끗 주고받는 부인들의 시선이 의미심장했다.
사실 그녀들이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은 메릴린이 아니라, 인사를 하러 들르기는커녕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일 테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메릴린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메릴린 영애.”
통통한 몸매의 동그란 얼굴을 가진,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핀치 부인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언제 한번 함께 차를 마시고 싶군요.”
가벼운 권유에 여기저기서 놀라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핀치 부인이 그녀에게 맞는 짝을 찾아 주고 싶다고 먼저 의사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저택을 향해 몸을 틀었던 메릴린이 다시 핀치 부인을 향해 가볍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저를 그리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고 시간이 생길 때에 부인의 호의에 답하겠습니다.”
예법에 갖춘 인사를 건네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다들 놀란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메릴린 레어는 사실 도로테아와 얽히기 전까지는, 황도 그 어디에서도 이름을 들어 보기 어려울 만큼 입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분명히 그랬을진대.
당당한 걸음걸이. 적당히 예를 지키면서도 과하지 않은 답례.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
모든 것이 다 더할 나위 없이 품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걸.’
‘원래 저런 존재감을 가진 영애였던가……?’
그저 운 좋게 후작 영애의 마음에 들어 곁을 허락받은 들러리가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궁금해지네요. 두 사람은 어쩌다가 친분이 생긴 걸까요?”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다이애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메릴린이 언제부터 후작가를 마치 제집처럼 드나들었더라?
“분명한 건 테아가 메릴린 영애에게 꽤 많은 것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겠죠.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 참 다행이에요.”
“하긴 그렇지요.”
“마음이 맞는 친우는 평생이 가도 사귀기가 힘드니까요.”
“저렇게 서로를 아끼는 것도 참으로 보기 좋군요.”
핀치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에서 보낸 초대장에 흥미가 생겨 이곳을 방문하긴 했지만, 훌륭하다 칭송받고 있는 이곳의 영식들은 어쩐 일인지 좀처럼 눈에 차지 않았다.
첫째 공자는 지나치게 잘난 데다 책임감도 뛰어난 탓에 함께할 부인에게도 그 이상의 능력과 책임감을 요구할 테고.
둘째 공자는 가정을 이루는 그림조차 그려 본 적 없음이 눈에 보일 정도였고.
사촌인 필립 하이클레어는 소문 이상으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보다 아름다운 남자와 혼인하는 것을 좋아할 영애가 어디 있다고.’
물론 눈이야 호강할 테지만, 사교 모임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할 때마다 남들의 입방아에 외모를 비교당할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메릴린 레어는 달랐다.
독특한 본인만의 존재감은 물론이고, 특유의 당당함과 우아함을 겸비했으며, 노련한 부인들 앞에서조차 기가 죽지 않는 면모까지.
‘괜찮은 인물이로군. 상당히 괜찮아.’
핀치 부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메릴린은 아직 가공되지 않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원석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좋은 반려를 찾아 주는 것을 낙으로 살아온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