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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26)화 (126/242)

혼술사 도로테아 126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레번이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같이 다니시는 기사님은 안 오셨습니까?”

“응, 그 애는 할 일이 있어서.”

그제야 한결 안심했다는 듯 긴장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루크랑 왔어.”

“뭐? 아니, 네?”

때맞춰 그녀의 뒤로 저벅저벅 나타나는 7황자를 본 레번이 경기를 일으켰다.

“오랜만인데 서로 인사하자.”

“…….”

“그동안 강녕하시었습니까!”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는 루크를 향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레번을 보며 도로테아가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멀리서 도로테아를 알아본 미네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아직 수금일은 조금 남았습니다만.”

조심스러운 레번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분간 수입이 없을 텐데, 내게 줄 돈이 있겠어?”

“그, 전에 벌어 둔 것이 있으니 어떻게든…….”

“당분간은 걷지 않을 생각이야. 적어도 관객들이 다시 극장을 찾을 때까지는. 지금은 유지만으로도 벅찰 테니까.”

귀가 번쩍 뜨인 레번이 두 손을 끌어 모은 채 도로테아를 올려다봤다.

“자비로우신 처사입니다!”

“응.”

“극장이 다시 문을 여는 대로, 곧장 수입을 갖다 바치겠습니다.”

“훌륭하네.”

그녀의 토닥임에 감격한 레번을 바라보는 루크의 눈빛이 사뭇 냉랭했다.

사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돈을 갖다 바치겠다면서 저토록 즐거워할 수가 있나.

매의 눈으로 노려봤지만 딱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로테아는 굳이 ‘술법’을 쓰지 않고도 레번의 마음을 충분히 휘어잡고 있으므로.

“쓰고 있는 극본이 있는 모양인데. 원한다면 직접 쓴 이야기를 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 그렇지만…….”

“열심히 쓴 이야기잖아. 세상에 보여 주고 싶을 테니까.”

점차 얼굴이 환해지는 레번과는 달리 그 ‘극본’을 미리 읽어 봤던 단원들의 표정은 굳었다.

‘그놈의 치정극! 스펙타클 호러 스플레터 격정 멜로!’

자극으로 넘쳐 나는 설정과 작위적인 상황들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 입장에서, 그 극악한 극본을 무대에 올리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다.

동상이몽이 오고 가는 극장 안의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은 도로테아가 물었다.

“발레리가 맡기고 간 아이와 아버지, 이곳에 있지?”

“아아, 네. 있긴 한데…….”

레번이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새 조용해진 단원들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도로테아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안내해 줘.”

그 아이에게.

*   *   *

아늑한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가 문이 열리자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도로테아를 확인한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딘가 겁을 먹은 듯, 혹은 긴장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어깨를 ‘아버지’가 토닥여 주었다.

다정한 부녀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문을 닫고 말을 건넸다.

“잘 지냈어요?”

“은인 덕분입니다.”

도로테아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그를 흘끗 바라보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움찔한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껏 너를 맡아 주던 친구가 사고를 당해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단다.”

“아…….”

“후견인이 사라졌으니 어찌해야 한다?”

아이 아버지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여유로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두 사람을 지나쳐 좁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다행스럽게도 네게 아주 좋은 후견인이 나타났지 뭐니.”

“누구…….”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았다.

비록 옷차림이 추레하긴 하지만 고생 한 번 해 보지 않은 고운 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육신을 차지하던 병마를 벗어 던진 아이는 더 나아진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갔을 뿐이다.

“참으로 귀티가 흐르는 얼굴이네.”

도로테아는 보들보들한 뺨을 가진 아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이 어울리지 않아 보일 정도로.”

“그렇지 않아요…….”

조그마한 목소리가 쑥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혹시 황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니?”

“황궁이요?”

“응, 황궁에서 이번에 아주 큰일이 일어났거든.”

도로테아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드가 불안한 얼굴로 아이를 제 뒤에 보냈다.

“영애, 저희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지렁이에 불과한 저희가 어찌…….”

“무지렁이에 불과하다라.”

도로테아가 중얼거리며 그의 뒤로 숨은 아이를 물끄러미 살폈다.

“발레리의 말로는 아이가 이미 읽고 쓰는 법에 능할 뿐만 아니라, 제국의 예법도 아주 손쉽게 익혔다던데.”

마치 상류 사회의 경험이 몸에 익은 것처럼.

한차례 배운 것들을 다시 배우는 것이거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있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그녀의 지적에 부녀가 얼어붙었다.

도로테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제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황자들의 분열을 조장하고, 황태자로 하여금 군을 일으키게 만든 배후가 로헨 왕국이었어요.”

“…….”

“그 과정에서 그들과 몇 번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말을 흐린 도로테아가 집요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더군요, 로헨 왕국 사람들은.”

이상하지 않아요?

당신들은 고작해야 수상한 일을 벌이는 과정에 휘말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일 뿐인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데려가야 할 것처럼 굴더란 말이죠.”

느릿한 도로테아의 말에 뒤에 있던 아이는 이미 공포로 얼어붙었다.

숨조차 죽이고 있는 아이를 대신해, 굳은 얼굴의 남자가 제 품으로 손을 집어넣은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아이에게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어느새 열린 문틈으로 반쯤 몸을 들인 루크의 나지막한 경고에 그가 움찔했다.

“아, 참고로 우리 황자님은 괜한 말을 하지 않아요.”

도로테아가 빙긋 웃으며 건넨 말과 황자의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을 바라보던 주드가 체념한 듯 손을 내렸다.

“이미 다 알고 오셨군요.”

“코니움은 끝까지 당신들의 정체를 숨기려 했어요. 내가 저 꼬마 아가씨의 가치를 알게 되면 내주지 않을 거라 여겼나 봐요.”

그렇지만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그저 평범한 아이로 여기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지.

도로테아의 나직한 말에 눈을 질끈 감았던 남자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벤담 자작가의 줄리앙이 은인께 정식으로 제 주인의 망명을 청하겠습니다.”

“주인이라…….”

“헤일런 왕녀님께서는 로헨 왕국 최후의 핏줄이십니다. 왕실은 이미 ‘그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폐하께서는 영명함을 잃으셨고, 왕녀님의 형제자매들도 하나둘 그들의 손에…….”

“놀랍네. 제국의 황자들조차 저들의 손에 놀아났는데, 이런 어린아이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놓치다니.”

“그건…….”

말하길 주저하던 주드, 아니, 줄리앙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가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왕녀님께서는 출신이 그리 좋지 않아 저희 자작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기에, 다행히도 대비할 만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도로테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나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처음부터 모든 정황을 다 알면서도, 흉수들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몸을 의탁했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메릴린의 호의를 이용해 가면서까지.”

“…….”

“그녀는 오로지 순수한 호의로 당신들을 대했는데, 당신은 말로만 은인이라 부르면서 메릴린을 기만하고 위험에 빠뜨렸어요.”

줄리앙의 얼굴이 붉어졌다.

왕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선이었다고는 하나, 그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은인조차 기만하고 저버린 사실이 떳떳할 리 없었다.

“훗날 왕녀님께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시게 되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글쎄요.”

도로테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이미 왕국은 저들 손에 좌지우지되고, 심지어 사절단마저도 그들 입맛에 맞는 이들로 채워졌는데, 빠져나오는 것이 최선이었던 어린 왕녀가 어찌 본인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도로테아의 말을 듣는 내내 줄리앙의 옷깃을 잡고 있던 헤일런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벌벌 떨리는 조그마한 몸을 의식한 듯 줄리앙이 루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7황자 전하께서는 아시지 않으십니까. 태어나신 순간부터 어머니의 신분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공격받던 어린 왕녀님입니다.”

“나는 스스로 전장에 나아가 벼려진 검이 되었다. 어미를 입에 올렸던 자들을 빠짐없이 무릎 꿇렸지. 빌빌대며 남에게 의탁하려는 자들과 비교하려 들지 마.”

간절한 상대의 말을 딱 잘라 내는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벽을 깨고 올라온 루크에게 그저 왕녀라는 지위만 지녔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웅크려 있는 저 조그만 아이가 좋게 보일 리 만무한데.

줄리앙은 줄을 잘못 쥐어도 한참을 잘못 쥐었다.

‘기본적인 판단력조차 없는 충성심만 강한 기사와, 소심하고 무기력한 왕녀인가.’

무언가 가늠하듯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경의 목표는 로헨 왕실의 재건이겠군요. 왕국을 멋대로 휘두르는 자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하나뿐인 왕녀를 올리겠다?”

“그렇습니다.”

줄리앙의 말에 헤일런은 그저 멍하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건 헤일런도 동의한 일이에요?”

“예?”

숨어만 있던 헤일런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난생처음으로 ‘당연하게 짊어진 의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는 사람이 나타나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그녀와 함께하는 줄리앙은 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녀는 귀중한 신분이니 극단 사람들과 어울려서는 안 되며, 언젠가 돌아갈 때를 대비하여 늘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장차 왕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기사와 달리 헤일런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째서 여왕이 되어야 하는지.

여왕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까.

심지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줄리앙의 말을 따른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던 유일한 가족이 떠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도로테아가 천천히 몸을 굽혔다.

“헤일런, 여왕이 되고 싶니?”

“…….”

망설이는 아이의 입에서는 끝끝내 긍정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줄리앙을 향해 도로테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헤일런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렇지만 이분은 마지막 남은 왕녀님이십니다!”

“제대로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자신의 핏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왕녀죠.”

“…….”

“왕국의 귀족들이 이런 왕녀를 진심으로 따를 거라고 생각해요?”

왕국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상징성’을 지닐 수는 있겠지만, 만일 왕국을 ‘그들’에게서 탈환한 다음에는 어찌 될 것인가?

제대로 된 생각조차 없는 어린 왕녀를 꼭두각시로 두고 왕국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이 오로지 클라이브와 그의 제자들뿐일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엉거주춤하게 헤일런을 바라보는 줄리앙을 향해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

“로헨은 희한할 정도로 헤일런에게 집착해요. 이유는 명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왕가의 ‘핏줄’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존재해서일 수도 있죠.”

“…….”

“후견인이 사라진 지금, 헤일런으로서는 자신을 보호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발레리를 대신할 후견인을 여기 소개하려고요.”

도로테아가 우아하게 한쪽 손을 들어 루크를 가리켰다.

잠시 얼떨떨하게 루크를 바라보던 줄리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분이 왕녀님의 후견인이 되실 거란 말이십니까?”

“맞아요.”

“…….”

“헤일런이 스스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공식적인 보호자가 되어 줄 거예요. 제국에서 루크 이상의 보호자는 없죠.”

말없이 침을 꿀꺽 삼키는 줄리앙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뻔했다.

“걱정 말아요. 안 물어요. 의외로 착한 구석도 있고.”

할 말이 많은 듯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줄리앙을 뒤로한 채 도로테아가 시선을 돌렸다.

“헤일런.”

아이가 순한 눈을 끔뻑이며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너를 안전하게 해 주는 대신 내가 네게서 빌려 가야 할 게 있어.”

“그게 뭔데요?”

조그마한 목소리에 도로테아의 입가에 스민 미소가 짙어졌다.

“네 이름을 빌리고 싶어. 내 친구를 위해서.”

“…….”

“네가 언젠가 ‘왕녀’ 헤일런 로헤나움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때 다시 이름을 돌려줄게.”

그동안 생각해 보렴.

자신 안에 그 무거운 무게를 짊어질 만한 각오가 있는지.

아이의 짙은 초록색 눈이 저를 향해 다정한 웃음을 보이는 도로테아를, 그리고 그 옆에 뚱하니 있는 루크를 번갈아 보았다.

이윽고, 꾹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   *   *

창밖을 살피던 메튜가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며칠째 내리는 비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겨 속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도 장사는 글렀다며 혀를 차고는 반쯤 포기했을 무렵이었다.

딸랑.

종이 울리는 소리에 반색을 하고 문을 열자, 후드를 뒤집어쓴 두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실례하겠습니다.”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흠칫한 그의 시선이 절로 후드 안쪽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라도 챈 듯 젖은 후드를 살짝 벗자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

새까만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얼굴에 착 달라붙었지만, 눈처럼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그녀를 더욱 생기 있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붉은 입술, 아름다운 고동색 눈.

발그레하니 생기가 깃든 두 뺨을 보는 그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어, 저…… 그러니까.”

아름다운 여인의 뒤에서 사고가 정지한 메튜를 바라보고 있던 또 다른 인물이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메튜는 또다시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시릴 듯 푸른 눈동자의 아름다운 남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둘의 미모에 메튜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방 두 개만 쓸 수 있을까요?”

“수, 숙박계는 이곳에 쓰시면 됩니다. 그전에 신분 패를…….”

빙긋 웃은 여인이 자신의 신분을 보증하는 임시 신분 패와 함께 내민 용병 패에는 ‘프리드 모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뒤에 있는 남자의 것인 모양이었다.

설탕이 굴러갈 듯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헤일런, 헤일런이라 불러 주시면 돼요.”

한때 발레리라 불리던 여인은 몹시 즐거운 얼굴로 빌린 이름을 여관 주인에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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